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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를 주목한다. -변시지 (1926-2013)

김종근

이 작가를 주목한다. -변시지 (1926-2013) 
외로움과 슬픔의 제주, 황갈색 노래 –(가나화랑.10월16-11월15일)
김종근 


나는 그를 제주의 외로운 폴 고갱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변시지 화백, 그에 관해 나는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20대 중반 홍익대학교 대학원의 미학과를 다니던 시절, 과 후배 중에 얼굴이 통통하고 야무진 그러면서도 순박한 여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 후배의 이름이 변정은 이었는데 공부를 함께 하면서 선, 후배 간의 자주 모일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가 변시지라는 화가이며, 제주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나는 이미 자료와 화집을 보고 변시지라는 화가의 작품을 잘 알고 있었지만 놀랍고 반가웠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해인가 휴가를 내어 제주에 며칠 머물면서 당시 변화백이 명예 관장으로 있는 기당 미술관을 방문했다.
미술관 한쪽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거칠고 노랑 바탕의 대작들을 보면서 나는 변화백의 예술세계를 궁금해했고 그때 비로소 아주 가깝게 그의 작품을 쳐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변정은씨 개인전에서 아버님의 근황과 몇 가지 책과 예술 세계가 담긴 잡지들을 통에 변시지 화백이 천형처럼 가진 그 지독한 외로움의 세계에 동행할 수 있었다. 
그 분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멀리 타히티로 그림을 그리러 떠났던 폴 고갱이 생각났다.
물론 변화백은 고향이 제주라서 고갱과는 달랐지만 말이다.

변시지 화백은 1926년 5월 20일 서울 서귀포 서홍동에서 5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시기는 우리가 일제 식민지하에서 나라를 빼앗기고 모두가 궁핍한 속에서 살던 시절이었다. 다만 변화백의 살림살이는 선대에서 물려받은 농토와 재산이 있어 그래도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친은 전형적인 한량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일본을 왕래하면서 신학문을 익혔고 평생을  책과 벗하며 신문물을 받아들일 정도로 신지식의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변화백의 어린 시절은 별났다. 유독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돼지를 키우는 뒷간에 몰래 들어가 새끼 돼지 목에 새끼를 잡아끌고 다니며 놀다가 급기야는 돼지 목이 졸려 죽을 정도로 장난기가 그득했던 망나니였다.
특히 그 가운데 그는 유년의 인상 깊은 추억으로 서당에서의 공부 시절을 떠 올렸다. 당시에는 초보였지만 그때 눈 떴던 한학과 붓글씨가 후일 그의 화풍 중에 두드러지게 수묵화의 바탕을 이룬 뿌리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의 이런 고백은 그의 그림이 간결하고 검은색 외곽선으로 완결 짓는 형식으로 했는가를 이해하는데 매우 소중한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제주 서귀포의 생활은 길지 않았다. 여섯 살 되던 해 부친은 ”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데 서귀포 촌구석에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너희는 개화된 일본에서 공부하여 세상 넓은 것을 보려무나“ 하시며 그 길로 가산을 정리하여 일본행 여객선에 오른 때가 1931년이었다. 
이듬해 그는 오사카 화원심상 고등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어린 체구에 힘이 셌던 그는 소학교 2학년 때 4학년 선배와 씨름을 하다 오른쪽 다리를 접질리면서 평생 불편한 몸을 지니게 되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그에게 불어닥친 불행은 양다리를 잃은 프랑스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의 고통스러운 삶을 상기시켰다.
그것을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뛰어놀지 못한 한을 품고 살면서 대신 그림 그리기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이것은 결국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동 미술전에서 오사카 시장상을 수상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42년에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화가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5년에는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동경으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스 프랑세즈 불어과에 입학하고, 데라우치 만지로(寺內萬治郞)로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인물화와 풍경화를 수학했다.

