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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천광엽 / 무의식이 현현되는 내적 추상과 정중동의 미학

김성호

무의식이 현현되는 내적 추상과 정중동의 미학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I. 21세기의 추상, 추상성, 추상 회화   
‘해 아래 새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21세기 현대 미술’의 장에서 고루한 20세기의 산물로 간주해 온 추상 회화에 여전히 천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서구에서 그린버그(C. Greenberg)가 예술을 매체의 특성으로 결정되는 변별의 기준을 만들고, 이것을 준수하는 추상표현주의 경향의 미술을 '비대중적 아방가르드(non-popular avant-garde)' 또는 ‘좋은 미술’로 지칭했던 1950년대만 하더라도, 추상 미술은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단토(A. Danto)가 워홀(A. Warhol)의 1964년 개인전을 기점으로 예술 종말을 선언한 1980년대 이후의 다원주의 미술의 시대에 추상 미술은 일견 서구에서도 동력을 잃은 듯이 보인다. 
아시아의 현대 미술이 이러한 오늘을 예견했던 것일까? 1960년대 일본의 모노파(物派)나 1970년대 한국의 단색화 전통의 추상미술은 서구 모더니즘의 추상 형식을 물려받으면서도 내용은 전혀 다른 동양 전통의 미감이나 정신성 탐구에 골몰하면서 새로운 추상을 지향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추상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중문화와 키치의 영향으로, 탈(脫) 장르, 탈 엘리트 미술, 탈 이데올로기의 미술을 표방하면서, 다원주의 추상의 시대를 전개해 오고 있다. 이전의 ‘전위미술 = 추상미술 = 모더니즘 = 실험미술이라는 등식’은 오늘날 거부된다. 형식과 내용도 제각각인 이른바 ‘다원주의 추상’의 시대에서 많은 작가는 ‘새로운 장르의 미술’을 찾는 집단적 실험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미시적 세계에 천착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천광엽을 위시한 ‘포스트 단색화’ 작가들은 한편으로는 1970년대 단색화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을 지속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적 추상 운동과는 달리 지극히 개별적인 추상을 실천하겠다는 ‘결별’의 의지를 실천하고 있다고 평할 수 있겠다. 천광엽은 다원주의 미술이 점유하는 오늘날 새롭게 요청되는 추상성과 추상 회화를 고민한다. 서구 전통의 추상 양식과 한국 전통의 추상 정신을 접목하는 일련의 1세대 단색화 작가들과 달리, 그는 1990년대 이래 오랜 세월 동안 새로운 추상 회화에 관한 독자적 실험을 거듭해 오고 있다. 
이 글은 천광엽의 추상적 조형 실험들을 ‘형상/비형상, 변주/파동, 의식/무의식, 가시성/비가시성’의 키워드와 연동되는 미학으로 살펴본다. 또한 그의 작품에 내재한 추상성과 관련한 무의식 담론과 심리학적 미의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이 글의 주요한 목표가 될 것이다.  

installation view . annual curatorial exhibition of
'Korea tomorrow' Sungkok Art Museum
2016 .11 .19 - 12. 18 . Seoul . Korea



