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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선-무지개에서 파편화된 자기로의 여정

박영택

김유선-무지개에서 파편화된 자기로의 여정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1993 불새와 학
 1990년대 초반에 김유선의 작업실에서 절제된 화면에 부분적으로 개입된 자개조각들을 보았다. 화면의 어느 한 부분을 슬그머니 점유하면서 은은한 광택과 함께 부감 되는 자개는 특정한 이미지를 거느리고 출몰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전통미술에서 흔히 접하는 도상들이자 자연에서 연유하는 식물성의 형상들이었는데 그게 무척이나 감각적으로 다가왔었다. 여기서 자개는 전면적으로 표면을 뒤덮거나 그 물성과 색채, 빛으로 충만한 체 적극적으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다만 색면 추상에 가까운 화면 안에서, 미묘한 질감을 동반한 표면 위에서 매우 은밀하고 조심스레 삽입된 형국이었다. 그것은 추상적인, 섬세한 감성으로 절여진 화면 안에 결정적인 도상을 또렷이 혹은 신비스럽게 안겨주었으며 약간의 높이를 지니고 튀어 올라와 화면에 촉각적인 감각을 부여해주었다. 그로 인해 바닥 면과 자개는 은연중 분리되면서 평면과 입체, 추상과 형상, 습성의 바닥 면과 매끈하고 단호한 자개 면의 이질성이 동시에 견고하게 응고된 형국을 연출하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확인해보면 1993년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자개를 다룬 전시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작업실에서 본 것은 분명 그 이전이었을 것이다. 90년대 초 이전의 작업에 대해서는 직접 접한 기억이 없었기에 당시 작업실에서 본 것이 나의 김유선 작업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비교적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대형의 화면에 무척이나 세련되게 물질을 다루는 감각이 돋보였다는 점, 전체적으로 절제된 단순한 구성의 기조 안에 우리의 전통미술에서 연유하는 분위기, 혹은 한국적 도상과 색채를 조화롭게 결합시켜 내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런 연출과 방법론이 획일적이거나 너무 ‘뻔한’ 차원이 아니라 무척이나 세련되고 원숙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당시 내 눈에 반짝이며 박혔던 것은 단연 부분적으로 얹혀지며 묘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던 그 자개의 사용이었다.  
1993년도 개인전에 출품된 작업들은 한지에 습성으로 적셔진 수채물감과 자개가 부분적으로 형상을 양각화, 촉각화해서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새까만 자개장에 박힌 복잡한 도상들에서 부분적으로 절취된 이미지들로 보이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나비나 학과 같이 십장생 등에서 따온 형상들이 그것이었다. 또는 불새, 태극의 형상도 등장한다. 그것들은 전통시대의 이미지들이다. 전통미술이란 전통사회를 구성하는 삶의 체계, 말씀의 도상화다. 그것은 특정 텍스트를 이미지화한 것이고 그 문자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른바 주술적인 이미지들이다. 여기서 특정 텍스트란 종교, 신화, 이데올로기, 가치와 인습의 문맥 등을 일컫는다. ‘미술’이라는 근대적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 그 이미지들은 한 문화권과 시대를 통해 전승되어온, 약속된 믿음의 내용들을 기호화 한 것이자 형상화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전통적인 도상들은 거대한 텍스트를 읽게 해주는, 보게 해주는 그림들이었다. 그 안에는 생사관, 생의 욕망, 유토피아, 기원과 소망, 꿈과 바램, 이 생에서 저 생을 꿈꾸거나 주어진 생을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다소 처연한 의지와 희구들이 마구 바글거린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은 서글프다. 현세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난세일수록 선조들은 저 도상 속의 세상과 복됨을 마냥 소망했으리라. 현실계에 순간 들어선 막, 프레임에 의해 또 다른 희망의 세계를 환각처럼 열어 보이고자 했던 의지들이 순연히 수놓아진 것이 바로 전통시대의 모든 이미지들이다. 산수화나 민화가 그렇고 일상의 기물에 박힌 무수한 도상들이 죄다 그렇다. 그와 같은 전통적인 도상의 일부를 차용하는 한편 바탕 면을 채운 한지의 물성과 질감, 그 자연스러운 색채들과 어우러진 화면은 섬세한 공정과 절제된 미감으로 조율되어 있었다. 이 당시 작업의 완성도와 공정은 여타 작가들의 작업과 비교해봤을 때 무척 이례적인 편이었고 재료를 다루는 선택과 시도에서도 무척이나 앞선 시도로 여겨졌다. 또한 이 전시에서 작가는 변형캔버스, 그러니까 정형화된 화면에서 벗어난 색다른 화면을 만들고 그 표면을 죄다 자개로 덮은 추상작업도 처음으로 선보였는데 이 작업이 향후 전면적인 자개로만 나아갈 방향을 암시하는 매우 중요한 사례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연한 살구빛으로 빛나는 표면만을 안기는 전적인 추상회화였는데 직선과 함께 휘어진 곡선의 연속적인 무늬가 줄을 잇고 가지런한 배열과 단일한 색상 안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무수한 색채/빛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피부를 망막 가득 안겨주었다. 일정한 평면을 뒤덮고 있는 자개는 일종의 오브제 작업이자 표면에 환영(일루젼)을 발생시키는 회화 그 자체의 역할을 극대화하고 있다. 