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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단순한 사람 김점선 | 김효정

현대미술포럼





단순한 사람 김점선






1975년 대학원 졸업을 앞둔 김점선(1946∼2009)은 홍익대학교 후배에게 자신의 졸업식에 꽃다발을 갖다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시커먼 졸업가운과 학사모는 그에게 영광이 아닌 죽음처럼 느껴졌고, 이는 졸업식이 끝난 후 갑작스레 쓰러진 학생을 관 속에 넣어 장례식을 치루는 <홍씨상가>(1975) 해프닝으로 이어졌다. 일류 미술대학의 졸업식은 축하와 부러움을 받는 자리였을 테지만 그에게 이는 속물적인 이벤트와도 다름이 없었다. 지금부터 45년 전의 ‘홍씨상가’ 해프닝은 청년실업이 학생들을 학교 안에 머물게 하고, ‘실용적’이지 못한 학문을 전공으로 택한 미술대학 학생들의 자화상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김점선은 어떤 작가이기에 지금 우리에게 이 낡은 흑백사진을 남겼을까.      

치열한 현실, 시적인 그림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나 일사후퇴 때 마산으로 피난을 온 김점선은 아버지가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사다주신 크레용으로 화판에 그림을 그렸다. 그는 동네 산에 올라가 피난민 수용소 풍경을 그렸는데, 아버지가 이 그림을 칭찬하며 집에 손님이 올 때마다 아이를 불러 선보이게 했다. 이 시기 아버지의 칭찬은 이 후 김점선의 작품을 향한 마음, 그 결과물인 작품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 그에게 그림은 어려운 존재가 아니며 즐겁게 도피하는 장소이자 성취해야 할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그림 말고도 김점선은 남다른 지식욕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정규수업을 받지 않고 미술실로 가는 것을 본 김점선은 “화가도 공부는 해야 한다. 화가도 수학도, 물리도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고서도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머릿속을 지식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하루에 소설을 두 권씩 독파했고, 대학 시절에는 하루에 네 시간씩 잠을 자며 영어 공부를 했다. 대학 졸업 후 김점선은 미국 선교사에게 통역을 할 정도의 영어 수준이 되었고, 이 때부터 한글보다 영어 원서를 더 많이 읽었다. 그는 주로 미국문화원 도서관을 이용하여 3년 동안 그곳의 모든 예술 서적을 통해 미술사, 미학에 관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했으며, 그 결과로 미술 전공자가 아니었지만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에 어렵지 않게 합격할 수 있었다. 1)   

김점선은 1978년 가죽공예가 김청남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1983년 박여숙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개최하기 전까지 공백기를 가졌다. 이 공백 기간은 여성 예술가에게 주어진 필연적 의무인 출산과 육아 때문으로 짐작된다. 1회 개인전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지만 금방 유명해지고 부유해 진 것은 아니었다. 1988년 갤러리 부산에서의 개인전 도록에 “어렵게 갖는 전시회니 김점선이 별안간 유명해지는 기적이 일어나 지금은 그냥 즐기며 바라보는 내가 가진 그 여자의 그림을 장차는 금테 돈테 두르고 바라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박완서 작가의 짧은 글은 당시 김점선의 상황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김점선의 작품은 치열하고 다이내믹한 그의 현실과는 따로 떨어져 있는 듯 보인다. 그림은 작가의 외적인 상황과 마치 관계가 없는 듯이 평화롭게 정지되어 있다. 어쩌면 그림은 김점선이 단순해지기 위한 수행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제까지 ‘에스키스’라는 그림연습을 수없이 해왔다. 종이나 연습장에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보고, 어떤 때는 색칠까지도 해보고, 그 뒤에 그것이 나 자신의 세속적인 안목에서 좋게 평가될 때 그림으로 옮겨 놓았다. 더러운, 나 자신 속에 낀 정신적인 때를 털어 버리고 싶다. 2)

이와 함께 김점선의 회화에 등장하는 말, 오리, 꽃, 코끼리 등의 소재들이 화면의 반을 채울 만큼 극대화 되어 있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점선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공부를 하는 데 몰두한 이유는 지식을 통해 사회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길을 스스로 정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하나하나에 대해 좋아하고 동경하는 이유를 글로 남겨 놓았는데, 이는 단순한 호감을 넘어 자신을 투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투사하지만 감정이 지나치게 느껴지지 않게, 그는 아이가 그린 것처럼 단순하게 그린다. 많은 양의 공부를 하지만 작가는 간결한 모습으로 걸러낸다. 이것이 김점선의 회화가 갖는 힘이다. 단순하지만 엉성하지 않고 감정을 걸러낸 채 표현하지만 감동을 주는 것이다. 