II. 점들의 군집 - 비형상으로서의 근원적 모나드와 형상으로서의 모듈
1세대 단색화 작가들이나 포스트 단색화의 작가들의 작업과 비교할 때, 그의 독창적인 면모는 단연코, ‘점(點)들’로부터 기인한다. 즉 ‘점’의 복수적 군집이 이루는 변주에 의해서 그의 독특한 모노크롬 회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점’은 2차원 평면 속에 자리한 가장 작은 조형 요소이다. 조형의 가장 기초적인 출발점이자 근원적인 모나드(monad)인 셈이다. 라이프니츠(Leibniz)에게서 모나드란 “넓이나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실체”를 지칭하는 단자(單子)이자 단원(單元)인 만큼, 적어도 천광엽의 조형 세계에서 모나드는 ‘점’이다. 
피상적으로 그것은 평면의 좌표 위에서 자신의 위치만을 표시하는 가장 하등의 존재이다. 움직이지 못하니 방향을 갖고 있지 못하고 좌표에서 위치만 지니고 있으니 면적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좌표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생을 연장할 뿐 어디로든 떠나지 못한다. 또 다른 점을 만나 그 사이에 운동하는 흔적인 1차원 존재인 선을 만들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나 혼자로 남아 있는 외로운 정주자(定住者)로서의 존재이다. 그것은 2차원의 면적을 만들지 못하니 태생적으로 다른 무엇을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조차 갖고 있지 못한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그러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점은 무엇보다 선 - 면 - 입체로 확장적인 장(場)을 여는 근원적 정수(精髓)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물리적인 관점에서, 천광엽의 점들은 ‘0차원 점’이기보다 자신의 몸집을 키운 ‘2차원의 작은 원형(圓形)’에 다름 아닐 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점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것은 ‘점’이라 호명을 받으면서도 2차원에서의 확장과 변주를 위해 이미 꿈틀대고 있는 생명체의 존재가 된다. 마치 우리가 관습적으로 모나드를 “작고 구조가 단순한 (원생)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용하는 것처럼, 그의 작품의 모나드인 ‘점’ 혹은 ‘작은 원’은 비유적으로 말해서 출발부터 생명을 가득 담은 원생동물인 셈이다. 
게다가 천광엽의 점은 단독자가 아닌 군집으로서 존재한다. ‘개별체로서의 점’은 각자의 위치를 지니고 움직이지 않는 정주의 존재이지만, 군집을 이룸으로써 우리의 망막에 부단하게 이주와 횡단을 하고 있는 존재로 각인된다. 이른바 옵아트의 시각적 결과물처럼 그의 점들은 ‘실제적 움직임(mouvement réel)을 행하지는 않지만, 관자의 변하는 시점에 따라 비로소 움직이는 ‘잠재적 운동(mouvement virtuel)’으로서 자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점들의 변화를 우리는 ‘모나드’로부터 ‘모듈(module)’로의 위상 변화와 더불어 ‘비형상으로부터 형상으로의 변화’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건축, 기계, 컴퓨터 용어로 사용되어 온 이 모듈이란 ‘전체로부터 기능별로 분할한 논리적인 일부분’이거나 ‘부품의 각 부분’을 지칭한다. 그것은 부분, 전체 등 군집의 양상으로 형상을 드러낸다. 즉 천광엽의 작품 속 점들의 변화란 ‘단독자로서의 점’(단수/비형상의 모나드)으로부터 ‘군집으로서의 점들’(복수/형상의 모듈)로 확장하는 것으로 넉넉히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91cm x 73cm oil on canvas



