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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최원규 / 망각의 숲에서 떠올리는 숨에 대한 기억

김성호

망각의 숲에서 떠올리는 숨에 대한 기억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프롤로그 - 존재에 대한 망각으로부터  
우리는 종종 ‘보이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며 산다. 분명 ‘있는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있음이라는 존재’를 ‘잊고’ 사는 것이다. 세상 속에 충만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일까? 산소를 품은 공기는 물론이고 태양이라는 광원(光源)에서 나온 백색의 복사광(輻射光) 혹은 가시광선보다 짧은 파장으로 보이지 않는 자외선은 그러한 것들이다. 물체나 물체계가 지닌 운동 능력이라는 에너지는 또 어떠한가? 그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우리와 함께 있는 존재이다. 존재로 충만해서 오히려 그것을 잊고 산다는 것은 ‘존재 인식’의 아이러니다.  
숨을 쉰다는 행위 역시 다르지 않다. 숨이란 생물이 삶을 지속하는 필수적인 행위이지만, 너무 쉽게 그것을 지속하는 까닭에 우리는 종종 그 존재를 잊고 산다. 무엇보다 삶의 주체가 입과 코 그리고 허파를 통해서 들숨과 날숨을 지속하지만, 보이지 않는 공기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처럼 들숨, 날숨과 같은 ‘삶을 지속하려는 부단한 의지 행위’를 망각하고 사는 것이다. 
최원규의 작업에서 ‘숨’은 그러한 존재이다. 그에게 있어 ‘존재 인식’의 아이러니는, ‘숨’을 주제로 삼고 <숨-망각의 숲(Breath-Forest of oblivion> (2020. 6. 2~6. 16, 홍티아트센터)이라는 전시명으로 펼치는 이번 개인전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현실의 삶 속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망각’이 왜 빈번하게 일어나는지를 질문하고 있는 그의 이번 개인전은 현실적 삶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가득한 시선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 존재의 삶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 이어진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전시를 천천히 둘러보자. 
       

I. 숨 - 망각의 숲 2020 
홍티아트센터의 첫 번째 섹션의 전시장에 들어서니 거대한 ‘나무 아닌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작품 〈숨 - 망각의 숲 2020〉이 관객을 맞이한다. ‘나무 아닌 나무들’이라니? 그것들은 작가가 철제 파이프 위에 우레탄 폼(Urethane foam)으로 덮어 만든 ‘나무의 형상을 닮은 알 수 없는 기이한 생명체’다. 마치 타 버린 건축물의 기둥 같기도 하고, 폭설을 맞고 우뚝 서 있는 벌판의 나무들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그것을 “바닥을 뚫고 겹겹이 솟아오르는 숨을 형상으로 만든 설치 작업”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는 숨의 역동적인 물리적 현상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파이프 위에 우레탄 폼을 분사하고 양생하는 과정을 반복해서 수많은 미디엄 층을 덧입힌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 설치 구조물을 만들었다. ‘망각의 숲’이라는 제명처럼 기본 형상은 나무와 같은 식물로 표현된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은 군데군데 부풀어 오른 몸체로 인해서, 공기를 가득 품은 허파꽈리처럼 육질의 무엇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생명체를 만든 재료인 ‘우레탄 폼’은 본래 “건축 내부의 빈틈을 메우고 재료와 질료 사이를 튼튼하게 접합하기 위한 건축 내장재”로 쓰인다.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마감 과정에서 건축의 외장재로 덮이면서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레탄 폼은, 생명체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일련의 ‘생명 지속의 숨쉬기’를 행하면서도 그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 들숨, 날숨의 존재론적 위상과 닮았다고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레탄 폼은, 작가의 말대로, “각자의 삶의 방식으로 매일을 살아가며 사회의 저변을 생성하고 있지만, 드러나지 않고 잊히기 쉬운 수많은 삶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즉 ‘우레탄 폼 = 들숨, 날숨  = 주요한 존재이면서도 외면에 잘 드러나지 않는 존재 = 불특정한 모든 인간의 삶’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다.   
한편, 최원규는 이러한 입체 구조물의 외피에 쇳가루를 흩뿌려 올린다. 이 쇳가루는 근대 수리 조선의 1번지로 불리는 대평동(현재의 남항동) 내의 산업 근로자와 주민들을 그가 만나 리서치하는 과정에서 “산업 현장에 무수히 떨어져 있는 폐기물을 수합하고 정제하여 얻어진” 것이다. 즉 금속 가공 공장들의 제품 생산 과정에서 일차적인 변형을 거쳐 폐기되는 부산물들을 그가 수합하고 여러 차례의 선별 과정을 거쳐 추출한 순수한 쇳가루로 조각의 몸체 위에 도포한 것이다. 쇳가루를 입은 조각은 산업 근로자의 노동이라는 것이 심장 박동만큼이나 역동적인 삶의 근원으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 가치가 망각된 ‘노동의 삶’에 그가 가치를 다시 부여하려는 시도처럼 읽힌다. 
게다가 작가는 이러한 조각의 외피에 반짝이는 금, 은, 진주 펄을 함유한 페인트 스프레이 작업을 추가함으로써 노동의 가치에 더욱더 빛나는 의미를 부여하려고 시도한다. 노동적 삶이라는 가치를 다시 재조명하는 겹겹이 쌓인 우레탄 폼, 노동 현장에서 추출한 쇳가루, 그리고 펄을 함유한 페인트 스프레이를 통해서 망각의 숲으로부터 탈주하는 가치 재조명의 메시지가 극대화된 셈이다.  