깊이와 공간이 부재한 체 오로지 표면만을 간직한 자개는 조명을 받으면 엄청난 광휘를 발산하면서 빛나고(전면적으로 앞으로 돌진하고) 이는 보는 이의 시선과 거리, 동선과 시간 및 그림을 비추는 광선 등의 변화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뀌어 간다. 고정될 수 없는 화면이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속되는 화면이어서 관자의 신체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하는 작업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이후 김유선 자개 작업의 핵심적인 지점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김유선이 우리의 전통적인 나전칠기에서 사용되는 그 자개를 회화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이런 사례에서는 가장 선구적인 존재다. 검정 색 바탕에 오묘한 빛의 자개로 장식한 나전 칠기는 고급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우리의 전통유물이자 대표적인 공예품이다. 나전칠기는 나무로 기물을 만든 후 채취한 옻을 가공하여 생칠을 하고 전복 껍데기를 갈아 만든 나전 문양을 붙인 후, 그 위에 다시 옻칠을 하고 나전 부분을 숯으로 갈아내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 끝에 완성되는 것으로 고도로 숙련된 기술과 인내심을 요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나전칠기는 제작에 있어서 숙련된 제작기능과 함께 수공예적인 노력과 오랜 제작기간이 소요되는 특수 공예분야로 알려져 있다. 정교한 이미지와 숨이 막힐 것 같은 광휘, 화려한 색채와 견고하고 깊음을 보여주는 평면 회화이자 부조작업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나전칠기기법을 이용해 작업을 하는 데 이른바 끊음질 기법 등을 통해 자개를 좁고 길게 오려낸 후 직선은 길게 이어가고 곡선은 짧게 끊어 특정 형상을 시문하거나 혹은 가지런히 배열해서 표면을 가득 채운다. 초기에는 특정 형상을 재현하지만 이후에는 오로지 자개를 직선으로, 수평으로 혹은 원형으로 반복해서 이어나가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주어진 회화 표면의 평면성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환영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동시에 전통적인 회화적 재료인 물감과 붓질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개만으로도 풍부한 회화성을 가시화하고 있다. 아울러 색채와 빛, 모두를 강렬하게 뿜어내는 피부, 전적으로 피부만을 보여준다. 아울러 그 자개가 지닌 견고하고 단호한 물질감으로 이루어진 회화는 조각적인 차원에서 단단한 질량감을 응축시켜 내장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나전칠기기법을 회화에 응용하는 것은 공예나 순수미술, 혹은 전통과 현대의 고루한 이분법적 구분이나 경계를 경쾌하게 가로질러 가는 어떤 측면이 존재한다. 아울러 자개를 하나하나 공들여 부착해가며 단단하게 응고시키는 공정에 들어가는 무수한 시간과 공력은 온갖 상념과 마음의 해찰을 죽이는 수련이자 의도적인 시간의 낭비(?)를 통해, 그 무용성을 통해 유용성만을 존중하는 이 자본주의사회에 역설적으로 저항한다. 바로 이러한 공정 안에는 자기 정화나 치유, 혹은 반성의 시간이 자리하는 지점이 비교적 넓게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이후 외연을 더욱 확장하면서 관자의 시선과 마음이 정화되는 차원으로 그리고 전시 공간 자체가 그런 장소성을 지닌 곳으로의 확산, 변이되는 지점을 더욱 공략하는 쪽으로 연출되게 된다. 
 
1995 궁수자리 혹은 물의 숨결
 1995년 개인전에서 선보인 김유선의 자개를 이용한 작업들은 구체적인 형상에서 벗어났고 재현으로부터 완전히 떠났다. 자개와 나무, 칠을 이용한 작업은 이제 자개가루를 뿌리거나 잘게 자른 띠들만이 규칙적이고 연속적인 배열을 이루어 부착되고 있을 뿐이다. 그 작고 촘촘한 조각의 단위들은 황홀한 색채, 영롱한 빛으로 흘러넘치면서 모종의 풍경으로 비상한다. 규칙적인 크기로 자른 면들을 이어 붙여나가기를 반복하였을 뿐이지만 그 미니멀리즘에 유사한 단순하고 절제된 작업이 역설적으로 자연풍경을 연상시키면서 흘러 다닌다. 그것은 이른바 자연계의 이미지, 그러니까 별, 은하수, 물과 같은 것들이다. 확고한 형상을 지니지 못한 것들, 가시적 존재로 남지 못하고 흐르고 변화를 거듭할 뿐인 것들이자 빛으로 출렁이고 색으로 발화하는 것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너무 멀고 깊고 아득하고 영원하며 숭고한 것인 동시에 막막하고 이상적인 존재들이다. 이 남루한 인간의 현실적 몸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자리한 것들이어서 몸을 지닌 것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존재들이자 근원적이고 시원적인 것들이다. 동시에 그것들은 다만 명멸할 뿐이고 지속해서 흐를 뿐이어서 결코 잡히지 않는다. 유한한 인간의 대척점에서 그저 무한함과 영원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들이다. 김유선의 작업이 그와 같은 근원적인 대상을 연상시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궁극적으로 신비스러운 빛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자개조각들이 부착되어 연출된 작업이 묘하게 은하계와 강/물을 떠올려주는 작업은 무척 신비스럽기도 하고 흥미로웠다. 천상계와 지상계에 저당 잡힌 물은 위와 아래에 있는 것들이자 고개를 들고 보아야 하고 또한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아야만 하는 것이라 대칭적인 시선을 지닌 풍경이기도 하다. 