III. 점의 변주와 파동 - 무형상 혹은 비형상의 모노크롬 
유념할 것은, 그의 점 혹은 작은 원이 비형상의 모나드로부터 집단의 점들이라는 형상의 모듈을 거쳐 삼차원의 구체적 형상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음에도 역설적으로 다른 목적지를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형상(無形像) 혹은 비형상(非形像)을 추동하는 모노크롬이라는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즉 형상이 없는 추상회화로서 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천광엽의 회화는 피상적으로 ‘회화의 이차원이라는 매체의 순수성을 고수하면서, 삼차원화를 시도하는 재현과 같은 모든 조형 언어를 철저히 배제하는 서구 모더니즘의 추상미술’과 닮았다. 아울러 1970년대 국내 미술계에 유행처럼 번졌던 단색화의 영향도 일정 부분 엿보인다. 
그런데도 서구의 모더니즘과 차별화를 선언하며, 1970년대 국내 단색화가 천착했던 무작위, 범자연주의, 정신성, 비물질성과 같은 맥락이 그의 작업에서 쉽사리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는 지독한 작위, 탈자연의 인위, 치밀한 계획성, 촉각적 물질성, 지난한 몸의 노동과 같은 요소가 도드라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그의 작업은 외견상 한국의 단색화보다 서구의 모노크롬과 더 가까워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서구의 모더니즘 전통은 물론이고 한국의 단색화적 양상과도 차별화되는 독자적 노선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점으로부터 점들로, 단독자로부터 군집으로, 모나드로부터 모듈로, 그리고 무형상 혹은 비형상의 추상회화로서 변모를 거듭하는 것과 관계한다. 이러한 변화를 견인하는 것은 무엇보다 ‘점의 변주’가 만드는 파동(波動)이다. 
천광엽의 모노크롬에서 점의 변주란 파동(波動)의 다른 이름이다. 파동이란 “공간의 한 점에 생긴 물리적인 상태의 변화가 차차 어떤 속도로 둘레에 퍼져 가는 현상”을 지칭한다. 여기서 물리적 상태의 변화를 간단히 말하면 어떠한 진동이다. 그러니 파동에 관한 정의를 달리 말하면, “공간이나 물질의 한 부분에서 생긴 주기적인 진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위로 멀리 퍼져나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희거나 푸른 바탕 위에 올라선 파동을 내보내고 있는 무수한 파원(波源)들과, 무수한 점의 변주들을 보자. 흥미롭게도 그의 작품에 개입하는 점의 크기는 모두 같은 크기의 점들이다. 점이라는 최소의 조건을 만들고 그것들로부터 변주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점 그리고 점과 점 사이의 간격, 그리고 점들의 밀집도에 따라 그의 작품에는 일정한 패턴이 만들어지면서 저마다 다른 느낌의 모노크롬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어떤 작품은 바다처럼, 어떤 작품은 하늘처럼 어떤 작품은 풀잎처럼 푸르디푸른 균질의 풍경들을, 또 어떤 작품은 눈이 덮인 들판과 같은, 흐르는 강물과 같은, 또는 비 오는 풍경과 같은 미묘하게 변주하는 오프화이트(off white)의 풍경들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한편 천광엽의 모노크롬은 요철 효과가 겹쳐져 만들어지는 촉각적인 추상을 지향한다. 작가가 개입하여 만드는 일정한 ‘결’에 따라 그의 모노크롬이 다양한 질감과 표정으로 변주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격하게 일렁이는 파동의 모노크롬으로, 때로는 반짝이는 결정체들의 빛 무늬 반사광으로 가득한 모노크롬으로, 때로는 잔잔한 숨결의 모노크롬으로 변주된다. 우리가 ‘결’을 “나무, 돌, 살갗 따위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라고 정의할 때, 그의 모노크롬은 표정이 다른 결들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이내 알 수 있다. 어떤 작품은 청량한 반면에, 어떤 작품은 침잠하거나 우울하다. 그의 작품에는 이처럼 다양한 표정의 결들로 가득하다.  
결이라는 평정 상태는 사실 대립적 요소들이 끊임없이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운동성의 존재이다. 마치 ‘물결’이 골과 마루가 만들어 내는 무수한 파동의 형식으로 운동하고, 우리의 ‘마음결’이 희로애락의 상반된 감정들이 끊임없이 생채기 내며 싸우는 운동의 과정에서 평정의 상태를 찾는 것처럼 말이다. 천광엽의 무형상 혹은 비형상의 모노크롬에는 이처럼 결이라는 평정 상태와 더불어 ‘정중동(靜中動)’이라는 운동성의 미학으로 가득 차 있다. 


