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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박기진 / 진동 - 땅의 기억

김성호

진동 - 땅의 기억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 하늘, 땅, 사람 
하늘, 땅, 사람! 이것은 한 사람이 이 지구상에 사는 동안 맺는 ‘관계의 모든 것’이다. 흔히 동양철학에서 천지인(天地人)을 ‘만물을 구성하는 삼재(三才), 혹은 삼원(三元)’으로 지칭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의 관계에 골몰하면서 사는 동안 하늘과 땅의 존재를 망각하기도 한다. 문명계란 피상적으로 하늘과 땅이라는 자연계를 밀어내고 만든 사람들의 세계로 보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원래 자연을 터로 삼아 싹튼 것이자, 현재도 자연계 안에 존재한다고 있다는 사실을 이따금 아니 자주 망각한다. 
작가 박기진은 자연(하늘/땅)과 사람(남/녀/노/소, 개인/집단) 그리고 자연이 기억하는 통시적 역사와 공시적 맥락을,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라는 ‘창’을 통해서 바라보면서, 시각화하는 일에 골몰해 왔다. 그것은 2000년대 DMZ에서의 군 복무나 독일 베를린 체류를 통해서 골몰하게 된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 대한 탐구이거나 2012~2013년 남극에서의 체류 경험을 통해 자각하게 된 자연 생태에 대한 성찰과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 하늘, 땅, 사람이 있다. 박기진은 최근 개인전에서 ‘진동’이라는 주제 아래 하늘과 땅 그리고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의 관계를 다음처럼 성찰한다: “베를린과 DMZ 땅, 그리고 하늘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무한한 자연과 역사의 진동을 하나의 전시에 모두 담을 수야 없겠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미묘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렇게 꺼내어 본다.” 
그가 표현하려고 했던 ‘무한한 자연과 역사의 진동’이란 과연 무엇일까? 전시를 통해 살펴본다. 




II. 사람과 문명 - 수직의 존재
박기진은 이전의 개인전에서 ‘통로’라는 주제로 수평적 공간을 탐구했었다. 즉 그는 베를린에 머물면서 조사했던, ‘동서독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과 남북한이 교차하는 DMZ를 연결하는 동서남북의 수평적 공간’을 구성했었다. 그것은 땅이 구축했고 구축해 나가는 수평적 공간에 대한 탐색이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땅과 하늘’을 메타포로 삼아 수직적 공간을 탐색한다. 그것은 관계의 지평을 매개하는 수직의 존재에 대한 탐구와 다를 바 없다. 즉 땅이라는 수평적 공간과 하늘이라는 수평적 공간 사이에서 역사를 이끌어왔던 ‘수직의 존재인 사람’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자 사람이 이끌어온 ‘수직적 존재인 문명’에 대한 비판적 고찰인 셈이다. 사람과 문명이라는 수직적 존재는 하늘과 땅이라는 수평을 잇는 매개자이자 동시에 그 수평을 위태롭게 하는 파괴자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사람은 중력에 저항하는 직립을 두 다리로 실현하게 되면서 ‘수직 존재’로서의 위상을 지속해 왔다. 발견과 발명이라는 무수한 이름을 축적하면서 진보적 발전을 지향하는 수직적인 문명을 이 땅 위에 구축해 온 것이다. 아서라! 우리는 안다. 문명의 진보는 늘 위태로움을 잉태시킨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류 공동의 번영을 위해 축적했던 문명이 인류를 자승자박하게 했던 ‘바벨탑 신화’를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경험한다. 문명이 낳은 경쟁과 대립은 기아, 질병, 재난, 전쟁과 같은 파괴의 역사를 곳곳에 기록한다. 이러한 파괴의 역사는 인류가 껴안은 폐해이지만 한편으로 딜레마이자 한편으로 인류 공동으로 해결할 과업임은 물론이다. 땅 위에 직립한 채 땅을 정복한 ‘수직의 존재’인 사람은 원래의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한 매개 주체이기 때문이다. 
박기진의 이번 전시는 이러한 수직적 존재인 사람과 문명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DMZ에 있는 ‘초소’를 형상화한 작품은 전시의 내러티브를 여는 출발점이다: “이 작업은 과거 내가 군 복무 시절 비무장 지대를 마주하며 느꼈던 감정과 그 장소의 기억을 토대로 한다. 당시 나는 관측 장교로 근무하며 종종 고가 초소에 오를 일이 있었다. (중략) 그렇게 고가 초소에 올라서면 탁 트인 시야로 저 멀리 평원이 펼쳐진다. 쭉쭉 뻗은 평행선들과 함께. 위태로운 고가 초소는 땅을 딛고 서서 하늘과 맞닿아 있다.” 
이번 전시에서 전시장 천장에 닿을 듯 높게 선 망루는 그가 중부 전선의 DMZ에서 관측장교로 군 복무를 했던 시절 경험했던 ‘고가 초소’를 형상화한 것이다. 전시장에 스산하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는 망루는 형식적으로는 전시장 전체를 조망하는 전망대로 마련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상징과 메타포로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작가 박기진은 전쟁의 산물인 ‘초소(문명의 수직계)’에서 ‘하늘과 땅(자연의 수평계)’을 바라보았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사람(직립의 수직 존재)’의 동시대 속 존재론적 위상을 성찰한다. 잔인한 문명이 유발한 한국전쟁과 그것이 낳은 가슴 아픈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과거에 묻을 역사이기보다 해결해야 할 현재의 과업이다. 그런 면에서 ‘고가 초소’는 작가 박기진에게 있어 역사가 남긴 인류의 기억을 선명하게 바라보게 만든 어떠한 ‘동인체(動因體)’인 셈이다. 




