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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홍일화전 / 미지와 공포의 ‘숲’으로부터 공생의 ‘자연’으로

김성호

미지와 공포의 ‘숲’으로부터 공생의 ‘자연’으로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숲에 이르기까지 
재불 화가 홍일화는 그동안 인간의 다양한 형상을 표현한 구상 회화를 통해서 인간이라는 주제 의식에 천착해 왔다. 미메시스의 조형 언어와 맞물린 밝고 화려한 색감 그리고 활달하고 경쾌한 붓질로 인간이란 단어와 병치해서 탐구해 온 욕망, 소비, 패션, 사회, 역사 등의 테마가 그것이다. 
그러던 그가 최근 ‘숲’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 그가 얼마 전 제주도 곶자왈에서 체류하며 작업했던 경험이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가족과 떨어져 홀로 제주도 외딴 깊은 숲에 들어가 날마다 숲과 맞닥뜨리면서 생활하고 작업했던 경험이 작업의 주제를 전환하게 된 동인(動因)이었다. 물론 그가 20여 년간 탐구해 오던 ‘인간’이라는 테마를 던져 버리고 완전히 숲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단어와 병치해서 탐구할 테마로서 자연은 늘 작가의 창작을 위한 고려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탐구할 대상이었지만 그 계획이 빨리 찾아왔다. 
자연은 ‘바다, 강, 땅, 숲, 동식물’ 등으로 대별된다. 특히 홍일화가 곶자왈에서 날마다 대면했던 ‘숲’이라는 이름의 자연이었다. 숲은 강, 땅, 동식물 등을 껴안은 자연이다. 모든 세밀한 자연의 요소들을 두루 포함하면서 자연을 은유하는 것이 숲인 셈이다. 홍일화에게 ‘숲’이란 곧 자연을 의미하는 ‘제유(提喩)의 장치가 된다. 제유란 부분이 전체를 대변하는 비유의 방식이다. 백발이 노인을, 빵이 식량을 제유의 방식으로 비유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인간으로부터 자연으로 화제를 바꾸게 만드는 강력한 동인은 숲이었다. 
자연을 대별하는 ‘숲’은, 작가 홍일화에게, 곶자왈을 만나기 전까지는 보편적이고도 관성적인 인식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숲’이란 소풍, 산책, 등산 등의 사건으로 대면했던 ‘소소한 경험의 대상’이자, ‘오지 체험’과 같은 방송 프로그램 등을 통해 ‘간접 경험하게 된 단순한 대상’일 따름이었다. 문명의 때를 벗고 잠시나마 휴양을 빌미로 찾는 도시로부터의 도피처,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위로의 공간, 현대인의 지독한 경쟁적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명상의 공간과 같은 것이 그동안 작가가 인식하던 숲과 자연이었다. 
그런데 작가 홍일화가 직접 몸으로 곶자왈이라는 ‘숲’을 맞닥뜨리면서 변화가 왔다. 우리는 안다. 체험(體驗)이라고 불리는 직접 경험은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동안 홍일화가 무심하게 바라보거나 멀리 떨어진 채 대상화하는 정도에 그쳤던 ‘숲과 자연’에 대한 생각이 제주 ‘곶자왈’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맞이하면서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그 변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곶자왈이리는 장소성과 맞물리면서 야기되는 ‘무엇’이다. 숲이라는 의미의 ‘곶’과 덤불이라는 뜻의 ‘자왈’의 합성어인 곶자왈은 제주 방언으로서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 고유의 숲”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한다. 보라! 평탄하지 않은 산기슭과 바위들 그리고 그곳을 휘어감 듯이 자라는 식물 넝쿨과 그곳을 지나는 야생의 동물들은 곶자왈이라는 숲을 삶의 무대로 삼는다. 
작가 홍일화가 숲을 통해서 자연을 재성찰하게 된 작금을 상황을 수학적인 문법으로 비유해서 말한다면, 인간을 정의역(定義域)이라 할 때 자연은 공역(共域)이고 숲은 치역(値域)인 셈이다. 이것을 함수의 기호로 표기하면 ‘f: 인간 → 자연’이 되겠다. 치역인 숲은 공역인 자연의 부분이다. 부분은 전체를 다 이야기하지는 못해도 전체의 한 부분을 강렬하게 전한다. 숲으로서의 ’자연‘은 작가 홍일화에게 무엇을 강렬하게 전하고 있는가? 