off white n' omni blue



IV. 두 추상 - 옴니 시리즈와 오프화이트 시리즈 
정중동의 운동성으로 가득한 천광엽의 추상 회화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계열의 작품들에 관한 것이다. 하나는 푸른 색상 계열의 ‘옴니(Omni)’ 시리즈 작업이고, 또 하나는 오프화이트(off white) 색상 계열의 작업이 그것이다. 전자가 집적된 점들을, 열린 공간으로 운동해 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그것들을 닫힌 공간으로 은폐해 가는 운동이다. 즉 전자가 열린 공간으로의 확산을 도모하는 운동이라면, 후자는 닫힌 공간으로의 환원을 꾀하는 운동이다. 어떻게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가?  
푸른 색상의 옴니 시리즈는 깊은 심연의 색으로 잠입한다. 여기서 옴니는 라틴어 접두사로 ‘모든, 전체의(every, all)’라는 뜻을 갖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옴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는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그의 작품에서 ‘점’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조형 예술 요소가 곧 ‘전부’라는 의미를 전제한다.  
옴니 시리즈에서 그는 푸른 색상으로 잠입하는 열린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서 ‘점’이라는 기초 요소와 ‘점과 점 사이’라는 관계의 조건, ‘점들의 군집’이라는 전체상을 끊임없이 자신의 작업을 이끄는 대화의 주체들로 초대한다. 때로는 검정에 가까운 바탕색 위에서 하얀색에 가까운 점들이 저마다 물감의 속살을 보여 주기도 하면서 미묘한 대화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바탕색과 점들의 색은 때에 따라 극명하게 대비되기도 하고 때로는 같은 유형의 색들의 옷으로 갈아입고 관객에 선보일 나들이 준비를 마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푸른 색상 계열의 옴니 시리즈 작업은 풍요로운 색의 깊이 속에 침잠한 채 다채로운 변주를 펼쳐내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에 오프화이트 색상 계열의 작품들은 ‘점들의 군집’과 바탕면 사이의 색상의 간극이 크게 차이를 갖지 ‘못한/않은’ 장(場)에서 미세한 변주를 시도하는 작업이다. 오프화이트란 ‘어떤 색에 흰색을 혼합하여 만든 유사(類似) 백색 또는 의사(擬似) 백색’이다. 흰색의 혼합 비율에 따라 거의 백색으로 보일 만큼 밝은색이 되기는 하지만 흰색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색조를 띄기도 하는 이러한 색을 총칭해서 우리는 오프화이트라 한다. 이러한 색상이 주조를 이룬 그의 새로운 작업은 중성(neutralité) 혹은 중립성의 상태에서 색상의 변주를 시도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된다. 예를 들어 똑같은 복장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쌍둥이 사이에서 양자가 다른 주체임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어려움을 이 시리즈 작업은 처음부터 버겁게 끌어안는다. 그것은 창작의 범주를 스스로 한계를 짓게 만든 상태에서 벌이는 극한의 실험마저 전제한다.   
그러나 중성의 전략은 스스로 한계를 구획하는 까닭에 외려 결과론적으로 미세하지만 명징한 차이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지점은 그의 점들이 20세기 신인상주의가 색채 병치를 통해 도모했던 시각적 혼합이라는 과학적 방식의 효과를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동시대 추상으로 전환하면서 도달한 지점이다. 작품에 가까운 거리를 가지면서 확인하게 되는 이러한 효과는 실제 원거리에서는 은폐되어 있다. 물론 옴니 시리즈도 근거리와 원거리에서의 관자의 지각이 갖게 되는 결과는 다르다.  
오프화이트 계열의 작품에서는 바탕색과 점들 사이의 색상, 명도, 채도의 간극이 비교적 좁은 까닭에 옴니 시리즈의 풍요로운 심연의 깊이가 만드는 열린 공간과는 확연히 다르게, 닫힌 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양자의 시리즈 작업은 천광엽의 전체 작품 세계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것은 점들의 파동이 이루는 그의 작업에서의 두 방향성이다. 앞으로 등장할 또 다른 작업과 맞물려 하나와 또 다른 하나가 만나 이루는 하모니의 세계인 것이다.  