그 영향으로 1940년 후반 그의 인물화와 서울로 와 그린 비원 등 풍경화에서 당시 그의 표현력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뛰어났는지를 확인하는 결정적 증거를 보여준다. 
이런 실력으로 그는 전형적인 좌상의 인물화와 풍경에 전념하면서, 1948년 일본 최고 권위의 34회 광풍회(光風會)에 공모전에서 스물세 살이라는 최연소 나이로 최고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수상한 사례는 일본 화단에서도 유사 이래 전무후무 한 일로 화제가 되어 일본 NHK방송에서 토픽으로 선정, 방송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화려한 수상과 경력에도 이방인에게 일본에서의 작가 생활은 만만치 않았고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노라고 그는 회상했다.
이때부터 그는 민족성이나 민족의식을 자각하면서 ”고향으로 가자, 내 조국 풍속이나 문화에 젖으면 새로운 화풍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는 강박관념에 오랫동안 시달렸다고 한다.
마침 1957년 윤일선 서울대 총장과 장발 미대학장으로부터 조국의 미술 발전을 위해 서울대에서 강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는 영구 귀국했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오히려 그에게 더욱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자유당 말기 황폐한 서울의 분위기는 창작보다는 우리나라 특유의 패거리 문화인 지연, 학연 혈연으로 지켜줘 화단의 반목과 질시가 그를 괴롭혔다. 
그는 술과 작업으로 신음했고 이때 부인을 만나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무엇인가 새로운 예술 세계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했고, 또 다른 도전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1963년부터 비원의 절경과 아름다움에 빠져 빠짐없이 비원으로 출근하며 한옥의 처마와 정자의 곡선미에 탐닉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가 극사실 화폭을 크게 그리게 된 이유도 여기 이것이었다.
1975년에는 제주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는 고향 제주로 44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제주는 다시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예술가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의 가슴 속에는 ”변시지 너의 것을 찾으라“고 제주의 본질을 추구하라고 자꾸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크게 갈등했다, 일주일을 술로 배를 채우기도 하고, 이 세상을 떠나 버릴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변시지의 황갈색 바탕색과 쓸쓸함과 고독한 제주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탄생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보통 초창기는 1947년 이후 1957년 귀국하기까지가 10년 일본 오사카와 동경과의 유학시대. 그리고 1957년 귀국에서 1975년 고향인 제주도로 귀향하기 전까지 서울시대가 중반기이다. 그 이후 2013년 작고하기 까지 제주생활이 그의 마지막 후반기이다. 
여기서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흥미롭게 지적 하는 부분은 환경에 따라 늘 화풍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일관된 주제를 갖기 보다는 서울에 있을 때는 서울 풍경, 제주에 갔을 때는 제주의 전형적인 풍경이 등장하는 스타일이다.
특히 약한 바랜 듯한 장판지 색이나 좋아 비닐처럼 일어나는 터치의 경계선 화풍이 그것이다.
후기로 갈수록 변시지 화백은 소박하면서도 아주 단조로운 구성으로 말 그리고 바다, 노인의 
제주에서 닥쳐오는 한없는 쓸쓸함과 그리움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들면 그의 작품에는 한 마리의 새와 돌담의 까마귀, 낮게 엎드린 초가와 소나무 이 모든 것을 휘몰아치는 제주의 바람이 전부였다.
그의 이러한 풍경 속에는 빠짐없이 구부정한 촌로,어쩌면 아니 화가 자신이 거친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런 풍경과 이미지가 어디서 나왔는가를 작가는 자주 등장하는 까마귀는 지워졌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고 했다.
제주에서 까마귀는 길조로 인식됐고, 차례를 지낸 후 곳으로 지붕에 음식을 뿌리면 까마귀가 새카맣게 날아들어 좋아 먹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시지 화백의 작품 속에는 드러나는 주제와 스토리만으로 다 할 수 없는 비애와 고독감이 독약처럼 퍼져 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이 황갈색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도 이 적막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그림 어느 곳에도 하늘도 바람도 받아도 사람도 심지어 바람마저 온통 황갈색으로 덮여 있다. 그뿐이 아니라 휘어질 대로 휘어진 노인의 신체와 제주도의 초가집 그 바람에 흔들리는 가엾고 쓸쓸한 소나무. 조랑말과 돛단배가 그의 화면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너무나도 단순한 필치로 그러나 그 안에는 더 할 수 없는 예술가의 외로움에 중독된 풍경이 펼쳐진 제주도 였다. 
콩으로 물들인 누런 장판지처럼 칠해진 바탕에 가슴 찡하게 펼쳐진 이 독창적인 화풍에는 
유년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모피로 붓고 씨를 이겼던 수묵화의 고유한 방법에서 연유 되었다고 고백했다.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고향을 떠나 부초처럼 떠돌던 삶속에서 가슴에 새긴 운명적인 상처들을 어둡고 절망을 상징하는 제주의 검은 바다로 화폭에 묵시적으로 담아냈다.
때로는 이 제주도의 척박함과 외로움을 혼자 바닷가에 서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심경을 담아냈다. 어쩌면 이것이 변시지 화가의 진정한 초상이며 그의 처절한 눈물이며 고백이다.
이 외로움과 쓸쓸함, 예술가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천형 같은 상처로 그는 제주의 삶을, 예술가의 궤적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가슴을 후벼 파듯, 애틋한 색채의 황갈색으로 
마치 고흐가 삶의 마지막 이상향을 찾아 아를르로 향하면서 미쳤던 노란 색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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