홍일화, 곶자왈. 910x195cm( each 130x195cm x 7) oil on canvas.2019


II. 미지와 공포의 숲 
작가 홍일화가 곶자왈을 소재로 그린 작품을 보자. 마치 오랑주리 미술관에 영구 설치된 모네(C. Monet)의 수련 연작 벽화처럼, 7점의 커다란 캔버스가 한 쌍을 이룬 채, 전시장 벽면 가득히 풍경을 만들고 있다. 이내 초록색이 배어 나올 듯한 싱그러움으로 가득한 화이트큐브의 공간은 곶자왈의 숲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물방울이 서린 유리창을 통해서 밖의 풍경을 내다보는 것처럼 난초점(亂焦點)을 드러내는 그의 곶자왈 풍경은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이슬을 흠뻑 먹거나 풀잎 위에 윤슬을 가득 얹은 것 같은 일렁이는 초록의 풍광 위에는 검은 나무들이 몸을 뒤틀고 똬리를 틀면서 화면을 횡단한다.  
그의 풍경화에는 이전의 인물화에서 보이던 일련의 점묘법이 여전히 자리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면, 물감을 펼치고 이지러뜨리는 좀 더 분방한 필치가 눈에 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눈, 코, 입처럼 시선을 끄는 부분과 얼굴 표정에 집중하던 인물화와 달리, 그의 최근 풍경화에서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초점을 버리고 다초점이나 난초점으로 풍경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풍경화에서는, 실제의 자연이 그러하듯, 그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월하거나 특별하지 않다. 그저 꽃과 나무, 풀잎이 사이좋은 이웃처럼 자리하면서 조화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화폭을 가득 채우며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풍경화를 보라. 그곳에는 마치 들판의 꽃 무더기를 뷰파인더에 가득 들어오도록 접사(接寫)로 촬영한 듯한 ‘꽃들의 이미지’가 한가득하다. 이러한 작품에는 ‘렌즈로 필름에 담은 이미지와 뷰파인더로 포착한 이미지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 ‘뷰파인더의 시차(視差)’가 워낙 좁아서 ‘혼자 잘난 존재’가 끼어들 틈이 없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어떠한 무엇이 또 다른 무엇보다 아름다운 꽃이 있을 리 없다.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세계인 까닭이다.   
그러나 그의 풍경화에는 이상적인 조화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들 또한 발견된다. 바로 추상적 이미지로 남는 미지(未知)의 영역이 그것이다. 이 영역 안에는 무엇인가 특정하거나 구체화할 수 없는 ‘모호하거나 초현실적인 풍경’이 그 안에 자리한다. 때론 모호해서 추상적이거나 때론 기이해서 초현실적인 풍경은 홍일화의 작품에서 가로선을 축으로 한 심층(深層)에 자리한다. 즉 화면의 위가 ‘현실 속 지(知)’의 영역이라면 화면 아래는 ‘추상 혹은 초현실의 미지 영역’이다. 

