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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현대미술의 위상과 풍경

윤진섭



대구 현대미술의 위상과 풍경

윤 진 섭(미술평론가) 


Ⅰ.
 한국미술계에서 대구미술이 차지하는 위상은 무엇인가? 내년이면 대구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이하는 현 시점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전혀 무익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대구야말로 일찍이 섬유산업이 발달한 고장으로서 그러한 자본을 바탕으로 미술에 대한 컬렉션이 이루어졌으며, 자연스럽게 미술에 대한 후원층이 형성돼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대구 시내에 30여 개를 웃도는 화랑들이 성업 중이라든지, 미술 인구가 이천 명을 상회하는 면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대구 현대미술을 논의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대구현대미술제]의 출범이다. 1974년, 계명대학교 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대구현대미술제]는 전국적으로 현대미술제가 부재하던 당시 오로지 대구미술인들에 의해 결성되고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미술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 보다 앞서 한국미술협회가 [서울현대미술제]를 1973년에 개최하기로 하고 언론 보도도 하였으나 불발에 그치고 마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아무튼 1974년에 실험미술에 관심이 많은 청년작가들을 중심으로 [대구현대미술제]가 결성된 사실은 대구를 현대미술의 메카로 부상시킨 시발점이었다. 1) 그에 비하면 2011년 대구미술관의 출범은 광주, 부산, 대전 등 타 지역에 비해 다소 의아할 정도로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비록 늦기는 했지만 깔끔한 외관에 기능적인 현대 시설을 갖춘 대구미술관은 개관이후 뛰어난 기획력으로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아왔다. 2)

 이처럼 [메이드 인 대구 Ⅱ]전에 대한 글을 쓰면서 대구미술의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 전시의 초대작가 중 상당수가 [대구현대미술제]를 비롯하여 대구 현대미술의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곽훈(1941-  ), 권정호(1944-  ), 김영진(1946-  ), 박두영(1958-  ), 박철호(1965-  ), 서옥순(1965-  ), 송광익(1950-  ), 최병소(1943-  ) 등 총 여덟 명의 초대작가들은 50대 중반에서 70대 후반에 이르는 폭넓은 연령층을 형성하면서 각자 서로 다른 조형적 색채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의 작품세계를 들어서 대구 현대미술의 전체적인 면모를 서술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수 있으나, 이 전시의 모태가 된 [메이드 인 대구]전 3) 의 내용을 살펴볼 때 이 전시가 지닌 높은 비중을 알 수 있다. 본 전시의 기획자는 대구 현대미술의 성격을 ‘실험적이고 진취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전통을 [대구현대미술제]에서 찾고 있다. 즉, “현대미술의 발원지인 대구의 예술적 진보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대구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 속에서 대구 현대미술의 위상을 수립하고자 한다. 기획자는 대구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다양성을 들고 여덟 명 초대작가들의 “실험적이며 진취적인 활동” 4) 을 통해 대구 현대미술의 오늘을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구미술관 10주년을 앞두고 그 성과를 부각시키기 위해 기획자는 근래에 초대작가들이 제작한 신작을 중심으로 전시를 기획하였다. 


Ⅱ.
 이번 기획전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1) 대작 위주에, 2) 현장 설치작업이 주류를 이루며, 3) 미발표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이번 전시에는 또한 작품의 제작배경과 작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인터뷰 영상이 곁들여짐으로써 작가와 작품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시선을 압도하는 작품의 크기와 개수이다. 초대작가 여덟 명 모두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대작위주의 신작을 발표하여 전시장 전체가 생기에 감도는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60대 초반에서 70대 후반에 이르는 연령이 무색하게 도전적인 의지가 작품 전체에서 엿보였는데, 이는 이 기획전이 지향하는 것처럼 초기의 [대구현대미술제]가 표방했던 실험정신과 전위적 도전의식의 소산인 것처럼 여겨졌다. 또한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초대작가 좌담회는 얼책(facebook)과 유튜브(Youtube) 등 SNS 매체를 통해 공개돼 80년대 이후 대구 현대미술의 전개에 관한 대중적 이해의 확산을 가져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구미술관은 예술적 취향과 표현방식이 서로 다른 초대작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어떤 공통점을 추출할 것이며, 나아가서는 동시대를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예술가들에게서 과연 어떠한 동시대성을 발견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제기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전시기획자의 다음과 같은 생각이 토대가 된 것으로 여겨져 여기에 인용한다.   
 
 “대구 현대미술의 힘은 집요한 작가로서의 태도와 작품의 다양성에 있다. 70년대를 거친 대구출신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새로운 것에 대한 다양한 실험정신과 도전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대구가 현대미술의 중심이라는 자각과 그 저력에 힘을 보태어 줄 수 있을 것이다 ” 5)

 따라서 전시장에서 내가 보고 느낀 활력과 시각적 충격은 대구의 작가들이 연령에 관계없이 지금도 예술에 대한 도전정신에 충일해 있으며, 작가들 상호간에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였다. 