III. 땅의 기억 - 진동 
작가 박기진은 군 복무 시절 ‘고가 초소’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매일 보는 철책의 내부에 수목과 능선, 구릉과 개울이 미묘한 감동과 슬픔을 주었던 기억이 있다. 이 느낌이 너무나 생경해서 나중에 언젠간 작업으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군 복무 시절, 오랫동안 인간의 손때가 타지 않은 DMZ 속 자연 풍경을 매일 맞닥뜨렸던 관조 경험은 그에게 역사, 사람, 문명, 자연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성찰하게 했다. 당시의 경험은 이번 전시에서 ‘사람, 문명 - 땅 - 하늘’의 관계 지평을 조망하도록 이끈다.     
특히 그에게 인상적이었던 풍경은 DMZ의 땅 위에 ‘전차 바퀴’가 무수히 남긴 흔적이었다. 과거의 긴박했던 순간을 유추하게 만드는 속도감 있는 평행선으로 이리저리 내달린 전차 바큇자국! DMZ 땅 위에 남겨진 그것은 분단 이후 70년간 아무도 밟지 않은 까닭에 각인처럼 남을 수 있었다. 그 흔적이란 ‘그때의 사건’을 자신의 피부 위에 또렷하게 새긴 채 드러내고 있는 ‘땅의 기억’을 은유한다.   
우리는 안다. 흔적은 기억을 소환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흔적이란 사건의 실체는 과거로 사라졌음에도 그것을 유추케 하는 ‘지금, 여기’에 남겨진 증거다. 흔적이라는 증거를 통해 우리는 과거를 추적하고 그 흔적의 복수체를 통해서 비로소 연동된 ‘과거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기에 이른다. 기호학에서 이 흔적은 지표(index)로 고찰된다. 지표는 표상하는 사물과 의미 사이의 인과 관계와 상관성을 드러내는 기호라는 점에서, 땅에 남겨진 전차 바퀴의 흔적은 역사에 좌표를 놓은 한국 전쟁이라는 지표이며, 이 지표는 흔적과 동일하게 우리의 기억을 소환하는 ‘동인’이다.  
이번 전시에서 박기진은 DMZ의 땅 위에 남긴 ‘전차 바퀴’ 흔적과 그것에 연동된 우리의 기억을 ‘진동’의 방식으로 드러낸다. 실제의 전차 바퀴 흔적과 같은 패턴을 새겨 넣은 7개의 큼직한 플라스틱 패널들을 전시장 바닥 곳곳에 설치하고, 이것을 제어 컴퓨터와 진동 모터를 통해서 진동하도록 만든 키네틱 아트의 유형이 그것이다. 
7개의 패널은 마치 DMZ 땅의 피부를 걷어낸 것처럼 스산하고, 굉음의 데시벨을 낮춘 묵직한 진동 소리는 실제의 전쟁 상황을 재연한 것처럼, 관객을 불안하게 만든다. 진동이란 “어떠한 물리적 양들이 어떤 기준값 또는 평형 위치 주위에서 시간에 따라 반복해서 변화하는 움직임”이 아니던가? 미미한 진폭과 적은 진동수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광폭의 진폭과 많은 진동수는 우리에게 불안을 야기한다. 박기진의 이 작품이 표방하는 둔중한 소리와 불안한 떨림은 땅에 가했던 전차라는 외력의 진동체와 그 당시의 사건을 상기하게 만들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우리의 공동의 기억을 소환한다. 관객은 둔중한 소리를 내면서 위태롭게 진동하는 패널들을 보면서 잠시 망각하고 있던 한국전쟁이라는 공동의 아픈 기억을 소환해서 그 기억과 함께 전시장을 거닌다.   
한편, 관객은 이 작품과 연동된 또 다른 작품을 전시장 한구석에서 발견한다. ‘전차 바큇자국’을 진동 패널 위에 남기기 위해서 특수 제작했던 ‘바퀴 롤러’를 전시장 한쪽에 세워놓고 또 이것으로 그린 드로잉 작품을 벽에 걸어 놓은 것이 그것이다. 특히 드로잉 작품은 바퀴 롤러로 마치 판화의 방식으로 물감 흔적을 남겨 만든 세 개의 드로잉을 하나의 패널 위에 겹쳐 놓은 것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마치 관객의 기억을 들추어 보라는 듯이 겹쳐진 세 개의 드로잉은 그가 DMZ에서 발견하였던 ‘땅의 기억’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작품임과 동시에 앞서 우리가 언급한 ‘하늘 - 땅 - 사람’의 관계 지평에 대한 메타포처럼 읽히는 까닭이다.  
그런데 ‘땅의 기억’이라니? 땅이라는 사물이 사건을 기억하는가? 이것은 박기진의 전시를 해설하는 우리의 키워드다. DMZ의 땅에 각인된 흔적과 지표를 오브제적 조각, 키네틱 조각의 유형으로 불러온 작품뿐만 아니라 드로잉으로 소환한 작품에서도 우리는 ‘땅의 기억’을 읽는다. 엄밀히 말해 박기진의 이 작품들이 한국전쟁과 오늘날 분단 상황에 대한 우리의 공동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일 따름이지만, 우리는 땅에 기억 주체의 자격을 부여하면서 ‘땅의 기억’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러한 우리의 호명은 인류의 자기반성과 같은 태도를 공유한다. 사람의 욕망과 문명의 작동 체계에 의해 끊임없이 정복과 종속의 대상이었던 땅의 위상을 거대한 대자연으로 되돌려 주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점은 박기진의 전시 방향성과도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IV. 초연한 하늘 아래에서 
이제 또 다른 전시장으로 가보자. 그곳에는 전시 공간의 천장을 뒤덮은 하늘이 있다. 하늘? 그것은 작가가 하얀색의 한지를 그물 형식으로 꼬아 만든 것들로 성긴 그물코를 지닌 까닭에 어찌 보면 물리적 공간인 천장을 은폐하는 위장막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그것을 열고자 하는 하늘 위 구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장막 아니면 구름? 천장 속에 숨은 조명에 의해서 만들어진 ‘위장막 혹은 구름의 흐릿한 그림자’는 전시장의 벽과 바닥을 은은하게 점유한다. 전시장의 가운데를 비우고 천장을 메운 그것은 분명 하늘의 풍경이다.   