그것은 분명 추상적인 상황을 안겨주는 동시에 광활하고 숭고한 구체적 자연을 연상시키는 매개가 되어 작동한다. 그러니까 은하수, 별, 물 등이 자개의 가루와 조각들을 빌어 등장한다. 작가는 그 자개를 ‘빛덩이’ 그 자체로 인식했다고 한다. 자개의 빛은 어두운 기억을 지우는 빛이자 죽음과 너무 먼 거리에서 반짝이는 빛이며 그 자체로서 반짝거리는 작은 조각들은 이내 별과 동일시되었다. 작가에게 자개/빛은 그가 사랑하는 그림의 목록에 들어와 있는 고흐의 별, 모네의 빛, 클림트의 반짝이는 황금빛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빛은 사물의 존재와 형태에 대해서 가르쳐준다. 빛은 친절한 손놀림으로 사물의 윤곽과 색채와 피부의 질감, 속성들을 은밀히 지시한다. 미술작품에서 빛은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통일감과 질서를 부여하기도 하고 소멸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명암대비를 낳는다. 결국 빛이 미치는 범위가 사물이 보이는 범위가 된다. 한편 빛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빛은 사물의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빛과 색채는 문화적이고 종교적이고 정신적이다. 빛은 모든 이에게 축복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빛을 동경하고 추구하기도 한다고 일상생활의 측면에서 보아도 빛이 없으면 삶이 불가능하겠지만 특히나 미술가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각별하게 빛/색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다.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도 없고 결국 이미지도 없다.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은 그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빛에 의해 응고 되어, 광물질의 표면처럼 빛나기도 했고, 부서지는 색채의 가루로 소멸하기도 하고 흐린 대기처럼 엷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도저히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끊임없는 변모를 거듭하는 것이 자연의 본 모습이다. 자연은 수시로 색을, 밀도를 바꾸고 있다. 그렇게 자연은 쉼 없이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언제부터였는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과 역사가 자연 안에는 내장되어 있다. 단단한 질료와 희박한 질료 사이를 오가며 자연은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빛/색들을 시시각각 발산하고 있다. 이 싱싱하고 파득 거리며 날 것으로서 뒤척이는 자연의 몸, 빛에 의해 수시로 몸을 돌변하는 자연을 포착하려는 것이 모든 미술가들의 부질없는 욕망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빛을 잡아 놓고자 했는데 그것이 그림이고 사진이며 영상작업과 다양한 재료를 동반해 빛을 다루는 작업들이었을 것이다. 김유선 또한 그 신비스러운 빛, 내면의 빛이자 정신적인 빛, 상처와 고통을 승화하는 이상으로서의 빛, 그 오묘한 색을 자개로 구현하고자 한다. 여기서 빛과 색은 불가분의 관계로 설정된다. 자개 자체는 희한한 색채덩어리이자  빛을 뿜어내는 결정체이기도 하다.    