II. 숨 - 1001000   
망각의 숲으로부터 탈주하고 노동의 삶 속에서 숨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최원규는, 전시의 두 번째 섹션에서, 작품을 만들었던 과정을 매일 기록으로 남긴 드로잉과 영상을 선보인다. 100일 동안의 작업 과정을 1000mm의 두루마리 종이와 10분(00:10:00) 분량의 영상으로 옮겼다는 의미에서 드로잉과 영상의 작품명을 〈숨 - 1001000〉으로 지었다.  
두 번 째 섹션의 입구에서부터 출구에 이르는 기다란 공간을 가로지르는 두루마리 종이는 천장까지 이어지게 설치되어 있다. 매우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구조로 만든 디스플레이용 테이블 위에 살짝 늘어지도록 설치한 두루마리 종이 위에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작품 〈숨 - 망각의 숲 2020〉의 설치에 관한 세부 계획이 그림과 텍스트로 설명되고 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작품들의 전시 공간과 더불어 전체 전시 공간을 입면도, 평면도, 조감도의 형식으로 미리 연출해 보는 상세한 계획도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그곳에는 전시 작품의 효율적인 크기의 비율을 예상해 보거나 아니면 관객의 눈높이에 맞는 설치 구조물의 이상적인 높이를 계획해 보는 방식을 포함해서 기계 부속물을 결합하여 제작하는 방식마저 도면과 함께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작품 제작을 위한 설계 도면이고 전시 공간 연출을 위한 계획도이지만, 또 어떤 면에서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설치 작품이 된다. 전시 리플렛에 소개된 글에서처럼, “작가에게 드로잉은 작업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 이상의 의미로 작가로서의 존재를 확인하고 지속시키기 위한 가장 근원적 창작 행위”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작품 실현을 위한 에스키스’임과 동시에 ‘드로잉을 표방한 완성 작품’이 된다.   
한편 최원규가 홍티아트센터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진행했던 작업 과정을 기록한 영상은 어떤 면에서 아카이브 영상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영상 작품이 된다. 특히 그는 재료를 선별하고 완성된 예술적 결과물에 이르기까지의 노동도 작업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고 기록으로 남기고 작품화에 이르도록 의도했다. 과정은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결과에 이르기까지 투여하는 창작의 노동이란 결국 우리가 살아있다는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가 100일 동안의 작업 과정을 남긴 드로잉과 영상 기록물은 작가 최원규가 매일 매일 들숨과 날숨을 교차하면서 예술적 시간을 보냈던 호흡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 우리가 종종 호흡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숨을 내쉬며 사는 것처럼 말이다.  