off white series 117cm x 91cm


V. 내적 추상 - 무의식으로부터의 현현  
파동이 이루는 하모니의 세계! 옴니와 오프화이트라는 두 시리즈를 포함하여 천광엽의 지금까지의 모든 추상 회화는 ‘점들의 군집과 변주’, ‘파동과 정중동의 미학’이 함께 어우러진 산물이다. 정중동의 운동성은 그의 작품 속 ‘점들의 군집’이 언제나 ‘잠재적 운동체, 즉 '잠세태(virtualité)’임을 입증한다. 그것은 실제로 물리적인 움직임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지속적인 운동성의 개념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의 작업은 무의식의 심연에서 언어화되지 않은 기호들이 부유하는 운동이다. 그곳에는 군집과 산포의 유형으로 ‘이합집산’을 도모하는 점들의 부산한 기호적 움직임이 자리한다. 또한 그곳에는 자신의 몸을 유화 물감의 침투 속에 내어 주고 캔버스 표면에 납작하게 올라선 점들의 웅얼거림이 자리한다. 그 웅얼거림은 자음과 모음으로 분절되지 않는 유아의 비언어 또는 명료한 언어적 메시지로 분절되지 않는 예지자(叡智者)의 예언과 같은 비언어들로 가득하다. 프로이트(S. Freud)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무의식의 심층 속에서 펼쳐지는 ‘잠재된 기호’(언어화되지 않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체)의 운동이다. 프로이트에게 의식의 세계란 곧 언어의 세계인 반면에, 무의식의 세계는 기호의 세계인 까닭이다. 
그렇다. 천광엽의 작업에서 부유하는 기호들의 운동은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현현되는 것이다. 점들을 겹치는 무작위의 과정은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의 자동기술법처럼 무의식 속에서 펼쳐진다. 프로이트가 “의식의 세계는 언어 구성체(formation du mot)이고 무의식의 세계는 사물구성체(formation de l'objet)”라고 보고 있듯이, 천광엽의 ‘군집의 점’이라는 기호는 무의식의 세계를 잠입하는 사물구성체가 된다. 그것은 1차원의 점과 2차원의 원형 그리고 무형상/비형상의 모노크롬 사이를 오가는 진폭을 횡단한다. 천광엽의 점들은 기표와 기의가 완벽히 결합해 의식의 지층에서 활동하는 언어가 되기를 지속적으로 미루어 두고 무의식에 표층에 잠재하는 ‘기표와 기의의 덩어리 결합체’ 혹은 ‘기의를 탈각시킨 기표’로서 부유한다. 즉 그의 ‘군집의 점’은 의식 속에 구조화된 ‘언어 (구성체)’가 아닌 무의식 속에 부유하는 ‘사물(구성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비언어의 군집 점’을 ‘비언어의 기호들’로 치환하고 ‘언어가 되는 변화의 지점’에 이르는 시간을 무한히 연장하는 것이라 하겠다. 때로 그것은 감탄사와 같은 의성어이거나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소음과 같은 비분절의 언어로 드러난다. 
천광엽의 추상 회화는 그런 면에서 ‘기호의 감각적 현현(顯現)’이라 할 만하다. ‘현현’이란 ‘무엇인가가 명백하게 나타남’을 지칭하지만, ‘감각적 현현’이란 다분히 ‘명백한 비언어적 표상’의 드러남과 관계한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 관자의 지각(perception)과 관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이내 관자의 인식(recognition) 속에 강렬한 메시지를 남긴다. 물론 그것은 관자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이에게 그것은 소망과 명상의 기도의 메시지로, 어떤 이에게 그것은 서정적인 시적 내러티브로 각인된다. 작가는 ‘언어가 되기 이전의 비언어의 마술’을 선보이고 있을 따름이지만, 관객이 이 ‘기호 덩어리’ 혹은 ‘기의를 탈각시킨 기표’로부터 자연스럽게 무수한 ‘언어적 번안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추상 회화는 ‘내적으로 발화하는 추상’, 달리 말해 ‘내적 추상’이라 부름직하다. 추상이 원칙적으로 ‘대상이 없는 미술’을 전제하는 까닭에 대개 표현주의 추상의 ‘내적 충동’이나 기하학적 추상의 ‘내적 이상의 구현’에 집중하는 것이지만, 그의 추상 회화에 명명될 수 있는 ‘내적 추상’이란 양자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 된다. 특히 ‘군집의 점들’과 ‘무형상/비형상의 모노크롬’ 사이를 오가는 그의 회화가 원천적 지지대로 삼고 있는 무의식이라는 공간은 ‘의식을 향해 가는 무의식 공간’에 영원히 부유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내적 추상이라는 용어를 발화시키기에 족하다. 이것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언어처럼 구조화되지 못한 비언어의 ‘소리 이미지’자 의식 속 언어 표상에 도달하지 못한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사물 표상인 것이다. 
천광엽의 내적 추상은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말하면 무의식의 모습을 한 채, 무의식과 의식 사이를 매개하는 전(前)의식(preconscious)의 장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즉 ‘현재는 무의식 속 잠재적인 상태’인 ‘전의식’은 천광엽의 추상 회화가 위치한 회화의 장이라 하겠다. 또한 이것을 라캉(J. Lacan)식으로 말하면, 상상계 안에 있으면서 상상계와 상징계를 매개하는 거울 단계(mirror stage)의 장과도 비교될 수 있겠다. 이 장은 이마고(imago)가 형성되는 시기로 의식과 무의식, 주체와 대상, 언어와 비언어가 미분화된 상태를 지속한다. 양자 모두 외적 세계, 즉 이성적인 현실계에 이르지 못한(않는) ‘언어 이전(pre-linguistic)’의 내적 영역이라는 점에서 천광엽의 내적 추상과 맞물린다. 
한편, ‘무의식의 잠재적 상태’로 ‘정중동의 운동성’을 담고 있는 천광엽의 ‘내적 추상’은 보이는 것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일견 패턴처럼 규칙적으로 보이는 ‘점의 군집’은 실상 비규칙적이다. 필연적 질서의 배반자인 이것들은 작가에 의해 갈리고 닦이고 덧칠해지는 후속 작업을 통해서 우연의 효과를 드러낸다. 필연을 전제로 한 우연의 효과! 필연이 숨겨지고 우연이 드러나는 셈이다. 의도가 은폐되고 비의도가 생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본 옴니와 오프화이트 시리즈에서 작품에 가까운 거리를 가지면서 확인하게 되는 요철의 효과는 실제 원거리에서는 모노크롬의 이미지 안에 은폐된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자,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교차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러한 효과는 의식의 연쇄로부터 이탈한 구멍, 간극, 단절, 실수와 같은 모습으로 무의식에 자리 잡은 ‘기억흔적(traces mnésiques)’과 닮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천광엽의 추상은 필연과 우연, 행위와 무위(無爲) 그리고 의도적 작위와 무작위(無作爲) 사이에서 부유하게 된다. 이것은 나아가 무의식 속 잠재적 사유들이 꿈틀대며 의식의 표층을 두들기는 자기 성찰과 같은 것으로 은유된다.