자개로 빚은 빛은 가장 멀고 크고 깊은 것들의 가시화이자 원초적인 풍경이고 물질을 빌어 궁극적으로 비물질적인 것들에 가닿고자 한다. 이때 자개가루나 자개 띠를 담는 틀/화면은 자유롭게 변형되었고 당연히 사각형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 원형이나 반원형, 육각형의 박스 혹은 길고 좁은 띠가 되어 벽에 부착되거나 바닥에 놓였다. 그것은 캔버스/화면이자 조각이기도 하고 독특한 사물이 되었다. 자개로 뒤덮인 표면은 단지 시각에 호소하는 것만이 아니라 만지는 촉각적 공간을 형상하고 있다. 납작한 화면의 평면성을 인식시키면서도 그로부터 이탈해 3차원적으로 튀어나오는 듯이 발광하는 표면은 강력한 환영을 발생시킨다. 화면의 평면성이라는 물질성을 충족하면서도 이를 벗어나 원근법과는 다른 탈중심화된 공간지각방식을 만들어내면서 평면과 그것을 와해시키려는 시각적 환영 사이의 충돌이 교차하고 있다. 동시에 전통적인 회화적 재료가 아닌 오브제를, 천연의 자연재료를 화면에 밀착시켜내면서 표면을 색다른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이 작업은 저부조(입체)로 만들어진 것으로 회화와 조각 사이에 걸쳐져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 변형 화면 내지 회화이자 이미 조각이 되어버린 물체는 벽에 설치되거나 바닥에 놓이는 식으로 전시 공간 전체에 관여하고 있다. 이른바 설치적 방법론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는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자연계를 관자들이 좀더 실질적으로, 직접적으로 체득하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일 것이다. 하늘, 별, 물을 추체험하게 하는 공간 연출에서 연유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벽에 길에 부착되면서 작품은 회화이자 조각, 오브제가 되었고 아니 그런 구분이 모호한 특정한 존재가 되어 벽으로부터 튀어나오는 형국이 되는 순간 마치 벽과 일체가 되어 있다는 느낌 내지는 벽과 불가분의 관계로 작동하면서 서로 공모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벽은 비어있거나 단지 작품이 걸리는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바닥 또한 마찬가지다. 공간 전체가 작품과 불가피한 관련성을 맺어버렸기에 전시장은 흡사 실제 자연 공간처럼 연출되었다. 그렇게 해서 전시장에 들어온 관자들의 신체는 벽과 바닥에 가설된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시각적 체험, 몸적 체험을 겪는다. 그것은 수직의 시선만이 아니라 수평의 시선이고 관자들의 이동, 시간, 바라봄의 여러 변수들에 의해 지속해서 변화를 겪고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이 작품의 내용이 된다. 그러니까 작품의 내용이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기보다는 전시공간에 들어온 관자의 개입에 의해 점진적으로 완성되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장소는 시간과 상호 교차한다. 장소는 일종의 사건에 해당하는데, 이는 장소가 필연적으로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소는 또한 위치이기에 지각과 인식이 모두 작용하기도 한다. 사실 모든 미술은 장소 안에 존재한다. 다분히 장소특정성을 지닌 이 작업은 작품이 어떻게 보이는지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작품이 놓이는 공간 배치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는 뜻을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치작업은 관자가 실제 장소와 맞닥뜨리는 마주침을 증폭한 것으로, 환경 전체를 미술작품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설치미술은 특정 공간에 들어온 관객의  감정적, 지적인 체험을 수반하는 신체 경험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관객이 그 연극무대로 들어가, 자신이 익명의 퍼포먼스를 상상하도록 요청받고 있음을 깨닫도록 해준다. 그만큼 김유선의 작업은 장소에 매우 민감한 작업이다. 그래서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놓인 자개조각들로 덮인 물체가 흡사 실재하는 별이나 수면이 되어 반짝이거나 파득거리며 유동하는 듯한 환각, 환시를 끝없이 안겨 주고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들은 그러한 가상의 놀이, 체험에 몰입하게 된다. 
한편 일종의 레디메이드인 자개조각이 끝도 없이 사각형과 원형의 표면을 채워나가는, 이른바 증식과 분열로 이루어지는 형태들을 생산해내는 이 작업은 분명 편집증적 반복행위로 이루어졌다. 단일한 단위가 지속해서 반복되고 무한히 유지되고 있다. 유한한 것들이 무한함을 흉내 내고 작은 자개조각들이 죽지 않는 별이 되고 물이 된다. 아울러 자개라는 재료 자체가 이미 화려한 장식성, 빛과 현란한 색채의 발산을 지니고 있으며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 자연에서 길어 올렸다는 사실 등을 간직하고 있는, 사연 많은 오브제다. 무수한 의미망을 거느린 자개는 한 땀의 빈틈도 없이 매우 치밀하고 섬세하게 표면을 형성한다. 자개를 하나하나 붙여나가는 행위 자체에 요구되는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모종의 자기 학대적 반복과 기다림 속에서의 고통, 쾌락의 환영을 추구하는 마조히즘적 주체의 전형을 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보는 이의 신체적 움직임과 광선의 각도나 변화, 조명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작품은 마치 옵아트나 키네틱 아트로 보여지기도 한다. 