II. 숨 - 삶 풍경   
평소에 공동 작업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세 번째 섹션인 전시장에는 하나의 움직이는 설치물과 더불어 세 개의 비디오 영상이 프로젝션의 방식으로 선보이고 있다. 이 작품들은 앞서 살펴본 조각적 설치 작품인 〈숨 - 망각의 숲 2020〉이나 두루마리 종이에 남긴 드로잉과 비디오 영상으로 아카이브와 작품 사이를 오가는 〈숨 - 1001000〉이 드러냈던 삶과 호흡의 흔적을 더욱 더 극적으로 드러낸다. 좌대 위에 둥그런 모양으로 놓여 있는 쇳가루와 천장에 매달린 채 그 위에서 운동하는 마그넷(magnet)의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설치 구조물(fact)과 더불어 그것을 담은 영상과 그 위에 흐르는 자막 속 스토리(fiction)를 통해서 삶의 풍경(faction)을 극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아카이브는 팩트를 지향하지만 언제나 창작자의 해석에 따른 편집과 가공이라는 픽션이 개입하는 팩션이 된다. 우리는 이러한 팩션의 창작 안에서 팩트를 반추한다. 그가 만드는 팩션의 창작이란 어떠한 것인가?   
먼저 그는 대평동 조선 산업 단지에서 얻었던 폐기되는 부산물로부터 여러 차례의 선별 과정을 통해서 취득했던 쇳가루를 이 설치 작품 〈숨 - 삶 풍경〉에도 사용한다. 대평동의 물리적 역사를 기억하는 폐기물로부터 가공되기 이전의 물성으로 되돌아간 쇳가루는 작품 〈숨 - 삶 풍경〉의 내러티브라는 팩션을 여는 원초적 팩트 질료다. 좌대 위에 놓인 쇳가루는 천장에 달린 채 회전 운동을 하는 마그넷에 의해서 끌려다닌다. 마그넷에 붙은 채 끌려다니는 쇳가루는 자력의 한계에 의해 미처 마그넷에 견인되지 못한 쇳가루를 괴롭힌다. 마그넷의 강력한 자력에 흡착되어 마그넷의 노예가 된 채, 동료인 쇳가루를 짓이기면서 폭압적이고도 허망한 회전 운동을 지속한다. 그건 분명 자력과 쇳가루가 만나 형성하는 실제의 ‘물리적 현상’일 따름이지만, 우리는 이 설치구조물 앞에서 불안한 실제의 ‘삶의 풍경’을 떠올린다. 마그넷과 쇳가루의 만남(팩트)이 삶의 풍경(팩트)을 강력하게 은유하고 상징(픽션)하는 까닭이다. 
이 설치 구조물의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친 비디오 프로젝션 영상은 마그넷과 쇳가루의 만남(팩트)이 야기하는 3가지의 이야기(팩션)로 구성된다. 
설치물 바로 뒤편의 VIDEO A는 실제의 설치 구조물이 선보이는 회전 운동과는 달리 마그넷이 좌우로 움직이는 수평의 진자(振子) 운동을 선보인다. 작품명은 〈숨 - 삶 풍경 : 그는 여전히 불안한 삶을 산다〉로 정해졌다. 천천히 움직이는 수평의 진자 운동을 담은 비디오 영상 옆에 흘러가는 자막은 “그는 죽기로 작정했다”로 시작한다. 이상주의자였음에 분명한 ‘그’가 자각한 ‘현실’이 고통스러웠고 그가 스스로 자처해 고립된 삶의 외로움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비루한 ‘현실 속 삶’이란 불안한 삶이다. 마치 마그넷이 정처 없이 좌우 진자 운동을 지속하면서 정처 없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어디를 오가는 것처럼 말이다. 
좌측의 VIDEO B는 좌대 위 쇳가루가 놓인 원 모양의 가장자리를 따라 천장에 매달린 마그넷이 지속하는 회전 운동을 영상으로 선보인다. 원 주변을 돌아가는 마그넷의 영상 밑으로 흐르는 자막은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6:30에 눈을 뜬다”로 시작한다. 특별한 의지 없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삶을 관성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부조리한 초상을 〈숨 - 삶 풍경 : 그는 살아간다〉라는 제목의 작품에 담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우측의 마지막 VIDEO C는 또 어떠한가? 관객은 이 작품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진다. 최원규가 내러티브의 주인공으로 ‘나의 할머니’라는 주체를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상 앞에서 설치된 키네틱 아트처럼 천장에 달린 마그넷이 좌대 위의 쇳가루를 끌고 회전 운동을 하고 있는 영상은 “그녀는 살고자 했다”로 내러티브로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생의 의지를 견지한 한 노년의 인간 주체가 생로병사의 질곡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쓸쓸한 파국을 드러낸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나 생을 마감해야만 하는 인간사는 잔혹하다.     




에필로그 - 망각의 숲으로부터의 탈주  
삶은 분명 실제로 우리 앞에서 펼쳐지는 팩트이나 그것을 담은 내러티브는 언제나 팩션이다. 
최원규의 키네틱 작품과 영상에서 삶을 사는 주체로 등장하는 마그넷과 쇳가루 그리고 노동적 삶에 대한 상징처럼 등장한 그의 망각의 숲이 품은 우레탄 폼과 쇳가루는 작가와 주변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리는 원초적 질료다. 마그넷과 쇳가루의 만남과 그것이 만드는 움직임 그리고 우레탄 폼과 쇳가루가 만드는 시각적 일루전은 모두 인간 주체의 다양한 삶의 양태를 ‘숨’이라는 주제 속에서 반추하게 만든다.  
같은 공기를 같은 들숨과 날숨의 운동으로 호흡하며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삶의 양상(팩트)은 너무나 다양하다. 무기력하게 쳇바퀴처럼 살거나, 생의 궤도를 이탈하려거나 아니면 생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삶을 담은 내러티브(팩션) 또한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두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한 차원에서 어떠한 숨을 쉬고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우리가 현재 내쉬고 있는 ‘숨’의 존재와 가치를 자각하는 일은 매우 주요하다. 그런 면에서 서서히 돌아가는 종이 위에 붓을 들어 ‘단순한 상하 동작’으로 흔적을 남기는 최원규의 또 다른 작품인 〈숨 - 삶 풍경〉이라는 제목의 ‘드로잉 B’는 의미심장하다. 최소한의 이런 노동 역시 숨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그것의 유효한 작용을 은유하고 지속적으로 성찰하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자. 최원규의 작업 앞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다시 망각의 숲에 거주하게 될지라도, 그가 작품을 통해서 선보였고 또 우리가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숨에 대한 기억을 부여잡고, 그곳으로부터 탈주를 지속하는 것이 아닐까? ●

출전 /
김성호, 「망각의 숲에서 떠올리는 숨에 대한 기억」, 비평 매칭, 홍티아트센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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