VI. 모노크롬 아닌 모노크롬 
천광엽은 2012년 평론가 윤진섭이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 전에서 ‘포스트 단색화’로 지칭되는 일군의 작가로 소개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정당하다. 그런데도 그의 작업은 포스트라는 접두어로 뭉뚱그려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그가 천착하고 있는 작품 세계가 일군의 포스트 단색화 작가들과는 명백하게 다른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점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조형 요소로부터 자신의 모노크롬 작업의 근저로 삼고 펼쳐내는 무한한 변주의 세계에서 찾아진다. 아울러 일군의 작가들과의 접점도 있기는 하지만, 무의식 속에서 견인하는 사물 구성체로서의 현시, 기호를 통한 잠재적 운동성의 추구, 기호의 감각적 현현, 우연과 필연의 효과,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기억 흔적, 내적 추상과 같은 키워드는 그의 독특한 추상 회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주요하다. 
천광엽은 점 하나에 전체를 담고자 파동의 흔적들을 만들고 ‘군집의 점’을 통해서 잠재적 운동성을 부여한다. 파동으로 하나와 전체를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원효와 의상대사가 실천하는 화엄(華嚴)의 기본 논리, 즉 ‘하나가 곧 전부요, 전부가 곧 하나’라는 사고와 닮아 있다. 즉 천광엽의 모노크롬은 화엄 사상을 축약한 다음과 같은 말, ‘하나 안에 전체, 전체 안에 하나’ 그리고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일중일절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과 ’일즉일절다즉일(一即一切多即一)’을 실천하려고 애쓴다. 아울러 ‘한 티끌 속에 온 세상이 다 들어있다’는 ‘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 역시 실천하고자 한다. 
어떤 차원에서는 이 파동이 다른 파동과 만나 일으키는 간섭 현상(干涉現象)까지도 기대한다. 간섭 현상을 “두 개 이상의 파동이 한 점에서 만날 때 중첩되어 진폭이 합해지거나 상쇄되는 현상”이라고 할 때, 이것은 분명코 파동이 만드는 흔적들로부터 근원한다. 그의 추상 회화는 서로의 몸을 주고받아 비로소 ‘하나의 전체’가 되는 ’모노크롬 아닌 모노크롬의 세계’가 된다. 가히 그것은 파동이 만드는 정중동의 미학으로 가득한, ‘무의식이 현현되는 내적 추상으로서의 모노크롬’이라 할 것이다. ●



출전/
김성호, 「무의식이 현현되는 내적 추상과 정중동의 미학」, 『천광엽 Omni Wave 2015-2018, Encounter Series』, 화집, 2020, pp. 156-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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