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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리내, 바느질과 실 그 오브제의 메시지

김종근

송미리내, 바느질과 실 그 오브제의 메시지  


작가에게 있어 진정한 예술의 자양분은 무엇일까? 그러한 의문에 가장 명료한 관계로 답을 준 작가 중의 한 사람이 프랑스 출신의 여류 설치 작가 루이스 부르주아이다.
21세기 예술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부르주아는 1911년 파리에서 태어나 99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70세가 되어서야 주목을 받았고 이듬해 1982년 뉴욕현대미술관에 회고전을 계기로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황금 사자상, 뉴욕과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파리 퐁피두 센터 등에서 대규모 전람회를 가진 그녀의 작품에는 내재적 불안과 소외감, 사랑과 삶, 그리고 여자로서의 인생의 경험과 삶을 근원적으로 다루고 있다.
죽는 순간까지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뜨거운 창작열,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해 가졌던 치명적 상처의 오브제들로 그녀는 예술을 통해 승화하고 치유했다. 
송미리내 작가의 실 작업을 보면서 김수자의 보따리 퍼포먼스나 오래된 여행 가방을 붉은 실에 달아 불규칙적으로 흔들리게 만든 시오타 치하루도 연상되지만, 루이스 부루주아를 떠올리는 것은 부르주아 집안이 대대로 실을 가지고 천에다 수를 놓는 타피스트리(tapestry) 사업을 해온 집안에서 자라난 환경이 송미리내와 어쩌면 많이 닮아있다. 

자신이 모든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 일컬었던 어머니와 어린 시절에 관한 내용을 부르주아는 “양털실처럼 한 올 한 올 촘촘히 흐르는 강을 낀 커다란 집에서 엄마는 늘 볕이 잘 드는 곳을 골라 앉았어요. 저만치 강물에는 햇살이 부서지고 머리 위 흠잡을 때 없이 섬세한 거미줄에는 보석 같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는 그곳에서 엄마의 바늘이 쉴새 없이 움직였다”라고 기록했다. 

우연히도 송미리내의 어린 시절은 부르주아와 똑같았다.
온종일 의류공장과 바느질을 하는 부모님의 환경 속에서 자란 그녀에게 바늘의 찌름과 실의 부드러움을 정교하게 엮어내는 일이야말로 일상적 삶이었고 그것이 곧 그의 예술이 되었다.
송미리내 작가의 그 칸칸이 엮어지는 매듭과 그 끝없는 이음이 보여주는 진실이 그녀에겐 언제나 삶이었고 운명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 바느질로 옷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가는 어린 시절의 바늘과 실이 그녀의 예술작품에 주제가 되고 모티브가 된 것은 너무나 필연적이다.
작가는 그 실을 엮거나 이을 때마다. 그 순간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서는 순간들이었으며 여행 같은 것이었다. 
그런 바느질 집 딸이 작가가 된 것이다. 그것은 다시 부모에게서 걸어 나온 홀로서기였으며 첫 발걸음이다.
그녀는 이 운명적인 실과의 관계 속에서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실이었으며 여기서 '실’은 인간의 삶 그 속에 깊숙이 자리한 가족과의 끈이자 세상을 이어주는 불가역적인 관계의 오브제가 된 것이다.
적어도 송미리내의 작업은 이것을 '수양과도 같은 '실'을 엮어가는 행위로 나에게 세상을 엮어가는 것과 같은 삶의 에너지를 선사하며 그 행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 무한한 순환성을 나타내고, 내 존재를 확인하는 것과 같다.' 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기본적으로 그녀가 작업하는 형식은 고기 잡는 그물망처럼 앞뒤가 열린 공간을 엮어내는 구성이자 캔버스에 바늘로 일일이 찔러가며 흔적을 만들어내는 꿰매는 바느질의 반복이다.
그 결과물로 만들어진 형상들은 무수히 사각형의 형태들을 만들어 놓는다.
이것은 매우 수동적이며, 비효율적인 노동의 집적이자 바느질이 만들어 놓은 흔적이다.
이러한 행위, 혹은 퍼포먼스는 요즘 사회와는 다르게 아날로그적인 바느질 작업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추적하고 관계를 복구시키는 인간 삶의 순수한 존재 행위이다.
송미리내의 작업과 창조는 바로 그 기억의 복구이자 확인인 것이다.
그것 자체가 인간의 온전한 희망이 될 수는 없지만 부루주아처럼 이러한 바느질 행위는 분명 거친 삶에 대한 치유이자 상처의 회복이며 미리내에게는 가장 큰 역동적인 힘이다.
작가는 그러한 상처의 힘이 곧 사람들의 희망이자 메시지로서 선물이라고 말한다.
“삼라만상의 반복 속에 끝없이 관계 맺고 살아가는 매듭의 원형” 그것이 미리내의 불편한 이음 일지라도 완전한 매듭을 향한 이음의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의 바탕에는 때로 나노 입자의 이미지 배경,흰 종이 위에 그어진 붓질 위를 섬세하게 균일하게 바늘의 찌름과 실의 부드러움으로 ‘Connected2 (너와 나 사이間)’는 완결된다….

어쩌면 미리내는 바느질의 딸이었기에 바느질과 실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상태에서 희망은 허망이 되기 쉽지 않은가 라고 반문하며 
그 희망의 언덕과 고지를 향한 상처의 복구를 작가는 실 위를 넘나드는 작업으로 사람들의 꿈과 상처를 공유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 의미는 바로 예술이 가져야 할 최종의 목표이며 도착점이다. 그것이 송미리내의 예술적 진실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느질이 갖는 행위와 특성, 그리고 한 땀 한 땀을 반복적으로 꿰매는 과정이야말로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순결한 행위이다. 작품은 바로 그것의 기록으로 새겨진결과물이다.
송미리내는 그것을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두고, 관계를 맺어나가며 그 안에 희망을 수 놓는다.
수 없이 늘어진 ‘실’과 ‘실’을 교차시키며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개체들을 연결하는 매개체를 마침내 창조한다. 
그 행위가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송미리내는 현대미술 속에서 끊임없이 교차하고 관계된 ‘실’을 통해 인연을 드러내며 세상을 하나로 엮어내고 연결하는 오브제를 실로 선택한 것이다.
그 실 작업에 원천은 자신이며, 가족이며, 관계를 구성하고 정의하는 상징적 예술 행위이다. 
그렇다면 오브제로서 그의 실에 힘과 생명력이 주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운명과 인연이라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그 실 안에 있고, 그 실에 메시지를 부여하는 작가의 영혼이 순결하고 아름답고 고귀하기 때문이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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