Ⅲ. 
 전시에서 뚜렷이 감지되는 상반된 기류는 ‘표현의 분출’과 ‘절제된 감정’이었다. 전자에는 곽훈, 권정호, 박철호, 김영진, 서옥순이, 후자에는 최병소, 박두영, 송광익이 해당된다. 물론 ‘표현’이라고 했을 때, 그 층위와 정도는 다양할 것이며, ‘절제’ 또한 서로 다른 양태와 정도가 있을 것이나 언어의 기술적(記述的) 한계를 무릅쓰고 이런 표제를 붙여 보았다. 

 공통적인 것은 물성(物性)이 됐든, 개념이 됐든, 아니면 표현 그 자체가 됐든 간에 초대작가들 여덟 명 모두가 실험을 극한까지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스펙타클한 정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도 거의 공통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현대미술의 개념화 현상과 함께 어느 덧 ‘구경거리’가 돼 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6), 그것을 일종의 트랜드 탓으로 간주할 수 없는 까닭은 이 작가들이 겪어 온 미술계의 지난한 현실에 있다. 

 앞에서 나는 이번 초대작가들 중 상당수가 [대구현대미술제]와 연계돼 있다고 썼거니와, [대구현대미술제] 이후 근 오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미술계의 판도는 많이 변했다. 알다시피, 광주비엔날레의 창설로 대변되는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미술계에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는 이른바 상업주의의 대두이다. 그와 함께 전문 큐레이터 세대의 등장은 작가위주의 전시기획에서 전문가 위주의 전시기획으로 미술계의 판도가 변해 갔음을 의미한다. [대구현대미술제] 이후에 나타난 대구화단의 변화에서 보듯이, 작가들 주도의 전시기획이 종언을 고했다는 의미는 상업주의의 대두 이후 작가들 스스로 각자 도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차가운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비단 대구화단 뿐만이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전체, 나아가서는 세계의 미술계가 겪지 않으면 안 됐던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 와중에서 무너진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작가정신의 치열성이었다. 각종 아트페어와 옥션으로 대변되는 자본과 상업주의의 무차별적 공세 앞에서 작가들이 겪지 않으면 안 될 곤혹감은 이른바 ‘빵이나 작품이냐’는 선택일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작품이 예쁘장하게 포장되는 이른바 팬시화 현상은 한국 상업주의 미술의 현장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이것이 작가정신의 붕괴 현상과 무관하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곽훈, 권정호, 김영진, 박두영, 박철호, 서옥순, 송광익, 최병소가 이번 기획전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준 작가의식의 치열성은 70년대 대구의 현대미술이  지녔던 전위정신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메이드 인 대구 Ⅱ]전의 기획이 주효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70년대를 거친 대구출신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새로운 것에 대한 다양한 실험정신과 도전의 발자취”와 이번 전시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작가의식의 치열성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Ⅳ.
 그렇다면 의식의 치열성이란 무엇인가? 나로서는 기존의 작업이 지닌 상투형(cliché)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작업들이 많이 나타난 현상을 들 수 있다. 가령 권정호의 <Untitled 358-당신도 언젠가 나와 같이 되리라>(설치)라는 닥지로 해골을 만드는 작업은 기존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바닥에 검정색 거울을 깔아 삼천 팔십 점의 작품이 집합적으로 자아내는 죽음의 느낌을 강화시키고 있다. 최병소는 볼펜과 연필을 사용, 신문지가 너덜너덜하게 해질 정도로 긋는 기존의 작업에서 벗어나 전혀 손대지 않은 오브제로서의 신문지와 선을 그은 같은 크기의 신문지를 여러 점 병치하는 작업을 출품하였다. 도심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고판에서 착안한 박두영의 보색을 이용한 미니멀한 추상회화 작품들은 현실과 회화적 이념 사이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반면, 무려 삼백 여 점에 이르는 곽훈의 드로잉 작품들은 기세(氣勢)의 다양한 극한적 발현이라는 측면에서 정반대의 경우를 보여주었다. ‘코로나 19(Covid 19)’의 상황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김영진의 설치작품은 에밀레 종소리에 19개의 촛대, 80개에 이르는 관과 그 위를 덮은 국기 등을 통해 특정한 상황보다는 보편적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옥순의 거대한 천 설치작업은 의식이 투영되는 거소로서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이다. 감은 눈과 뜬 눈이 대비되는, 먼 거리에 위치한 천에 바느질 한 자화상이 시선을 끌어당긴다. 판화와 회화,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박철호는 자연에서 이끌어 낸 이미지를 근간으로 필(筆)의 기세를 통한 회화적 표현에 주력한 다양한 방법의 작업을 보여주었다. 흑백의 체스판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판에 잘게 자른 한지를 겹겹이 붙인 뒤, 그 위에 수많은 팔걸이의자를 부착하여 벽에 고정시킨 송광익의 <무위지예(無爲紙藝)>는 기존의 정교한 모듈식 패턴의 한지작업에 벗어난 새로운 방법론의 제시였다. 