박기진의 천장 위 설치물은 컨트롤러와 감속 모터에 의해서 미세하게 움직인다. 마치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 풍경처럼 말이다. 관심을 기울이는 관객은 이러한 미세한 움직임 외에도 천장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새들의 지저귐이나 바람 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를 듣게 된다. 가히 작가가 DMZ에서 만났던 적막하고 평화로운 자연의 소리라 할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기억하는 DMZ의 땅과 달리, 그곳의 하늘은 초연(超然)하다. “어떤 현실 속에서 벗어나 그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하다”는 의미의 하늘의 ‘초연의 상태’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가슴 아린 땅의 기억 풍경’과는 대조적이다. 
작가는 말한다. “땅에는 사람들의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하늘은 잠시 남겨진 흔적을 지우고 늘 원래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말이다. 이 작품은 “모든 인간사의 분주함이 무색하도록 은근히 흘러가는 자연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그저 구름이 떠내려가는 하늘이기도 하고, 바닷속에서 올려다본 수면의 느낌을 담은 것이기도 한 설치작품으로 사그락거리는 모터의 소리와 주의 깊게 보아야 인지할 수 있는 섬세한 움직임 그리고 DMZ에서 녹음된 새소리와 발걸음 소리로 거대한 자연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사, 이를 마주하는 개인에 대한 작가의 고찰을 보여준다.”
작가 박기진이 표현하려고 했던 ‘무한한 자연과 역사의 진동’이 무엇인지 이 지점에서 선명해 진다. 하늘의 초연함은 땅의 기억을 품어 안는다! 그렇다. 오늘도 그는 땅이 기억하는 통시적 역사와 공시적 맥락을 더듬고 성찰한다. 그는 DMZ 공간뿐만 아니라 남극과 같은 극지 또는 반대로 흔한 현실의 삶의 지평 속에서 작업을 지속해 왔고 또 지속해 나갈 것이다. 쉽지 않지만, 자연의 ‘초연함’을 품어 안으면서 말이다. 그의 향후 작품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까닭이다. ●

   
출전 /
김성호, 「진동 - 땅의 기억」, 박기진 작가론-비평 매칭, (재)경주문화재단 지역예술인 지원사업 
(박기진 2020.08.29.-09.22. 523쿤스트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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