김유선의 작업은 자개의 표면을 마주 대할 때 느끼는 시각적 강렬함과 함께 온몸으로 체험하는 입체적 울림 또한 느끼게 해준다. 화면 전면에서 반짝이거나 중심에서 방사형으로 무한히 휘감겨 가는 자개의 거대한 행렬은 잔잔한 물결 위의 파문과도 같아 평면의 한정된 사각 틀에서 벗어나 관람자가 존재하는 3차원의 입체적 공간으로 울렁거리며 퍼져 나간다. 여기서는 재현의 필요조건인 지시 대상을 재현물 자체가 대신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자개라는 재료, 오브제 자체가 지닌 빛, 색채(추상적인 요소)가 스스로 자연이미지의 재현을 대신해주는 것이다. 대상이 재현되어야 하는 바탕 면/화면이 그 자체로 재현의 주체가 되고 있으며 재료 스스로 재현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관객의 위치 이동에 따른 빛의 난반사에 의해 여러 가지의 흐름, 의미들도 생산해낸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빛의 강도에 의한 표면의 유동적인 흐름이 화면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 관자의 상상력과 정신적 활력을 자극하면서 자연현상을 떠올려주는 강력한 매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유선의 작업은 우리에게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 모더니즘의 평면성 논리에서 벗어나 시각과 환상, 질감 모두를 즐기게 해주는 놀라운 표면을 안겨 준다. 이 모든 것들이 1995년 개인전에 선보인 작업이 지닌 중요한 의미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김유선이 사용하는 자개가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작가의 의미 부여일 수도 있지만 김유선은 “자개는 나에게 핏덩이 이다”라고 말한다. 자개는 빛덩이이자 핏덩이였던 것이다. 바다 속 파편물이 몸속에 박혀서 진주를 탄생시키는 조개의 삶처럼, 자개의 본질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소망과 아름다움에 대한 숭고함과 경외심이라는 얘기다. 이 대목에는 개인사적인 절망과 죽음, 상처 등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이 자개작업에서 비롯되었다는 뉘앙스가 묻어 있다.  
2001 오래된 바다
 2001년 전시는 <오래된 바다>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오로지 물만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하늘의 별, 은하계가 지상으로 밀려 내려온 형국이다. 사실 자개의 기원은 바다이기에 자개 자체는 이미 물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개의 아름다움은 물의 흐름과 수압, 시간이 만든 흔적일 것이다. 여기서 물을 표현한 작업들은 당연히 바닥에 놓이면서 자연스레 내려다 보는 이의 시선에 조응한다. 따라서 바닥에 놓이고 수평에 의해 눕혀진 박스에 자개는 물길처럼 구부러지고 휘어지고 여러 다양한 물길의 흐름을 만들어 보여준다. 잘게 자른 자개띠들이 연속적으로 배열되어 물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착시에 의존한다. 결코 직접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암시적인, 그러나 추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흔적들을 연출한다. 김유선은 늘상 암시적인 이미지를 부단히 제공해왔다. 따라서 그것은 추상적인 작업이 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인 자연을 연상시키는 작업으로 보인다. 왜 물일까? 중국의 옛사상가들은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형태의 다양성과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는 물은, 자연의 이치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우주 원리들을 개념화하는 주요한 모델을 제공해왔다. 김유선 역시 우주나 물, 별, 빛 등 근원적인 것을 늘 대상으로 해 왔다. 물은 동양문화권에서 지혜를 상징한다. 지자知者가 물을 좋아하는 것은, 물이 좀 더 낮은 데로 쉼 없이 영민하게 흐르는 동動의 특징을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사들이 흐르는 물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이유는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고, 혹은 당장의 앞일도 예상하기 힘든 변화막측의 세상 속에서 지혜를 찾으려는 것이다. 정직하게 흐르는 물처럼 자신의 처신에는 분명 순리적인 선택이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물을 바라보는 자의 정신세계 내의 의미 있는 부분과 의미 없는 부분을 정돈함으로써,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며 부당한 정신의 찌꺼기를 사상捨象시킨 채 진정한 의미처로 그의 정신을 곧추세우고자 열망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물소리는 듣는 이의 내면세계를 영원 속으로 이끈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그 소리는 세속의 시비 소리를 지운다. 그렇게 옛 선비들은 무한정 넓은 자연(물)을 보고 감탄하면서 위대한 자연 앞에 왜소한 자신을 돌이켜보았고, 좁은 식견과 천근淺近한 학문을 하염없이 탄식했다고 한다. 그러니 동양문화권에서 물은 삶의 가치를 절실하게 일깨우는 중요한 존재이다. 나아가 청음의 소리와 시원하고 단호하며 곧은 물줄기는 모든 것을 지우고 본질로 육박시킨다. 이 속악한 세상을 거침없이 씻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스스로 정화하는 것이야말로 물의 중요한 속성이라고 본 것이다. 
이 당시 김유선의 화면은 부정형으로 긴 사각형, 원형, 육각형의 박스 내지는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형되고 전시장의 벽면과 바닥 전체를 활용하면서 배열된다. 표면을 덮고 있는 자개조각들의 흐름, 빛의 산란은 그대로 수면이 되고 물줄기가 되어 전시장 바닥을 흘러 다니는 듯, 자잘한 파문을 형성하는 듯이 착시를 일으킨다. 조명을 받은 화면은 반짝이는 수면이 되어 움직인다. 관자의 이동은 그 빛나는 수면을 지속시키고 이끌며 나아간다. 이미 1995년 전시에서 활용한 방법론과 전시연출방식이 이 전시에 와서 더욱 세련되게 구사되고 있다. 그로 인해 전시장에 들어온 관자의 신체에 더욱 깊숙이 관여하면서 이른바 신비스러운 체험, 명상 등을 은연중 요구한다. 우리는 오로지 몸을 통해서 세계를 경험한다. 아마도 이 전시에서 작가는 자연풍경의 제시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관자들이 보다 심오한 세계로의 진입, 체험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고자 했던 것 같다. 망막을 통해 정신적 활력으로의 비상과 그로인해 모종의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도는 일정 부분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된다.  