 이상 간략히 언급한 이번 출품작들의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표현의 분출’과 ‘절제된 감정’의 두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각자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을 이처럼 간단하게 서술하는 데에는 언어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지면을 통해 이처럼 무리한 시도를 한 이유는 70년대 이후 대구 현대미술의 풍경을 이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어서이다. 1970년대 중반에 [대구현대미술제]가 창립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대구는 민중미술 등 현실참여적 경향보다는 모더니즘이 번성한 곳이며,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별 변함이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역으로 대구의 현대미술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를 그려보는 것도 과히 무익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한 일은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한 것처럼 한국미술계에서 대구미술의 위상을 점쳐보는 일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그만큼 대구미술의 영향력이 크고 넓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대구미술관 주최 [메이드 인 대구]전 서문, 2020>
   
  

1)  [대구현대미술제]는 서울보다 앞선 1974년에 창립돼 회를 거듭할수록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작가들을 결집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박현기, 이강소, 김영진, 이명미, 황현욱, 최병소, 이교준 등 대구가 고향이거나 대구에 뿌리를 둔 작가들은 [대구현대미술제]를 중심으로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작업을 펼쳐나갔다. 특히 강정에서 이벤트가 펼쳐진 1979년, 제5회 [대구현대미술제]는 대구시내의 7개 화랑에 분산돼 열렸는데,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등 15명의 일본작가들이 다수 참여, 당시 지방의 사정으로는 매우 드물게 국제전의 성격을 갖췄다. 한편, 강정의 냉천에서는 이건용, 이강소, 박현기, 김수자, 김용민, 문범 등이 이벤트를 벌여 실험적인 열기를 더했다. 뿐만 아니라 박현기, 이강소, 김영진, 이현재 등이 비디오 작품을 발표하여 비디오 아트가 미술의 한 장르로 정착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대구현대미술제] 창립의 의미는 [서울현대미술제]를 비롯하여 강원, 부산, 전주, 광주, 청주 등 전     국 단위 현대미술제 창립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데 있다. 또한 전국의 현대미술 작가들이 서로 교     류를 하는 가운데 정보를 공유하고 친교를 맺는 구심점이 된 것 또한 [대구현대미술제]가 한국 현     대미술에 기여한 공로이다. 최근에 새로 시작된 [강정 대구현대미술제]는 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     의 전통을 잇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윤진섭, <새로운 미술의 등장 -70년대 미술의 전개와 화단사적 의미>, 대구현대미술제 40주년 기     념세미나 자료집, 2014. 이와 관련된 보다 상세한 정보는 <대구문화예술회관 기획전시 대구          미술다시보기-대구현대미술제 '74-'79> 도록을 참고할 것. 

2)  2011년 개관 이래 대구미술관의 전시 방향은 대략 대구출신 내지는 출향 작가의 조명전, 대구 미술의 현재를 살펴보는 기획전, 세계적인 유명 작가의 초대전, 국내외 현대미술의 재조명 및 이슈 등으로 구분된다. 그 중 외국 작가 전시로는 리차드 롱을 비롯하여 장 샤오강, 야요이 쿠사마, 알렉스 카츠, 잉카 쇼비나레, 양푸동 등이 있고 대구출신 및 작가전으로는 이인성를 비롯하여 서병오, 이강소, 곽훈, 곽인식, 최병소, 이배, 남춘모 등이 있다.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전시로는 [프레임 이후의 프레임 : 한국 현대 사진운동 1988-1999](2018.10. 23-2019.1.13),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2018.1.16-5.13) 등을 들 수 있다. 대구미술관의 기획전들은 아트인컬처, 서울아트가이드 등등 미술저널이 평가하는 올해의 우수 전시에 꾸준히 랭크되고 있어 미술관의 성가를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3)  2011년 8월 10일부터 11월 20일까지 대구미술관 개관특별전으로 열린 전시다. 우선 이 전시가 열린 프로젝트 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천장고가 무려 5.4미터에 가로 42미터, 세로 24미터에 달하는 직육면체의 거대한 공간인 이 방은 실험적인 작가들의 전시를 위해 특별히 설계한 인상이 짙다. 그러한 공간에 개관 첫 행사로 [메이드 인 대구]전을 배정했다는 사실은 대구미술관이 지향하는 진취적 성격을 말해준다. “1970년 [대구현대미술제]가 당시 현대미술의 기폭제였다면, [메이드 인 대구]전은 대구미술의 도약을 위한 적극적 시도”(김용대 관장), “대구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강효연 전시담당 큐레이터) 등과 같은 발언은 이 전시가 지닌 의의를 함축하고 있다. 이 전시에는 구성수(1970-  ), 권오봉(1954-  ), 남춘모(1961-  ), 박종규(1966-  ), 배종헌(1969-  ), 이교준(1955-  ), 이기칠(1962-  ), 이명미(1950-  ), 정용국(1972-  ) 등이 초대되었다. 

4)  유명진(전시 담당 큐레이터), 전시개요 및 기획의도, 2020년 9월 20일 기자간담회 배포용 자료.  

5)  유명진(전시 담당 큐레이터), 전시개요 및 기획의도, 2020년 9월 20일 기자간담회 배포용 자료.  

6)  현대미술에서 물량 위주의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사례로는 아이 웨이웨이나 황용핑 등 중국작가들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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