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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주/ 빨간 지붕이 있는 집, 너의 집은 어디인가

고충환



오영주/ 빨간 지붕이 있는 집, 너의 집은 어디인가 


고충환 미술평론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신을 상실하고, 중심을 상실하고, 유년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자연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하고, 존재론적 원형 그러므로 자기의 기원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렇듯 도저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이며 증상의 계절을 살고 있다. 다른 개념들이 어느 정도 다 그렇지만, 여기서 특히 고향은 실제 하는 지정학적 장소라기보다는 존재가 유래한 곳, 존재가 돌아갈 집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순전한 심리적 사실을 의미하며, 다시, 그러므로 상실된 고향에 대한 감정은 어쩌면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현대인의 공허한, 쓸쓸한, 텅 빈 마음을 의미하며, 정처 없는 자의식, 뿌리 없는 자의식을 의미한다. 

예술은 이처럼 도저한 상실감과 관련이 깊다. 상실감의 이면은 그리움이다. 모든 상실된 것들은 그리움을 불러오고, 그러므로 노스텔저와 멜랑콜리를 자아낸다. 비록 상실한 것이지만,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지만 되 불러온 그리움으로 현실을 건너는 것이다. 상실감이 클수록 그리움도 커지고 꼭 그만큼 더 절실해진다. 그렇게 세상이 온통 그리움의 화신으로 화해지면서, 존재는 상실감에 사로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움에도 사로잡힌다. 그러므로 어쩌면 상실감과 그리움은 양면적이다. 예술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좀 더 심층적으로는 상실한 것들을 일깨우는, 그렇게 상실한 것들과 직면하는, 그러므로 현실을 다시 살게 만드는 존재론적 각성의 단계에 도달하게도 된다. 

토마스 만은 예술을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라고 했다. 결핍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상실감의 자의식이 예술의 존재 이유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평온해 보이기조차 하는 작가 오영주의 그림은 역설적으로 이렇듯 도저한 상실감과 관련이 있고, 그러므로 예술의 존재 이유와 관련이 있다. 상실감과 그리움 사이, 클리세(롤랑 바르트의 독사 doxa, 그러므로 부르주아의 세계감정)와 각성의 사이 감정과 관련이 깊고, 그 감정적 현실과 관련이 깊다. 


정작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그림이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그저 허허로운 화면이 있을 뿐. 면 분할된 텅 빈 화면이 있을 뿐. 그 위에 작가는 최소한의 모티브를 올려놓았다. 집과 풍경 같은. 하늘과 땅 같은. 시간이 멈춘 듯 흐르지 않는 호수를 끼고 흐르는 길과 같은. 야트막한 언덕과 산과 같은. 별이 총총한 밤하늘과 같은. 때로 창문을 통해 풍경 너머로 보이는 집과 같은. 그리고 몇 그루의 나무와 같은. 빈 화면이 두드러져 보이는 최소한의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 하는 풍경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최소한의 풍경에 마음을 의탁해 그린 그림, 그러므로 마음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기억 너머>라고 불렀다. 다른 제목이 있겠지만, 다른 제목의 그림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 제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미처 그려지지 않은 그림들, 작가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만 그림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그려질 그림들에도. 이로써 최소한 실제 하는 풍경이 아님을 알겠다. 작가는 기억을 소환하고 있었다. 과거지사가 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된, 그러므로 상실된, 다시, 그러므로 그리움으로 환원된 시절을 불러오고 있었다. 그렇게 되 불려온 시절이 꼭 현실일 필요는 없다. 현실일 수도 없다. 기억은 현실 그대로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각색하고 극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상실된 과거를 질료 삼아 또 다른 현실을 지어내기 때문이다. 

지어낸 현실? 유토피아다. 원래 유토피아는 이상사회를 꿈꾼 이상주의자의 현실 인식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그렇게 도래할 미래를 기약한 것이지만, 작가의 그림에서 유토피아는 상실된 과거를 향한다. 상실된 유년을 향하고, 어쩌면 존재론적 자궁을 향하고, 그러므로 원형을 향한다. 다시, 원래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장소,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 초 장소를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을 매개로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 초 장소를 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없는 장소를 지어낼 수 있는 장소로 치자면 마음밖에 없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마음 풍경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그림 속 모티브를 보지 말고, 풍경을 보지 말고, 텅 빈 화면을, 어쩌면 하늘이고 강일지도 모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 마음을 표상할 텅 빈 화면 자체를 봐달라고 주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우리는 가끔 하늘을 보고 강을 본다. 그렇게 하늘을 보면서 실제로는 마음을 보고, 강을 보면서는 자기를 본다. 강을 보면서 자기를 본다? 풍경에 자기를 투사하고, 풍경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서 잊힌 자기, 아득한 자기, 잃어버린 자기, 상실된 자기 그러므로 자기_타자와 대면하고 화해한다. 하늘처럼 열린 풍경, 강처럼 흐르는 풍경을 보면서 스스로 치유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처럼 열린 풍경, 강처럼 흐르는 풍경은 일종의 계시적인 풍경이랄 만하고, 나와 내(자기_타자)가 만나는 경계의 풍경이랄 만하다. 

경계의 풍경이라고 했다. 경계는 이쪽과 저쪽을 나눈다. 그렇게 그림 속 풍경은 이쪽에서 저편을 보도록 시점이 설정돼 있다. 풍경 속에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도 있고 없는 그림도 있지만, 사람이 없는 경우에도 풍경이 그림 바깥으로 연장되고 확장된 탓에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 속 사람과 자기를, 자기의 시점을 동일시하게 해준다. 그렇게 그림 속 사람이 하나같이 등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그림 바깥에서 그림을 보는 사람도 등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미셸 투르니에는 사진 에세이집 <뒷모습>에서 사람들의 뒷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고 했다. 전면이 이미 알려진 기호를 전시한다면, 뒷모습은 기호를 은폐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무엇을 쳐다보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숨기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연민을 자아낸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기억(그리고 기억 너머)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림 속 풍경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풍경으로 표상되는 텅 빈 화면 그러므로 마음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자기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존재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 속 집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대개 빨간 지붕을 이고 있는 집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뒷모습은 그렇게, 언제나, 가정법을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가정법이 뒷모습의, 뒷모습에 대한 언술이다). 때로 집안에서 집을 쳐다보는 그림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그리고 어쩌면 그때마저도 집은 저편에 있고, 풍경 너머에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집, 아득한 집, 상실된 집, 그리움의 표상으로 화해진 집, 그러므로 이상향으로 가정되고 설정된 집이다. 나는 그 집에서 왔고,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그림 속 집은, 너의 집은 어디인지 물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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