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아트 기고 | 하나의 달, 두 개의 눈 - 남한 미술의 '북한 이슈'

김종길

하나의 달, 두 개의 눈
- 남한 미술의 ‘북한 이슈’



해방 70년의 시간은 고스란히 ‘광복’의 시간이었을까? 민족해방과 인간해방을 동시에 꿈꿨던 근대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독립은 남한과 북한에서 어떻게 성취되었을까? 남한에게 있어 북한은 무엇이고 북한에게 있어 남한은 무엇일까? ‘남한’이란 말의 그림자에 슬쩍 붙어서 종종 우리의 의식을 긴장케 하는 남조선 해방 따위의 종북좌파 프레임과, ‘북한’이란 말의 실체가 70년 동안 상실해 온 미완의 독립으로서의 분단체제 스트레스는 해결된 것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들은 이제 우리 미술계 담론에서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 그 ‘프레임’과 ‘스트레스’는 정치적 보수들에게 자주 악용될 뿐 미학적 전위를 위한 상상이 되지 못할뿐더러, 심지어는 미술인 누구도 남한과 북한이라는 말이 내장하고 있는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내파(內波)에 접속하고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서예례는 ‘리얼디엠지프로젝트2014’ 세미나에서 「평행적 도시건축: 남북한의 상상된 국경과 공간체계」를 발표한 바 있다. 그의 개념을 변용해 ‘남한’과 ‘북한’을 평행적 두 체제(혹은 주체)로 지금 여기의 미술계를 보고자 한다. 남한과 북한이란 말에 따라붙은 냉소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이데올로기 그 자체’인 두 개의 대칭적 평행주체로서.
  
해방과 광복과 분단의 개념이 뒤섞여서 ‘독립’과 ‘건국’과 ‘정부수립’이 헷갈리는, 1945년 8월 15일로부터의 70주년 행사가 곳곳에서 펼쳐졌다. 1945년의 해방을 미완의 광복이라고 주장하는 이들과 1948년의 정부수립을 건국이라고 우기는 이들의 소리는 임시정부의 역사가 없어 공허하고, 그 반대편은 불연속적 역사의 빈틈을 채워주지 못해 답답하다. 남한미술계에서 ‘북한 이슈’는 내부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그런 카오스적 시대상황과 늘 맞물렸다.


최근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의 <2015 SeMA 예술가 길드 아트페어-공허한 제국>의 ‘홍성담 사태’를 보자. <공허한 제국>은 홍성담의 작품 <김기종의 칼질>을 전시 철회함으로서 ‘북한’이 미학적 담론보다 먼저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작동하는 억압 기제임을 보여주었다. 언론과 보수가 ‘시장-관장-감독-작가’를 프레임으로 엮어서 입맛에 맞는 대상을 골라 공격하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데, 문제의 본질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의 대칭적 평행주체인 북한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홍성담 작품 철회에서 흥미롭게 읽어야 할 사실 하나는 남한미술계가 ‘북한 이슈’를 드러내고자 할 때 어떤 형식, 어떤 내용, 어떤 미학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자기)검열적 상황’에서 체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구축된 반공프레임이기도 하다. 그리고 홍성담은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를 보냈다가 그 프레임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1948년 <해방고지>를 그렸던 이쾌대가 1953년 정전협정과 동시에 북한을 선택함으로써 남한미술인들에게 ‘북한’은 좌익 이데올로기로 각인되는 효과를 발휘했고, 이후 리얼리즘 미학이 애국선열조상 건립과 민족기록화 사업이라는 국책사업의 국가미학에 동원된 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되어 남한에서 일시적 폐기처분 상태에 놓였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 남한미술계를 평정했던 백색 모노크롬 현상은 ‘북한 이슈’의 네가티브적 상황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60~70년대의 남한미술계에서 전위적 행위예술가로 나섰던 몇 작가들이 뒤로는 국책사업이 끝난 뒤에도 ‘탁월한’ 사실적 조형감각을 뽐내며 동상조각으로 돈을 벌거나, 북한 만수대 창작사의 거대 동상 조형미학이 아프리카에서 외화벌이를 수주하는 양상도 평행적 상황으로 읽어야 할까? 최원준의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가 보여주는 ‘북한 이슈’는 ‘독재’, ‘우상화’, ‘기념비’, ‘해외 개발’이라는 남한 바깥의 실체들인데도 1970년대의 남한과 너무나 똑같이 겹친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들이 남한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이데올로기로 작동되지 않는다. 반면, 1987년 여름 그림마당 민의 <통일전>에 출품했던 신학철의 <모내기>는 리얼리즘 미학이 부활한 1980년대의 상황에서 국가가 ‘북한 이슈’로 문제제기한 시대의 희극이었다. <모내기>는 1989년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압수되었고 1999년 11월 유죄확정판결을 받았다. 이듬해 4월 시민단체와 예술인단체가 유엔인권위원회에 이 사건을 제소했고 2004년 4월 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모내기>에 대한 판결이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9조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으니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작가를 위한 구제조치를 취하라고 결의했다.


