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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화/ 자아, 그리고 관계의 망으로부터 관계의 재설정으로

고충환



박진화/ 자아, 그리고 관계의 망으로부터 관계의 재설정으로 


고충환 미술평론가

여기에 방에 방이 잇대어진 격자의 방이 있다. 꼭 아파트가 이렇지 않을까 싶지만, 굳이 아파트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방에는 저마다 사람들이 살고, 풍경이 살고, 집이 살고, 때로 알 수 없는 추상적인 문양과 패턴이 산다. 아마도 기억이 사는 방도 있을 것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을 작가 박진화는 <네트워크의 아포리즘>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옮기면 관계(망)의 이야기라는 의미가 되겠다. 

관계가 성립하려면 내가 있어야 하고, 네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어도 좋고, 사물이어도 좋고, 자연이어도 좋고, 풍경이어도 좋고, 꿈이어도 좋고, 관념이어도 좋다. 그렇게 사람들은 유형무형의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 간 관계를 통해서 때로 친목하고 때로 반목하면서, 자연을 통해 위로받으면서, 손때 묻은 사물을 만지면서, 현실에 좌절하고 꿈을 꾸면서,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그 삶에 사연이 없을 수가 없다. 그림에 등장하는 추상적인 문양과 패턴은 아마도 그런, 알록달록한, 각양각색의 저마다의 사연을 표상할 것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삶의 관계로부터 파생된 사람들의 사연을,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여기에 그림은 형식적으로도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조각천을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기워 방 하나하나를 잇대어 놓은 것 같다. 바느질은 물론이거니와, 실제 천의 질감이며 색감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놓은 것에서 노동력과 수공성이 돋보이고, 작가의 남다른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이 감각, 이 발상을 전통적인 조각보에서 얻어왔다고 했다. 규방 문화의 정수로 알려진,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 반영된 조각보에 옛 여인들은 삶을 담았고, 자연을 담았고, 이야기를 담았고, 우주를 담았고, 존재를 담았다. 그리고 작가는 그 정신, 그 감각을 이어받아 동시대인의 삶의 초상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또 다른 작업으로, 이번에는 조각보 대신 가로로 긴 채색된 목재를 층층이 쌓아놓은 것 같은, 그리고 그 위에 사람 얼굴 형상의 실루엣을 올려놓은, 그리고 여기에 때로 배와 같은 이런저런 오브제를 덧그린 일련의 그림들이 있다. <자아의 지층>, <인류세의 지층>, <관계의 징검다리>, 그리고 <무작정 오디세이>라고 작가가 명명한 그림들이다. 아마도 관계를 또 다른 형식으로 풀어본 그림들일 것이다. 색색의 색띠들이 그림의 배경을 이루고, 그 위에 얹히는 모티브 여하에 따라서 그림은 삶의 여로, 혹은 삶의 항해와 같은 삶의 서사를 전하는 내면 풍경이 되고, 관념적 풍경이 된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주목되는 특징으로 치자면, 화면을 가로지르면서 메우고 있는 색띠들의 층이다. 이 층들에는 의미심장한 의미도 담겨있는데, 제목에도 있지만, 총총한 층들이 자아의 지층을, 역사의 지층을, 존재의 지층을 떠올리게 만든다. 후기구조주의에서는 자아를 유기적인 전체로서보다는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으로 본다.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나를 만들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매번 갱신된다. 그러므로 타자와의 관계 밖에 있는, 순수한 나,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그림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색띠들의 층은 아마도 이런, 나를 만들고 갱신하는 타자와의 관계를 표상할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일부가 된, 그러므로 나의 지층이라기보다는 어쩌면 타자들의 지층을 표상할 것이다. 지층의 존재론적인 의미가 그렇고, 역사의 지층으로 치자면, 미셸 푸코의 에피스테메, 그러므로 각 시대의 지배적인 지(知)의 단층을 떠올리게도 된다. 

이 그림들에서도 역시 형식적으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는데, 화면을 가로지르며 메우고 있는 색띠들이 하나하나 채색된 목재의 색감이며 질감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는 그 색감이며 질감을 일일이 그림으로 그려 옮겨놓고 있는데, 도대체 그 색감이며 질감은 어디서 왔을까. 아마도 빈티지에서 왔을 것이다. 굳이 구별하자면, 앤틱은 골동품이고, 빈티지는 골동품의 분위기를 흉내 낸 것이 다르다. 낡고 해진 느낌을 얻기 위해 시간을 흉내 내고, 시간을 연출하고, 시간을 조형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모든 것이 재빠르게 시간 속으로 흡수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전이되는 것이 사물들의 운명이라고 했다. 작가의 그림에 보이는 색감이며 질감은 아마도 이런 오래된 사물들이 불러일으키는, 그중에는 실제로도 작가와 시간을 같이하면서 위안이 되었던 사물들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로부터 건너온 것일 터이다. 


그리고 여기에 실루엣 형상의 사람 얼굴이 마치 물거울에서처럼 대비되고 반영되는 그림이 있다. 아마도 생명 나무를 가슴에 꼭 껴안고 있는 그림도 있다. 마치 꽃을 피우듯 한 사람이 자기보다 작은 사람을 머리에 이고 있는 그림도 있다. 아마도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표현한 것이고, 생명을 표현한 것이고, 세대에서 세대로 연이어지는 세대 유전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부엽토>로 명명한 그림들인데,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환경재앙과 기후 위기 이후, 최근 핫이슈로 부상한 인류세 담론을 다룬다. 주지하다시피 부엽토는 화분 갈이 할 때 쓰는, 영양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흙이다. 아마도 대지의 생명력을 강조한 것이고, 자연의 생명력과 함께, 생명을 주관하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떠올리게 된다. 이로써 작가는 자기를 넘어 자기가 유래한 대지와 생명으로 표상되는 원형적 여성(성)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업의 반경을, 의식의 범주를 자기로부터 타자로 확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세 담론과 관련해서는 작가도 작가 노트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인간(human)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부엽토(humus)로 보는, 사람을 흙이 변형된 형태로 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동물, 식물, 다양한 반려자들과 함께 <이상한 친족관계>를 맺어 새로운 해법을 찾아보자는 도나 헤러웨이의 이론에, 그리고 세계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사회적이든 자연적이든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상호관계 속에 존재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 즉 이질적인 결합망이라는 부르노 나투르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 actor-network theory; ANT>에 힘입고 있다. 

이로써 작가의 부엽토라는 제목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겠다. 주지하다시피 인류세 담론은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인간중심주의 사상의 한계를 폐기하고, 사람과 사람 간, 사람과 사물 간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도구적 이성의 한 갈래인 도구적 자연 사상을 폐기하고, 사람과 자연 간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 실천 논리로서, 암암리에 계급을 강조한 수직적 계통(학)으로부터 차이를 강조하는 수평적 계열(학)으로의 인식 전환이 요청되고, 그 핵심과제가 관계의 재설정이다. 이로써 작가가 평소 천착해온 관계의 주제 의식이 인류세 담론과 만나는 것을 계기로 향후 자기를 넘어,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타자(대타자 관계)마저 넘어 확대 재생산될 것임을 예상해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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