2013 티어스
오랜 공백 기간을 거친 후에 선보인 2013년 <티어스>연작은 이전과는 조금은 다른 작업들이었다. 작가에 의하면 조개의 살에 작은 파편이 박히면 흔히 이를 ‘암에 걸렸다’고 표현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암적인 존재가 조개의 눈물로 불리는 영롱한 진주가 된다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는 김유선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메타포가 된다. 이는 앞에 이미 언급한 것처럼  “자개는 나에게 핏덩이 이다”라고 말한 작가의 발언에 내포되어 있다. 나는 앞에서 작가에게 자개는 빛덩이이자 핏덩이였다고 말했다. 바다 속 파편물이 몸속에 박혀서 진주를 탄생시키는 조개의 삶처럼, 자개의 본질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소망과 아름다움에 대한 숭고함과 경외심에 대한 메시지를 은닉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러티브는 작가 작업에 있어 중심적인 축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과정에는 개인사적인 생의 경험, 죽음과 절망, 상처 등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작동하고 있다고도 앞서 언급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작가는 자개를 선택했고 자개를 결정적인 도구로 쓰는 작가가 되었다. 자연스레 진주조개와 자신의 삶을 비교하고 그 자개를 보면서 무지개(완벽함, 이상향)를 떠올렸다고도 말한다. 이처럼 2013년 <티어스>연작은 자신의 작업이 보다 직접적으로 개인사적인 서사로 진입하는 단계임을 알려준다. 그렇게 해서 이제 자개는 별과 물을 거쳐 눈물이 되었다. 눈물의 상징으로 유리알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눈물이 주제어가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성경의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성경 문구를 거론하고 있다. 핵심은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곳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장 4절)
 여전히 자개가 등장하지만 동시에 입체조각과 유리알, 점자 등을 활용한 작업들은 치유와 개인적 종교체험을 강조하는 맥락 위에 서 있다. 눈물은 치유의 상징이자 모든 장애를 상징하고 유리알은 빛을 투영시켜 무지개를 만드는 물방울이며 돌은 돌처럼 굳어진 왜곡된 자아를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눈물이 텍스트가 될 때 점자가 된다. 이제 진주의 어머니인 자개에 대한 인식이 이전의 자연물, 혹은 빛에서 좀 더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는데 이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성찰의 거울로 작동하는 한편 치유의 상징이자 자기 내면을 다독이는 놀이의 도구가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게 자개작업은 이전처럼 화려하고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번득이기보다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들과 아픔, 불안한 요소들, 결핍된 부분들 및 그 모두를 숨김없이 발설하는 매개가 되었다. 이제 완벽하게 정돈되고 밀집되어 나오는 작업 대신 갈라지고 파편화되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자개들은 출몰한다. 그것들 또한 바로 작가 자신의 모습, 다양한 내면의 반영물이기도 하다. 이 작업을 통해 작가는 좀더 자신의 알려지지 않은 내부로, 심층적인 기억의 회로와 마음의 굴로 들어간다. 작업은 그 길로 들어가는 모종의 유희가 되었다. 이처럼 자아와 심리에 대한 천착이 김유선의 <티어스> 작업에 깊이 자리 잡은 것 같다. 여기에는 또한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도 짙게 드리워져 있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영적(spiritual)이라는 단어는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속하고자 하는 ‘통상적인 갈망이나 삶의 근원과 죽음의 본질을 알고 싶은 욕망, 우주에 작용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가해한 힘에 대한 인정 같은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가피하게 영적인 것을 탐구하고 우리의 존재와 사후의 삶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고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그럴 것이다. 아울러 영성에 대한 미술은 삶의 덧없음에 대한 두려움,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애도 의식에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 존재의 본성을 결정하는 것이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인지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미술사에서 영적인 미술은 인간성의 가장 심오한 차원의 필요와 삶의 가장 큰 신비를 표방해왔다. 예를들어 20세기 비구상미술/추상은 관객이 추상 표면이나 형태를 바라보면서 영적인 계시 혹은 적어도 깊은 명상의 감정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출현한 것이다. 김유선의 작업 역시 전시장 공간을 일종의 묵상 공간으로 만들어 그 안에 관객들이 발을 들여놓도록 권유하는 편이다. 사실 작가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작품이 우리의 일상을 넘어서는 신비스러운 소통의 형식을 표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속해서 질문해왔었다. 미술 창작 그 자체를 일종의 의사신비적인 경험 혹은 깨달아가는 실천으로 접근해온 것이 이 작가의 작업이었다고 본다. 이른바 극한의 헌신을 요구하는 창작 과정을 통해 구현된 작품들과 그것이 설치된 공간은 작가를 또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 한편 작가와 관객은 종교가 주는 그것과 유사한 묵상적이고 정서적이거나 계시적인 경험으로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2017 파편화된 자기
 2017년에 이루어진 근작은 <파편화된 자기Fragmented Self>라는 제목의 전시로 이는 두 개의 자아가 통합되며 성찰해가는 과정을 작품화했다고 한다. <파편화된 자기>라는 제목은 심리학자인 하인츠 코헛(Heinz Kohut)의 『'자기 심리학』 에서 인용된 제목이라고 한다. 