홍일화, 임시풍경0218. 캔버스에 유채. 46x55cm. 2020
홍일화, 임시풍경 1203. 캔버스에 유채. 100x100cm. 2019



작품을 보자. 숲 속 호수로 보이는 물가에 홍학이나 두루미처럼 보이는 기다란 다리를 가진 새 한 마리가 서 있고 호수의 표면 위에 이 새의 모습이 반영된 채 그려져 있다. 현실계의 홍학처럼 보이는 새의 정체도 그다지 명확하지 않지만 그 아래 반영체의 모습은 모호한 핑크(pink)의 덩어리일 따름이다. 또 다른 작품들을 보자. 숲과 호수를 구분하는 듯한 수평선이 자리한 화면 위에는 연기처럼 불분명한 형체의 덩어리가 떠 있고 그 아래 수면에 그림자처럼 반영된 희미한 이미지를 드리우고 있다. 어떤 작품에서는 색색의 버섯으로 보이는 부채꼴 형상이 수면 위에 자리하고 그 아래 반영된 역상 이미지가 쌍을 이루면서 하나의 특정할 수 없는 원형 생명체의 모습을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작품들에 작가는 ‘임시풍경’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두 단어를 고의로 붙여쓰기해서 ‘고유명사’처럼 만든 작품명 ‘임시풍경’은 그가 대면하는 자연 풍경이 어느 하나 고정된 것이 없이 변화를 지속하는 존재임을 피력한다. 위의 작품들에서 수면 위 ‘현실 속 지’의 영역조차 모호하거나 특정하기 어려울진대 수면 아래 ‘비현실 속 미지’의 영역은 더할 나위 없다. 양자 모두 자연의 순환과 임시적 변화를 지속하는 운동의 공간인 셈이다. 다르다면 ‘현실 속 지’의 영역은 순환과 변화의 질서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만, ‘비현실 혹은 초현실 속 미지’의 영역은 그 변화의 영역을 가늠하기조차 힘들다는 것이다. 
홍일화에게 곶자왈처럼 ‘현실 속 비현실적인 숲’은 이러한 대비의 미학이 쌍을 이룬 채 우리에게 선보이는 ‘임시풍경’의 모습을 고스란히 품어 안는다. 곶자왈의 현실 속 숲은 이러한 현실과 초현실주의 영역을 두루 함유하는 까닭에 미지의 영역을 극대화한다. 우리는 안다. 이러한 미지의 영역이 공포와 연동되어 있음을 말이다. 곶자왈이라는 숲속은 산길이라고 찾을 길 없는 돌과 암석, 그 위를 뒤덮는 야생의 풀꽃과 식물 넝쿨들로 우거져 있어, 낮이든 밤이든 우리를 ‘낯선 공포’ 속으로 이끈다. 숲의 공포! 그것은 우리가 정원(庭園) 혹은 공원(公園)이라 일컫는 ‘인공 자연’이 주는 안락함처럼 간단하고 명쾌하지 않다. 꽃과 잔디와 호수로 구획되고 정리된 공원의 모습과 달리 곶자왈과 같은 숲은 야생의 날것들을 위한 길만을 내어줄 뿐, 빛과 그늘을 한 덩어리로 품는다. 
어둡고 모든 것이 뒤섞인 듯이 보이는 이 곶자왈이라는 숲에는 애초에 인간을 위한 자리가 없다. 모든 것이 ‘인간이 아닌 존재’만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해 온 까닭이다. 곶자왈은 다람쥐와 노루, 그리고 날짐승의 공간이자, 숲속의 모든 식물을 위한 공간이다. 인간은 애초에 없는 공간인 것이다. 이 미지의 공간에서 인간이 ‘인간 소외와 낯섦 그리고 불안한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홍일화, 임시풍경 Ephemera landscape 1129. oil on canvas. 73x100cm. 2019