1999년 신학철의 유죄확정으로부터 16년이 지나서 ‘북한’은 공식적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이라는 정부기관의 미술관에 내걸렸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북한프로젝트>는 ‘북한’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남한미술계에 미학적 담론의 개념으로 전면화하려는 시도인 듯하다. 기획자는 “북한을 프로젝트 함으로써 우리에겐 무엇인가로 규정되기 어려운 북한이라는 존재가 끊임없는 의미작용을 거쳐 하나의 규정된 정의나 작품이 되려고 하는 과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과정, 그리고 그 미끄러짐들 속에서 의미가 새롭게 확장되는 과정에 주목”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라지만, 이 전시가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은 북한이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닐 수도 있는 ‘어떤 현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아닌 북한은 남한미술계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되고 안착될 수 있을까? <북한프로젝트>는 ‘북한’에서 이데올로기를 벗겨낸 뒤 남한미술계가 기획해야 할 프로젝트로서의 ‘타자적 대상’에 위치시켰다는 데에 문제적 요소가 있다. 대칭적 평행주체로서 북한은 남한의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고(둘 다 동일한 이데올로기 프레임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인식이 결국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프로젝트로서의 ‘장기적 관점’을 가능케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덧붙이는 게 필요할 테다. 북한 유화와 북한 포스터, 북한 우표는 북한의 실체를 표상하는 기표가 아니라 ‘없는 현실의 공화국 미학’을 표현한 키치적 환(幻)에 불과할 수 있다. 오히려 환의 미학이 넘쳤던 지난해의 <귀신 간첩 할머니>가 더 실체적이었다. <모내기>만큼이나 <북한프로젝트>가 정치적 사건이 되지 못한(?), 아니 미학 담론으로서의 ‘북한’이 제대로 호명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그러므로 너무 우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의 미학을 붙잡고서라도 북한을 꿰뚫지 않으며 안 될 것이라는 생각에 휩싸인다. 왜?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제대로 눈뜨지 못한 남한미술계의 ‘북한 이슈’이자 눈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사시 뜨기’로 밀어냈던 남한과 북한이라는 초점 흐린 두 눈.


