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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일반│2020창원조각비엔날레 6

김성호

총감독이 설명하는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6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비엔날레
이글이 연재의 마지막입니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를 맞이하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합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코로나19의 심술로 인해서 2020창원조각비엔날레는 온라인 행사로 먼저 개막합니다. 코로나가 빨리 사라져서 관객 여러분을 속히 전시장 곳곳에서 만나 뵙고 싶네요. 여러분과 전시장에서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준비했던 참여형 예술 작품들을 지면에서나마 소개합니다. 직접 작품을 만지고 체험할 수는 없지만, 아래의 내용을 살펴보시고 순차적으로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영상들을 통해서 간접 체험해 보는 시간을 만들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마리아 사모르체바(Maria Samortseva, 러시아), <태양의 돌 차기 놀이(Solar Hopscotch)> (2020) 
성산아트홀 입구 마당에는 누구나 어린 시절 즐겼던 놀이판이 그려져 있습니다. 러시아 작가 마리아 사모르체바는 태양계의 8개 행성을 놀이판으로 꾸몄습니다. 1번 행성부터 순차적으로 발을 내딛되 돌이 놓인 행성만 건너뛰고 돌아오는 길에 돌을 주워 다시 돌아오는 우주여행입니다. 아니면 ‘우주 땅따먹기’라고 할까요? 아! 옛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우주여행에 초대받은 여러분! 모두 살아있는 조각이 되어 즐거운 우주여행을 떠나세요. 




미셸 블레이지(Michel BLAZY, 모나코)의 ‘〈부케 파이널3(Bouquet Final 3)’〉(2020)
성산아트홀의 중정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작품은 제목처럼 커다란 부케처럼 보입니다. 3단으로 높이 쌓인 것은 우리가 자주 보던 쓰레기통이에요. 이런 것을 '발견된 오브제(Objet trouvé)'라고 하는데요. 일상의 사물이 예술가에 의해서 발견되고 예술품으로 변한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술품이 된 쓰레기통! 이 쓰레기통으로부터 욕조 거품들이 계속 생성되면서 전체가 거대한 거품 꽃으로 둘러싸인 부케가 되었습니다. 기존의 딱딱한 재료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형식의 조각들과 달리 이 작품은 유연하고 부드러운 재료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예측불가능한 생성과 소멸을 선보입니다. “실제로 움직이는 미술품”이라는 뜻의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이자, 이번 비엔날레 주제인 비조각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카리나 스미글라-보빈스키(Karina SMIGLA-BOBINSKI, 독일)의 <ADA> (2020)
이 작품은 커다란 하얀 박스 안에서 3미터가 되는 공을 굴리는 관객 참여형 공간을 구축합니다. 내부에 헬륨을 채워 가볍게 떠다니게 만든 커다란 투명 공의 겉면에는 많은 수의 목탄이 달려 있습니다. 이 공이 거대한 박스형 전시장 내부를 돌아다니면 어떻게 될까요? 하얀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에 ‘목탄의 검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것은 공이 자유롭게 움직인 궤적이자 관객이 참여해서 만든 드로잉입니다. 이 ‘비조각적 조각’에서 작품은 작가의 창작에 의해서 완성된 채 전시장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그리고 관객의 참여와 함께 완성되어 갑니다. 따라서 관객은 더 이상 작품의 감상자만이 아니라, 작품의 공동 창작자인 것이죠. 관객은 하얀 박스가 점차 검게 변하게 되는 과정에 동참하면서 놀이와 예술의 같고 다름을 생각합니다.   



김동현, <지금 순간이 중요하다(This moment matters)> (2020)
이 출품작은 관객과 소통을 도모합니다. 관객과 작품 사이에서 인터랙션이라는 상호 작용을 도모하는 이 작품은 실제로는 당혹스럽습니다. 설치된 박스들에 버튼을 누르라고 해서 누르니 박스 안에서 기계 손이 나와 스위치를 꺼버리기 때문이죠. 음악이나 선물을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작품은 프로그래밍이 된 반응을 선보일 따름이지만 관객은 예측불허의 상황 속에서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동일한 언어를 구사해도 소통에 있어 좌절과 실패를 날마다 경험하는데 비언어를 화두로 한 예술 작품과의 대화에서 소통이 쉽게 성공할 리가 없죠. 작가는 재기발랄한 놀이를 도모하는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 대해서 곱씹어 볼 만한 문제의식을 제기합니다.    




김채린, <만지는 조각(Touching Sculpture)>(2018) 외  
여기 비조각의 개념을 잘 드러내는 소소한 작품들이 여럿 선보입니다. 먼저 ‘만지는 조각’은 석고 위에 검은색 실리콘으로 코팅된 작품으로 관객이 3분 정도 만진 후 손을 떼면 작품의 검은 표면은 관객의 체온 때문에 흰색으로 변합니다. 또 다른 작품 ‘고무 조각 - 크기와 모양이 변하는 조각’은 작품명처럼 관객이 작품을 만지고 당기는 행위를 통해서 ‘작품의 변화’에 개입합니다. 조각이 고정된 것이라는 고정 관념을 전복하는 ‘변화하는 조각’입니다. 소소한 오브제처럼 보이는 작은 조각이 가지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세인트 머신(Saint Machine, 루마니아)의 <하이브리드 센서리움(Hybrid Sensorium)> (2017)
어떻게 보면 과일 같고 어떻게 보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 생명체 같은 조각이 천장에 매달려 있습니다. 조각 표면에 있는 구멍이 관객을 유혹합니다. 신비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구멍 안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관객의 움직임을 지각하는 디지털 장치가 작동합니다. 이 하이브리드 유기체는 관객의 호흡 리듬에 실시간으로 반응합니다. 이 작품은 일정하게 고정된 프로그램 안에서 작동하지만, 조각이라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변하는 생명체 같은 작품일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아하! 이러한 차원에서 이 작품은 관객과의 상호 작용을 시도하는 관객 참여형 미디어 아트라고 정의해 볼 수 있겠습니다. 
 