III. 공생의 자연   
태초의 신화 세계로부터 인간과 함께했던 ‘숲’은 이제 인간과 별리된 채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정확히 말하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이별은 ‘숲’이 자발적으로 행한 고립화가 아니라 인간이 현대 문명을 통해 숲을 대상화시키면서 도달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편의와 안락’을 지향하는 ‘인간의 문명학’이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우뚝 세우지만, 결국 인간 주체가 속했던 옛 고향인 자연과의 영원한 결별, 이혼의 체계를 공고히 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욕망이 야기한 문명학’이 결국 자연을 정복하고 구속하면서부터 자연에게 결별을 통보하고 이혼에 이르게 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 결별의 시대에 인간과 자연은 어떻게 공생을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이 대상화시켰던 ‘자연을 주체가 되게 만드는 역전의 방식’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즉 자연을 생태계의 주인공으로 초대하여 ‘인간과의 공생’을 부단히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생이란 생물학적 용어로, 한쪽만 이득을 얻고 다른 한쪽은 이득도 손해도 없는 ‘편리공생(commensalism)’이기보다 양쪽 모두 이익을 얻는 ‘상리공생(mutualism)’을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점은 퐁티(M. Merleau-Ponty)식으로 말해 인간과 자연이 ‘주체와 대상 사이의 구분이 없는 상호 작용의 존재’임을 일깨운다. 
작가 홍일화의 작품에서 이러한 공생의 주제 의식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발현되는가? 먼저는 그가 맞닥뜨린 곶자왈의 혼성의 숲 자체가 이러한 공생의 주제 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할 것이다. 풀, 꽃, 나무, 곤충, 동물, 암석이 마치 한 덩어리처럼 휘감고 있는 야생의 숲은 대표적인 특징이다. 게다가 숲의 풍경을 담은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등장하지 않지만, 수평선 상단의 ‘동식물, 강, 호수, 땅’과 같은 ‘현실 속 자연’과 더불어 수평선 하단의 ‘비현실 속 상상 자연’이 쌍을 이루면서 인간의 등장을 암시한다. 즉 상상의 주체인 인간을 화면(畫面) 밖 공간에 위치시킴으로써 화면 안 공간과 상호 작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현상(화면 밖 인간 주체의 등장)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화면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정체불명의 모호한 형상과 함께 ‘핑크’라는 인공의 색과 연동된다는 것이다. 어두운색을 배경으로 한 채 작품 중앙이나 주변에 위치한 핑크의 ‘사물 아닌 사물’은 인간 주체의 상상력과 연계되면서 고루하고 관성적인 인식으로부터 탈주를 감행한다. ‘인간 주체는 화면 속에 구체적인 어떤 형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화면 속 핑크는 인간의 정체성을 어렵지 않게 암시한다. 
생각해 보자. 우리말로 분홍(粉紅)인 핑크는 ‘엷고 부드러운 빨강’을 지칭한다. 즉 하얀색의 혼성을 통해 무채색이 된 엷은 빨강이다. 그런 점에서 핑크는 ‘빨강과 하양 사이의 교집합’인 셈이다. 핑크는 자연에서 더러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색은 아니다. 한마디로 자연스럽지 않은 인공의 색이자 인간이 만든 색이며 ‘인간의 색’이라 할 것이다. 그동안 핑크에는 사회학의 관점에서 만연된 ‘여성적 색’이라는 관습적 기호가 작동해 왔다. 작가 홍일화는 “소년을 위한 파랑, 소녀를 위한 분홍”이라는 글로 이러한 색에 담겨진 우리의 고정 관념과 관성적 인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더한다. 즉 그는 핑크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권력과 관련되었고, 18세기까지는 남자와 관련되었으며 19세기에 비로소 작명된 이름임을 설파한다. 오늘날 여성의 색으로 간주되는 핑크가 지닌 개념의 변천사에는 이러한 사회학적 코드가 진하게 배어있다. 
인물 형상을 다룬 ‘스키마 연작’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던 인공 색 핑크는 홍일화의 최근 풍경화 속에 새롭게 자리 잡은 채, 오늘도 인간과 자연의 공생의 의미를 되새긴다. 화면 속에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존재를 추상적이고 모호한 형상과 더불어 생생한 핑크의 인공 색으로 탐색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 형상으로부터 숲을 탐구하는 그의 최근작은 미지와 공포의 숲으로부터 공생의 자연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대면하고 있는 다양한 테마, 즉 욕망, 소비, 패션, 사회, 역사와 같은 주제 의식은 이제 숲으로 대별되는 자연으로 이월하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의 작업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단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중심으로 간주되던 주제의식으로부터 상대화되고 다원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홍일화, 임시풍경0207. 캔버스에 유채. 116x73cm. 2019




