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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만/ 쌀알에서 파생된 우주, 자연, 존재

고충환



문수만/ 쌀알에서 파생된 우주, 자연, 존재 


고충환 미술평론가


작가 문수만의 그림을 멀리서 보면 단색이 보인다. 그리고 좀 더 다가가 보면 패턴이 보인다. 그리고 바짝 다가가 보면 화면을 온통 가득 메우고 있는 쌀알(왠 쌀알?)이 보인다. 역순으로 치자면, 화면에 촘촘하게 배열된 쌀알이 패턴을 만들고, 그 패턴이 다시 단색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그림 속에 단색이 있고, 배열이 만든 패턴이 있고, 쌀알 하나하나를 묘사한 재현이 있다. 배열(혹은 배치)과 패턴, 단색과 재현으로 나타난 회화의 핵심 개념들이 하나의 그림 속에 다 들어있다. 

여기서 작가는 거리두기 문제를 건드린다. 거리두기란, 어떤 사물 어떤 사태를 더 잘 보기 위해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미학적 용어로, 단순히 시각적 경험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진리와 진실과 같은 관념적 실재에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심적 거리라는 개념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리 여하에 따라서 그림이 달라져 보인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시점의 각도를 문제시한 적은 있지만(예컨대 부감과 앙각, 심원과 평원과 같은), 시점의 거리를 콕 찍어서 문제시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시점의 각도와 거리 문제는 일정 정도 겹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여하튼. 이로써 작가는 그림을 보는(그러므로 그림을 읽는)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해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작가의 그림은 단색(올오버페인팅 그러므로 전면균질회화)은 아니다. 부드럽고 우호적인 느낌의 색감과 함께, 뭔가 알 수 없는 비정형의 형상(얼룩)을 숨겨 놓고 있는 것 같은 암시적인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에 미묘한 차이가 있고 그러데이션이 있다. 희미한(그래서 더 감각적인) 빛의 기미도 보인다. 이런 차이와 그러데이션, 비정형의 얼룩과 빛의 기미가 어우러져 그림은 풍경처럼도 보인다.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그림 안쪽으로 수평선이 보이는, 수평선을 경계로 하늘과 바다가 보이는, 일출 혹은 일몰을 연상시키는. 가로띠가 첩첩한 패턴이 불러일으키는 착시현상일 것이다. 풍경에 대한 선입견 그러므로 인식정보(혹은 지각정보?)를 재확인시켜주는 착시현상일 것이다. 이런 착시현상으로 치자면, 작가의 그림에는 옵아트적인 측면도 있다. 화면이 미묘하게 일렁이는 것 같은, 때로 어지럼증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인데(그러므로 옵아트는 광학적이고, 시각적이고, 여기에 어쩌면 생리적인, 그러므로 몸적이기조차 하다), 이런 느낌은 말할 것도 없이 패턴에 연유한 것이다. 