'미숙한 유아의 자기는 연약하고 뚜렷한 형태를 갖고 있지 못한 파편화된 형태이다. 유아 시절 건강한 갈등 해결의 방법을 부모로부터 학습 하지 못하면 갈등과 서로 다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불안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이로 인해 자아의 통합 기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면서, 파편화된 취약한 자기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파편화된 자기는 허위 자기, 가짜 자기이다. 누가 건드려도 부서지고 넘어진다.' 
작가는 최근 몇 년간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분석과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억압된 내면의 모습, 거짓된 자아와 직면했다고 한다. 불안에 쉽게 휩쓸리고, 친밀한 관계성의 어려움 등이 파편화된 자신의 심리구조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만성화되어 단단하게 굳어져 있던 거짓된 신념들이 하나씩 깨지면서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원형을 찾아가는 시기에 자신의 자개작품과 너무나 유사한 자개 공예가의 작품 간의 표절 의혹 사건이 터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작가에게 처참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이로 인해 겪은 심적인 고통들이 이후 자연스레 자개, 유리알, 바로크 진주 등의 매체를 통해 공간 설치 예술작품으로 연출되어 나왔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파편화된 자기’작업이다. 
'인간은 상처와 고통, 불안에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가. 괜찮지 않은데도 애써 괜찮은 척 과하게 자기방어를 하고 수많은 감정들을 억압하며 살아가는지. 깨지고 부서지고 갈라진 것들에게 마음이 이끌린다. 안쓰럽고 아름답다. 깨진 자개작품의 그림자는 물 같고, 무의식의 빙하가 깨진 얼음 조각처럼 보인다. ‘파편화된 자기’에서 그림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림자는 억압된 감정들, 숨기고 싶은, 감추어진 내면의 어둠이다. 그림자는 존재의 실체를 왜곡 시킨다 –가짜 자기의 특징이다. 겉으론 그럴 듯 해 보이는 인간 이면의 추악함처럼 기괴하고, 일그러진 얼굴들, 어떤 정체 모를 짐승, 괴물도 보인다. 아주 흥미롭고 마음에 든다.' (작업노트)  
파편 조각으로 이루어진 작업들은 완벽주의, 강박적인 형태와 표현으로 작업해온 기존의 방식을 과감하게 부수고 있다. 그로인해 이전 작업들과는 달리 모종의 자유로움과 풍성함이 느껴진다. 한편 파편화된 조각들이 암시하는 것은 균열되고 분열된 작가의 자아이미지일 것이다. 단단하고 결정적인 자개조각들이 아니라 거죽 같고 투명한 막처럼 생긴, 찢겨진 피부들이 허공에 매달려있다. 눈부시게 빛나는 이 피부들은 빛을 받으면 마냥 환하고 투명하다. 또한 이 피부의 실체와 그것들로 인해 드리워진 그림자는 정확히 일대일로 대응하며 벽면에 떨어진다. 그 그림자는 단지 대상의 흔적이나 불가피하게 그늘진 어두운 자리가 아니라 또 다른 완벽한 자아의 대리물로 위치하고 있다. 그림자는 마치 먹물이 흐리게, 진하게 그려진 수묵화처럼 또 다른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이는 마치 실체와 그 내면을 동시에 보게 해주는 한편 인간 내면의 어둠과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바로 그림자가 이를 이끌어내고 있다.  
천장에 매달린 이 껍질은 가대한 잎사귀나 동물의 살/피부를 연상시키고 한다. 아니면 커다란 눈물일 수도 있다. 박혀있는 유리알, 크리스탈 재료는 빛을 받으면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게 빛나며 눈물을 상징하는 유리알과 일그러진 진주(바로크 진주) 역시 크기는 매우 작지만 마냥 환하다. 그렇게 투명한 조각 작품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부는 비결정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어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 풍경은 결국 작가 자신의 내면풍경이자 자기 정체성의 초상이다.  