IV. 에필로그 
작가 홍일화의 작품에 대한 필자의 거친 해석과 비평을 보충할 참고 자료들은 대개 인간이 대면하고 있는 자연과의 공생의 존재론과 공생의 생태학에 관한 이론들이다. 
먼저는 자연을 바라보는 대상으로 간주하기보다 인간과 대면한 새로운 주체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유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가 인용하는,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라는 세잔의 언급은 주요하다. 마치 인간 주체와 자연 대상의 역전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이러한 언급은 실상 우리에게 주체와 객체라는 것이 애초부터 상호 교환되는 역동적 관계임을 알려 준다. 메를로퐁티 역시 “하나의 신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신체는 일차적으로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일부이다.”라는 언급을 통해서 주체와 객체가 혹은 인간과 자연이 상호적 작용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한편 자연에 관한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존재론에 관한 이론들이다. 퐁티에 따르면, 가시성의 세계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가시성이 하나의 특정한 부재로 현존하게 하는 비가시성의 층을 가지고 있다.” 즉, 보이는 것이 야기한 부족분은 보이지 않는 것의 세계를 이해할 때, 가능해진다. 비가시성은 가시성이 배제시킨 잔여물이기보다 원초적인 것이다. 퐁티에게서 비가시적인 것의 본질은 ‘깊이(profondeur)’로 언급된다. ‘가장 안쪽’, ‘깊숙한 곳’인 이 ‘깊이’는 “사물들이 순수하게 머물 수 있는, 즉 사물들이 사물들로 머물 수 있는 수단이다. 깊이가 없다면 하나의 세계 혹은 존재는 없을 것”이다. 퐁티에 따르면, 주체가 대상의 ‘깊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야 하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포기해야 하며, 자신을 동시에 도처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논의대로 말하면,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 주체의 관점 역시 이러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피상적인 자연의 외관에 대한 관성적 인식을 탈주하고 자연의 외면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새로운 눈’으로 자연을 보려는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라 하겠다. 
또 하나의 사유는 자연의 생태학에 관한 것이다. 생태학자 캐롤린 머천트(C. Merchant)가 밝히고 있듯이 오늘날의 자연에 관한 연구는 ‘심층생태학(Deep ecology)과 정신생태학(Spiritual ecology)에서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심층생태학과 정신생태학이 자연과 환경을 궤멸시킨 주범으로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주의로 규정하면서 그것을 반대하거나 탈주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환경의 입장에 서서 ‘훼손된 자연의 복구’ 자체에 집중하면서 ‘가역적 방향성’에 집중해 왔다면, 사회생태학은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주의를 균형감 있게 취함으로써 오늘날 복잡다기한 사회에서의 ‘근원적인 생태로의 회복’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성찰하면서 ‘비가역적 방향성’을 견지하는 생태학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요청되는 생태학은 자연에 대한 이러한 비가역적 방향성에 대한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생태학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 작용적 만남과 미래의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을 화두로 삼는다. 
최근 인간에 대한 탐구로부터 자연에 대한 성찰로 확장하고 있는 작가 홍일화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있어 참조할 논의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예술 내부의 담론으로 들어와 오늘날 재현 회화가 지닌 딜레마와 그것의 극복에 관한 매체 미학적 사유 또한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홍일화의 작품을 이해하는 관객에 있어서나, 이러한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작가의 입장에서도 검토할 내용일 것이다. 회화적 실천의 배경에는 튼튼한 이론적 무장 또한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그의 작업이 회화적 실천과 이론이 병행해 나가는 탄탄한 길을 닦아나가길 기대한다. 

출전/
김성호, 「미지와 공포의 ‘숲’으로부터 공생의 ‘자연’으로」, 『홍일화』, 카탈로그, 2020
(홍일화展-숲 , 2020. 07. 18~08. 07, 갤러리 리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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