리홍보(HongBo Li, 중국), 〈자연 연작-나무(Nature series-Wood)〉 (2016)
이 작품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조각대 위에 올린 나무를 가만히 보니 길게 늘어져 있네요. 아! 종이로 만든 나무입니다. 종이를 계속 이어 붙여 만들었기 때문에 당기고 이리저리 돌리면 마치 아코디언처럼 자신의 몸을 늘여서 모양을 변형시킵니다. 이때, 나무 형상의 고유한 모양이 바뀔 뿐만 아니라 딱딱한 질감마저 유연한 무엇으로 변화됩니다. 작가는 이전에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 조각상들을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 관객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요. 원래의 형상을 변화시키는 유연한 재료의 비조각이라고 하겠습니다.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작품은 더 부드러운 모습을 위해서 익히 우리가 알던 단단한 형태를 버립니다. 이러한 변화는 현실계의 감각 세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그렇군요. 모든 것은 변하는군요. 그리고 이 작품은 원래의 ‘자연 의미’를 또한 되새기게 해줍니다. 단단하고 딱딱한 나무라는 것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있을 때는 나이테를 만들고 옆으로 위로 자라는 움직이는 존재였음을 말이죠. 
 

권순학, <어딘가(Elsewhere)> (2020) 
전시장 가운데 바닥과 천장을 잇는 삼각기둥이 서 있습니다. 이 삼각기둥은 마치 투명 유리처럼 반대편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진입니다. 이 삼각기둥에는 전시 이전의 빈 곳과 반대편 전시 공간에 오게 될 구조물 설치 장면이 각각 담겨 있는데 똑같은 모습으로 담겨 있지는 않네요. 작품들이 설치되기 이전에 작가가 미리 와서 전시 공간을 시점에 맞춰 촬영하고 작품들이 설치되는 중에 전시장에 한 번 더 와서 똑같은 시점으로 촬영한 사진 이미지를 서로 합성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사건 이전과 이후의 시간이 겹쳐지고 현실의 공간과 가상의 공간이 겹쳐지는 사진 조각이라고 하겠습니다. 관객은 현실과 같으면서도 다른 기묘한 분위기의 가상 이미지가 마치 거울 기둥처럼 자리한 이 작품을 관람하면서 존재와 부재,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미술에 관한 오래된 문제의식’을 떠올리고 철학적 사색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이수경, <번역된 도자기(Translated Vase)> (2020)
이 작품은 버려진 도자기 파편을 이어 붙여서 만든 조각입니다. 그러니까 이름 모를 도공이 실패작으로 생각하고 깨뜨려버린 도자기의 파편을 작가가 수합해서 새로운 작품의 재료로 삼아 만든 ‘조각 아닌 조각’인 셈입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도자 장인들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도자기를 만들 때, 완성된 도자기에서 작은 결점이라도 발견되면 그 도자기를 깨버리는 것을 말입니다. 결점 없는 최고의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행위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이렇게 버려진 쓸모없는 도자기 파편을 입체 퍼즐처럼 조각을 맞춰 새로운 조각을 만듭니다. 깨어진 파편들을 이어붙인 틈을 금으로 덮어서 ‘버려진 것’에 예술품으로서의 유용성뿐만 아니라 최고의 가치를 새롭게 부여합니다. “부서진 도자기에 새로운 번역과 해석을 통해서 새로운 이야기와 의미를 담은 작품”을 완성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번역된 도자기’라는 작품명의 의미를 이해할 만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장난 가득한 놀이 같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상실과 구원에 관한 진중한 철학적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이포매닉스(Group Hypomanics), <마크 퀸의 셀프가 여기 있을 뻔했다> (2020)
벽면 위에 보라색 네온으로 ‘마크 퀸의 셀프가 여기 있을 뻔했다’라는 텍스트가 쓰여 있고 조명이 깜빡이듯 점멸하면서 위태로운 상황을 연출합니다. 셀프(self)는 yBa 작가 마크 퀸(Marc Quinn)이 자신의 피로 만든 유명한 자소상입니다. 이 작품을 비엔날레에 초대하고자 총감독과 큐레이터들이 노력했으나 최종적으로 출품이 결렬되었다고 합니다. 큐레토리얼 실천이 쉽지 않다는 것을 공감하면서 여기 총감독과 두 큐레이터, 두 코디네이터가 합심해서 작품 한 점을 출품합니다. 그룹명을 하이포매닉스로 지었다는데, 이 단어는 명사로 사용될 때, ‘가벼운 조증, 즉 경조(輕躁)증에 걸린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종종 ‘심하게 기분 좋은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에너지와 아이디어가 넘치지만, 수다스럽거나 산만하고, 목표를 향한 열정으로 과도하게 광폭 행보를 하면서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많죠. 실패의 경험은 새로운 활력을 낳는다고 합니다. 큐레토리얼 팀이 그 마음을 이 작품에 담았습니다. 




관객 여러분과 만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나는 여기 있고 당신은 거기 있네. 같은 하늘을 이고 있어도 볼 수 없는 마음에 애를 태우네. 그대를 언제 만날 수 있으리. 하 수상한 시절을 보내면 볼 수 있을까. 애타는 그리움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행여 그대를 영영 볼 수 없을까 덜컥 겁이 나오. 내 그대를 정해진 기한까지 기다리니 어서 오시오. 내 어찌 그대를 잊고 떠나가리. ●

출전/
김성호, 「총감독이 설명하는 창원조각비엔날레 6」, 『문화누리』, 10월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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