그렇다면 패턴이 뭔가. 패턴은 어떤 회화적(혹은 이미지적)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가. 하나의 단위원소 그러므로 모나드가 반복 재생산되는 모듈 구조가 패턴을 만든다. 작가의 그림으로 치자면 낱낱의 쌀알이 반복 재생산되면서 패턴을 만든다. 그러나 엄밀하게 작가의 그림에서 쌀알은 반복되면서, 동시에 반복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일일이 손으로 그린 그림 속 쌀알 중 같은 쌀알은 하나도 없다. 같은 걸 그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반복되면서 반복되지 않는, 패턴을 만들면서 패턴을 만들지 않는 이율배반과 모순율이 주는 긴장감이, 마치 화면 내부에서 발원한 에너지가 화면 밖으로, 자기 외부로 확장하는 것 같은 내적 울림(파장? 파동?)이 작가의 그림에는 있다. 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을 통한 수평적 계열이, 횡단적 연계가 형식 실험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질 들뢰즈). 반복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문법이기도 한데, 반복(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을 통해 반복(자기동일성으로 나타난 반복)을 넘어서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작가의 그림에는 화면 밖으로 확장되는 것 같은 내적 울림이 있다고 했다. 파장이 있고 파동이 있다고 했다. 패턴 자체가 어느 정도 그렇지만, 작가의 그림은 무한 확장된 그림의 부분을 보는 것 같고, 잠재적인 확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같다. 하인리히 뵐플린은 <미술사의 기초개념>에서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 미술을 비교하면서, 바로크 미술이 자기 외부를 향해 열려있는, 화면 바깥으로 연장된 확장성이 있고, 이로 인한 극적 김장감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바로크 미술의 추상화 버전처럼도 보인다. 이런 확장성이 수평 구도의 그림에서 옆으로 무한 연장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구도만 놓고 보면 대개 문명은 수직성이 강하고 자연에서는 상대적으로 수평성이 강조되는데, 작가의 그림이 자연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파장과 파동에 대해서는 동심원의 패턴이 강조된 서클 구도의 그림에서 더 두드러져 보이는데, 그림의 바깥을 향하는 원심력과 그림의 안쪽을 향하는 구심력이 상호작용하는 느낌을 준다. 동심원의 패턴이 시간의 환을 보는 것 같고, 첩첩한 시간의 궤적을 보는 것도 같다. 수평 구도의 그림에서도 그렇지만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진 총총한 쌀알이 아득한, 먼 점처럼 보이고, 점과 점이 잇대어진 연(인연)의 고리처럼도 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추상화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그 이면에 자연 풍경과 같은 감각적 실재를 품고 있고, 시간과 인연과 같은 관념적 실재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을 쉽게 추상화로 단정하고 범주화하기에 저어되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 작가의 그림을 이루는 최소 단위원소 그러므로 모나드가 쌀이 아닌가.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추상회화와 재현적인 회화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추상회화와 재현적인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아무런 의미도 의미하지 않는 회화, 순수하게 형식적이기만 한 추상회화는 없다고 했다. 여기에 색면화파로 알려진 마크 로스코는 사람들이 감정에 겨워 우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모두 추상회화에 내재 된 암시와 상기와 같은 재현적이고 서사적인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어쩌면 작가는 추상회화의 또 다른 용법을 제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쌀인가. 쌀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내재 돼 있는 것인가.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어느 날 우연히 매체를 통해, 발굴 현장에서 다른 부장품과 함께 원형 그대로 간직된 볍씨의 화석이 발굴된 것을 본다. 작가는 아마도 볍씨의 화석에서 시간의 화석을 보았을 것이다. 역사와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았을 것이다. 존재의 근원 그러므로 존재의 원형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쌀알은 바로 이런 존재의 원형에 해당하고, 존재의 근원을 상징할 것이다.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와 우리 역사가 녹아든 내러티브가 작품의 모태가 되었다. 점이 기하학적이고 관념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쌀은 유기적이고 물질적인 요소다. 쌀이라는 형태소를 통해서 나는 자연의 실재를 추상화하려 한다.”

작가 노트 그대로를 옮겨본 것이지만, 작가는 아마도 쌀을 자연의 실재, 그러므로 존재의 근원이며 원형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쌀을 빌려 자연을 암시하고 싶었을 것이다(이로써 작가의 그림이 암시하고 있는 자연 풍경과 같은 감각적 실재가 설명된다). 쌀을 빌려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암시하고 싶었을 것이다(이로써 작가의 그림이 암시하고 있는 인연의 고리와 같은 관념적 실재가 해명된다). 모든 존재는 아득해지면, 멀어지면, 점처럼 보인다. 모든 감각적 실재는 아득해지면, 멀어지면, 관념적 실재처럼 보인다. 그렇게 감각적 실재와 관념적 실재는 원래 하나고, 한 몸이었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거리 문제를 끌어들인다. 그렇게 작가는 거리 문제를 매개로, 감각적 실재에서 당위를 얻는, 추상화의 재설정을 제안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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