사실 정체성은 고정되거나 일관적이지 않은 개념이다. 집단이 서로 섞이는 것처럼 개인들도 교환과 적응이라는 과정에 지속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체성은 유동적이고 맥락이 변화함에 따라 변형 가능한 것이 되었다. 이른바 유동적인 정체성(fluid identity)이 그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는 가장 결정적인 기호의 하나가 바로 얼굴일 것이다. 얼굴은 우리 몸의 맨 위에 붙어서 타자의 눈에 자기 몸의 내‧ 외부, 의식과 무의식의 일단을 거침없이 발설하는 장소이자 무의식이 의식화되는 장소, 따라서 양가적인 장소다. 우리는 모두 어떤 얼굴을 하고 다닌다. 그런데 사실 그 얼굴은 타자들의 욕망으로 조립된 얼굴이다. 그것은 나의 얼굴이면서도 동시에 모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얼굴이다. ‘나와 같은’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이 타자의 의미다. 그래서 다양한 인간의 얼굴 역시 동일하게 정형화되어 있다. 다르면서도 동일하고 나의 얼굴/타자의 얼굴이 구분 없이 포개져 있는 형국이다. 그것은 일종의 가면(페르소나)이다. 우리가 진정한 자신이라고 규정하는 것에서보다 가면에 더 많은 진리가 있으며 진리가 표명되는 방식은 허구를 가장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사회적 정체성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가면임을 깨닫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억압된 태도들을 드러낼 때 비로소 우리는 가면을 의식할 수 있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의 하나가 바로 미술일 수 있다. ‘현실에서의 억압을 가리는 커튼이 아니라 억압되고 배척된 적대와 트라우마를 투사하는’ 실재의 화면(스크린)이기를 바라는 작업이 그것이다. 정신분석 안에서는 ‘나’를 고유한 병리적 증상의 소유자로 인식한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를 어지럽혀온 모든 얼굴들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불안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얼굴들은 언제나 ‘나’의 욕망을 조직하고 통제해온 ‘대타자’의 욕망과 구분되는 진정한 주체가 되기를 열망하는 도정에 놓여있다. 아울러 이 흔들림은 상상계의 근원적인 불안정성을 표상한다. 실재란 이상적 자아가 아무리 완벽하고 매혹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결국 자아이미지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차이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대상에 새겨진 타자의 응시 그 자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없고 타자와의 차이 속에서 흔들린다. 나는 무수한 타자의 조합이고 타자의 욕망이다. 그러니까 ‘타자들의 욕망으로 조립된 자아상’이 나란 얘기다. 
김유선의 이 파편화된, 매우 유연하고 얇고 불안하고 중력의 법칙에 의해 죽죽 아래로 늘어지고 허물처럼 걸린 껍질, 거대한 피부는 그 자체로 텅 비워진 인간 형상을 암시한다. 자개껍데기는 이른바 파편화된 몸(fragmented body)을 상징하며 그러한 몸이 얼마나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개껍질은 허물과도 같은 일종의 지표(index)에 해당한다. 어떤 발생 원인이 남긴 흔적이다. 또한 변하기 쉬운 연약한 재료이기에 여기에는 중력, 무게, 유연성, 팽창, 가열, 냉각, 압력 등의 힘이나 과정의 결과로 형태가 결정되는 이른바 프로세스아트를 연상시킨다. 고정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부러지고 흐르고 녹고 썩는, 즉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는 재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이 작업에 있어 핵심적이다. 그렇게 이 자개 파편은 과도기적인 상태에 맴도는데, 그것은 더이상 전체의 부분은 아니지만 여전히 중력의 끌어당김에는 저항한다. 동시에 이것들은 유동적이고 비계층적이며 비선형적이고 탈중심화되어 있다. 이른바 리좀(rhizome)적이다. 리좀은 다수의 입구와 출구가 있는 비계층적 지식 네트워크를 지칭하는 용어인데 본디 리좀은 생각이나 붓꽃, 양치류처럼 줄기가 가로로 뻗어나가고 마디에서 새로운 줄기가 나오는 뿌리줄기류 식물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용어를 서로 연결되어 있으나 시작도 끝도 없고, 정해진 길도 없으며, 경직된 구성과 지배개념에 저항하면서 이종적인 요소들을 연계시키는 능력을 지닌 사상과 연구를 특징짓기 위해 사용했다 이후 리좀적인 작품은 뜻밖의 병치와 접속, 분열, 다양성을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엄정하고 완벽한 수공으로 빚어낸 이전의 자개작업이 이처럼 근작에 와서는 부정형으로, 부서지고 부드러운 존재로 벽에 걸리고 천장에 매달렸다. 얇게 떠낸 얼음장이나 고드름, 혹은 실처럼 위태롭고 유약하게 가설된 것들은 선명한 그림자를 동반하며 그렇게 파편화되고 불안한 자아와 어두운 내면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 구원이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주는 과정으로서의 작업인 셈이다. 이는 영혼과 교감하는 활동,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잠재된 세계, 동시에 한 개인의 내면에 있지만 우주 전체가 함께 호흡하는 세계를 드러내고 그 세계를 교감하게 하는 예술에 마냥 충실하고 자 하는 제스처로 혼곤하다. 그 여정이 1993년에서 2017년까지의 작업과정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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