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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이정지의 대안적 추상미술 | 이소임

현대미술포럼





이정지의 대안적 추상미술 






한국 단색조 회화의 역사 속에서 이정지(1943∼)의 그림은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하는 방법론을 구사해왔다. 특히 197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 완숙기 작업 속에 일관되게 시도된 어두운 단색조 화면과 서예쓰기는 한국의 가부장제 문화를 환기시키는 시각언어들을 형식과 내용적으로 기용하면서도 다르게 번역한 결과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의 그림은 한국 단색조 회화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된 부계혈통 중심의 ‘한국적 민족주의’, 또 이를 통해 직조된 ‘순수추상’의 성역과 자기동일성 논리에 끊임없이 균열을 가한다는 점에서 기존 모더니스트들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생명을 향한 시선, 여성적 포용의 원리
서양화 전공으로 1963년부터 6년여 동안 홍익대학교를 다닌 이정지는 여느 ‘4·19세대’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반(反)국전운동과 앵포르멜 미술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실험기를 지나던 그에게 앵포르멜이라는 새로운 서구 미술조류는 국전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기성화단으로부터 돌파구를 마련할 뿐 아니라, 화면에서 이미지와 형상의 문제를 몰아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게 했다. 첫 번째 개인전(신세계화랑, 1972)에 출품된 <생태(生態)>(1971)에서 확인되듯이 초기에 그는 비정형의 둥근 형상과 얼룩, 번짐의 효과를 통해 마치 세포의 형태가 분열하거나 꿈틀대는 것 같은 관념적인 화면을 구성했다. 이 작품 외에도 <생장점(生長點)>, <세포>, <념(念)>과 같은 명제의 그림들이 함께 전시되었다. 작가는 이후 1970년대 중엽까지 이러한 앵포르멜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같은 시기 국내 미술계 동향과 비교할 때, 사실상 1970년대 이정지의 앵포르멜 작업은 다소 늦은 시도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화와 더불어 현대미술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서구의 다양한 미술형식을 재빨리 수용하고 소화시켜야 했던 한국미술계의 지정학적 풍토상 앵포르멜은 1960년대 중엽 이후 빠르게 소멸되었다. 그 이유는 1970년대에 기하학적 추상미술과 설치, 오브제, 퍼포먼스 등 새로운 실험미술이 동시다발적으로 시도되어 ‘이전의 미술’을 대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정지가 앵포르멜을 오랫동안 추구했던 것은 “국전의 관료주의적 미술은 싫고, 그렇다고 남성작가 위주의 아방가르드 미술집단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열외의 존재였던 그가 현대미술의 어휘를 고수하기 위해 내린 선택의 결과였다. 1) 사실상 국내 1970년대 현대미술 운동이 일부 남성작가들의 화단 정치와 맞물려 전개되면서 여성작가들은 자연히 소외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홍대 출신’의, 추상화가 아이덴티티를 지닌 이정지라 해도 그러한 풍토를 피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정지는 활동을 시작한 초기부터 작업과 단체 활동을 병행하며 여성작가로서의 주체성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 특히 첫 개인전과 같은 해 결성된 ‘한국여류화가회’(1972∼) 창립멤버로 참여하며 여성작가의 활동을 위한 체계와 여성주의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는데 힘을 보탰다. 이 단체는 4년제 대학이상의 교육을 받은 많은 여성 작가들이 미술계 중심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을 반대하며 생성된 40여 명의 서양화 전공자들의 모임이었다. 이의 창립 목적은 전시, 세미나 등의 개최를 통해 여성들을 위한 발표의 장을 만드는 데 있었다. 특히 당시 국내 여성학 연구와 여성운동의 초석을 닦아나가던 사회단체 ‘크리스찬 아카데미'(1965∼)와 협동하여 개최한 <여성집단 교육세미나>는 미술계 내외부에 산포되어 있던 여성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고, 여성담론에 대한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핵심적 활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이정지는 1985년 회장직을 역임하는 등 현재까지 이 단체에서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이러한 생물학적 소속감은 그가 추상이라는 남성적 시각어휘를 주된 방법론으로 사용하면서도 남성적인 정치학에 편승하지 않고 독자적인 영역을 이루도록 도왔다.