우리 근현대사의 분절과 사건들의 충돌에서 일사 분란한 한 시대의 시간을 펼쳐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식민지 조선의 미술인들의 삶도 그랬지만 해방이 되자 정치적 당파성이 갈리면서 계열이 나뉘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3.8선에 따른 분단체제의 등장은 ‘북한 이슈’의 다양한 층위와 이데올로기 공론장을 형성시켰다. 그러나 6.25전쟁이 끝나고 분단이 고착화 되자 그 층위는 겹겹이 산이고 계곡이고 능선이며 성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소란이 펼쳐졌다. 소란은 때때로 산에서 막혔고 계곡을 흘렀으며 능선을 타고 성곽에서 흩어지는 순간들을 반복했다. 1960년대 실험적인 남한미술계의 상황과 1970년대의 전위적 개념미술과 행위예술의 전개, 그리고 1980년대의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19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테크놀로지, 스펙터클, 큐레이션, 대안공간…. 무질서와 (무)위계와 (무)미학적 담론의 연속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은 그런 남한미술의 불/연속적인 분절적 상황을 작품 주제의 파편적 불일치와 해체적 공간 설치로 재현했다. 서울관의 전시는 남한미술계의 ‘소란’이 사실은 얼마나 ‘북한 이슈’의 그림자를 짙게 가지고 있는지를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해방의 외침이 한반도 전체로 확장되지 못한 채 희망 없는 그늘로 소급되었던 미소 군정기의 작품들과, 6.25전쟁의 폐허를 어둡게 표현했던 그림들, 사진들. 해방기의 소란 속에서 ‘북한’은 이데올로기로 존재하지만 ‘타자’가 아닌 남한의 평행주체로 존재하기에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이쪽과 저쪽이 대칭성을 이룰지라도 그것은 개념적 상황일 뿐 실제로는 쌍벽을 이루는 하나의 이종 동일체일 수 있다. 전후 60년의 남한미술사는 서구적/주체적 미술사조의 널뛰기, 국전과 反국전 사이의 욕망하기, 주류와 비주류의 패권다툼, 모더니즘-민중미술-포스트모더니즘의 치열한 상징투쟁, 반역과 혁명과 전복의 현실주의, 미술계 안과 바깥에 존재하는 지역주의, 탈식민주의와 디아스포라와 오리엔탈리즘의 소비, 민중과 시민과 국민과 인민 주체의 혼란, 속도주의, 성과주의, 건설주의, 유토피아 망상의 파괴주의, 그 많은 소란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 맥락에서 1부(소란스러운: 분단된 조국 전후의 삶), 2부(뜨거운: 산업화, 도시화, 민주화), 3부(넘치는: 세계화)로 구성한 전시의 ‘의식화’가 오히려 눈에 거슬렸다. 모든 살아있는 그 시대는 동시대이니 바로 ‘지금’을 기준으로 과거를 줄 세우기할 필요 없이, 그렇게, 뜨거운 소란으로 넘쳐서 계속 이어지도록 내버려 둬야 하지 않을까?  


<리얼디엠지프로젝트>는 북한을 직접적으로 대상화한 프로젝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북한 이슈’를 글로벌하게 선점해 온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올해 4회 째를 맞는 ‘리얼디엠지프로젝트2015’의 가장 큰 특징은 전시장소가 ‘민간인 통제지역’에서 ‘민간인 생활공간’으로 옮겨졌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북한 이슈’의 문제를 실체적 분단 상징인 DMZ에서 ‘사람과 사람의 공간’으로 넓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과 장소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작가들에게 새로운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에서는 DMZ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전망대나 광장, 벙커도 없다. 보이는 것은 거리를 오가는 군인들과 군용품 가게, 휴대폰 보관소 등이다. DMZ의 현재성을 강조했던 1회, 분단과 경계의 문제로 확장되었던 2회, 분단에 따른 삶의 상황과 조건에 주목했던 3회까지는 어쨌든 DMZ가 전시의 장소들이었다. 기획자와 작가들은 DMZ의 역사를 기념비화 하려 하지 않았고, 안보 이데올로기도 또한 경계했다.(김남시,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와 ‘동송세월’」참조) 그러나 이제 그런 기념비화와 이데올로기의 경계는 생활공간에서 느슨해질 것이다.


1984년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이 제5회 동인전으로 치렀던 <6.25전>에 출품한 정동석의 <Anti Landscape-통일로>와 1991년부터 2년마다 개최한 이반 기획의 <비무장지대>, 그리고 2011년 이후 매 년 답사를 통한 기획전을 치룬 경기민미협의 프로젝트 모두 ‘DMZ’라는 이슈를 부각시켰다. 그런데 <리얼디엠지프로젝트>는 느슨함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느슨함이 어쩌면 가장 큰 사건일지 모른다. <리얼디엠지프로젝트>에 사실 ‘북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오히려 ‘남한’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나는 이러한 태도가 역설적일지 모르나 북한을 보는 남한의 실체적 눈이라고 생각한다. 남한의 눈에 북한이 어려 있는 것이다. 

  

2015.10월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