대중적인 그림
김점선은 1983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09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년 개인전을 개최했다.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작품의 수에 비해 양식이나 소재의 변화는 크지 않다. 하지만 1990년대 초 비교적 종전과 다른 형식의 그림이 등장한다. <무제>(1991)에서는 모란과 새와 같이 조선시대 민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뿐 아니라 동양의 미술에서 중시되었던 재료와 표현 방법 모두를 차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의 재료로 사용된 광목은 전통 동양화에서 많이 사용된 삼베와 같은 질감을 주며, 외곽선을 긋고 그 안에 채색을 하는 방식 혹은 원색을 수용하는 것도 조선시대 채색화와 많은 유사점을 가진다. 이와 같은 소재와 재료의 차용이 수묵화나 문인화가 아닌 조선시대 민화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김점선의 회화가 갖는 본질과 맞닿는 점이 있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지금은 이발소 그림이 된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기>는 어린 시절 가장 많이 본 그림이다. 밀레의 그림들이 ‘조선시대의 민화보다 더 심하게 우리의 민중미술이 되어버렸다”는 그의 언급은 김점선이 자신의 그림에서 ‘대중성’을 중요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실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목 위에 크레파스의 기본색상과 차이가 없는 원색을 화면에 도입함으로써 조선시대 평범한 사람들의 그림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의 장벽을 허물고 있는 것이다.

김점선은 2000년 이후 오십견으로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없어 노트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시기부터 값비싸진 자신의 유화를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예술작품은 어린 아이가 있는 집에 아무렇게나 걸려 그 아이들과 함께 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친숙한 소재로 된 자신의 그림을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소유하기를 원했다. 

또한 김점선의 그림에서 주목할 부분은 공간을 쓰는 방식이다. 1980년대 작품에서는 말, 오리, 꽃 등의 표정이나 크기, 색감으로 인해 풍겨지는 분위기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데 비해 공간이 생겨남으로써 그가 공간을 자신의 감상으로 재구성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의 풍경화를 보면 중앙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양쪽에 겹쳐지는 능선을 따라 모란꽃과 새, 달들이 있고, 떠오르는 붉은 해가 여러 개 나타난다. 해와 달이 공존하고 소재의 크기가 실재와는 다르게 그려져 공간과 시간이 혼재하고 있다. 이 장면은 이른 새벽의 산책길에서 해 뜨는 광경을 보며 느낀 자연의 질서에 대한 작가의 감상을 옮겨 놓은 것이다. 김점선은 이 감상을 바탕으로 자연 질서의 경이로움이 아닌 불만과 저항감이 시공간에 얽혀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 김점선은 대칭적 화면 구도를 선택하면서 이상적인 자연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자연스럽지 못한’ 풍경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생각하는 자연에 대한 감상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해프닝은 해프닝이었을까
김점선은 1972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에 입학하기 전까지 정식 미술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리고 대학원 입학 후에는 ‘생각하지 마라! 오로지 그리기만 하라!’는 자신에게 내린 지령에 따라 하루 온종일 작업에만 몰두했다. 실험영화는 이화여대 시청각학과에 다닐 때부터 시작하여 대학원 시절에도 이어졌는데, 이것은 지금 현대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디어 아트, 퍼포먼스이기도 한 것이다. 글의 서두에 언급한 <홍씨상가>만이 퍼포먼스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미술대학 졸업식을 장례식으로, 졸업가운을 상복으로 바꿔버린 발상, 과연 이것은 정말 해프닝이었을까. 김점선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일체의 모든 행동이나 이벤트를 속물적인 것으로 여겼다. 졸업식은 그에게 거드름이었고 무의미한 축하 의식이었다. 졸업식은 젊음과 이상의 죽음을 의미했다. <홍씨상가>는 미술대학의 학생이 자신의 작품 삼아 벌인 해프닝이 아니었다. 모든 무의미한 행위를 부정하는 김점선의 발언이었다.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으로 표현한 45년 전의 졸업식, 우리가 이 흑백사진을 무심하게 넘길 수 없는 이유이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김점선의 그림은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의 반대편에 있는, 그의 손에 의해 여러 차례 걸러지고 집약된 결과물이다. 반면 그의 말과 글, 행동들은 조금도 과장되거나 모자람이 없는 김점선 그 자체이다. 하지만 상이한 듯 보이는 그림과 작가 이 둘은 자세히 보면 많이 닮아있다. 투박하고 특이해보이지만 아름답고 소박한, 단순한 사람 김점선과 그의 그림이다.  






김효정(1983∼),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먹내음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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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카데믹한 자세에 고정관념 없이 사물을 보기 때문에 신선하다. 미래가 있다는 말을 선배 화가에게 들었으요. 공부에 미쳐서 학구적인 대학생활도 했으니 미술대학을 다니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됐어요” 강석경, 「글과 그림이 만나는 순수의 세계」, 김점선회화전 현대미술관 도록, 1987.

2) 김점선, 「순리를 따르는 넉넉한 마음」, 『나, 김점선』, 김은샘, 1998. 








김점선, <홍씨상가>, 1975




김점선, <무제>, 1987, 캔버스에 아크릴릭, 70×61cm




김점선, <무제>, 1991, 마포위에 아크릴릭, 130×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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