여성으로서의 주체의식을 바탕으로 작가는 추상형식과 여성적 감수성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결합해 나갔다. 특히 생물의 형태와 생명현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결혼과 출산의 경험을 기점으로 점차 ‘모성’이라는 주제로 수렴되었는데, 1978년 11월 견지화랑에서 열린 제5회 이정지 개인전에 그 전조가 나타난다. 전시 서문 「추상공간 위에 실현된 생물적 생명감: 이정지 작품전」에서 이경성은 작가가 하루살이, 딱정벌레 등 곤충을 작품의 소재로 채택함으로써 “생물학적인 생명감에 도달”했다고 평가했다. 이정지 역시 이경성의 해석에 동의하면서 추상적으로 표현된 곤충은 이 생명체가 딛고 있는 대지의 생명력, 즉 모성의 상징적인 표현이었다고 부연했다. 그에게 있어 대지는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표상이자 수많은 생명체를 품어내는 모성과 유비되는 개념이었다. 즉 이정지는 모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여성적 아이덴티티를 확립함으로써 선행된 남성 앵포르멜 화가들의 실존주의적 태도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색이 지닌 다층적 함의
대지와 모성으로 상징되는 여성적 포용의 원리는 색채의 사용에 있어서도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던 5회 개인전 출품작이나 <무제>(1979), <무제>(1983)와 같은 작업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갈색을 주조 색으로 한 어두운 단색조의 화면을 고수하며 이를 “모든 것을 포용하는 대지의 색”이라 호명한 것이다. 이후 갈색은 2000년대까지 주조색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갈색화면에는 또 다른 함의가 내포되어 있었는데, 바로 1970년대 중엽 이후 미술계를 지배한 ‘백색미학’에 대한 비판적 태도였다. 주지하듯 백색미학은 미학적 목적이 아닌 국내외 정치적 상황 속에서 주조된 레토릭이었다. 근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체를 추동하던 유신기, 정부의 정체성 전략을 등에 업고 일본으로 진출을 꾀하던 단색조 회화운동은 1975년 도쿄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다섯 가지의 흰색》전을 계기로 ‘백색화면’을 자국의 정신을 담은 유일무이한 미술이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화지정학적 상황 때문에 백색미학은 식민지 미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정지 역시 백색의 의미가 외부에 준거를 두고 있다고 상정하며 “가장 한국적인 색”으로서 갈색이 지닌 대안적 함의를 찾아 나갔다. 그 역시 한국인으로서 ‘한국적인 것’과 전통을 표현하기 위해 고심하고 작업의 바탕으로 캔버스 대신 전통한지를 사용하면서도, 여기에 화학 안료를 사용해 어두운 갈색조로 물들이는 등 작업에서 백색을 의도적으로 배제해나갔다. 또 이후에는 갈색을 녹색조, 검정색조로 다양하게 변주하며 백색미학에 내재되었던 모더니즘적 일관성 논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인다.

여성 주체의 지표: 긁기, 그리기, 쓰기
한편, 그는 ‘긁기’를 통해 순수 추상회화로부터 기법적 다름을 실천하기도 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작업방식을 찾아 나가던 대학원 시기(1967∼68) 중 붓이 아닌 팔레트 나이프, 롤러를 작업의 중심영역으로 끌어오면서 긁기를 처음 시도했다. 붓이라는 전통적 회화의 도구에서 탈피하기 위한 대안적 시도로서 시작되었던 긁기는, 1980년대에 이르게 되면 점차 그 즉흥성이 강조되는 측면을 보인다. 일례로 표면 일부분이 긁혀 표현된 <부활>(1973)과는 달리 <무제>(1983)의 전면은 마치 블록을 구축한 것처럼 긁기가 가득 채워져 변화를 보여준다. 마치 작가는 백색화면을 “정신”의 사유작용이 이루어지는 표면으로 보고자 했던 당대의 해석을 자조하듯, “행위(gesture)”가 강조된 갈색화면을 개발해나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이정지의 작업에 나타나는 즉흥적이고 강한 붓터치는 일견 강한 육체적 힘을 필요로 하는 건장한 남성 신체의 지표에 가깝게 보인다. <무제>(1983)의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작가는 아뜰리에 벽면에 150호 크기의 대형 캔버스를 세워두고 롤러로 하얗게 칠해 바짝 말린다. 그 후 표면 위로 여러 번에 걸쳐 어두운 색조의 유화물감을 두텁게 발라 이중 색조의 바탕을 만든다. 물감이 너무 마르거나 질척거리지 않은 상태의 표면이 ‘긁기’에 적합한데, 이후의 단계에서는 강한 ‘제스처(gesture)’와 빠른 속도를 필요로 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매닥질을 친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나이프를 빠르게 휘둘러 표면을 벗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주로 사용하는 초대형 캔버스는 그 높이가 보통 작가의 신장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나무 받침대 위에 올라서거나 바닥에 두고 온몸을 휘둘러가며 다루어야 한다. 그 결과 화면에는 자연히 작가의 몸의 흔적이 마치 지표(index)와 같이 생생하게 기록된다. 주체가 제거되고 강박적인 수행성이 강조된 화면이 정신성을 기록한 미술로 평가되던 당대 단색조 회화 미학에 정반대되는 선택이었다. 

한편, 이정지는 1980년대까지 《제8회 에꼴 드 서울》(관훈갤러리, 1983), 《토탈미술관 개관 기념전》(1982), 《환태평양미술전》(미술회관, 1985) 등 단색조 회화가 중심이 된 국내외 대형 전시들에 초대되는 등 주류미술계로부터 부름이 있다가 1990년대 중엽부터 점차 주변부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그는 ‘긁기’를 점차 서예 ‘쓰기’로 발전시켜 나갔는데, 쓰는 이의 행위와 움직임이 고스란히 담긴 서예야말로 사유와 재현의 과정이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상태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화면의 깊이감과 행위의 표현성의 균형에서 오는, 시각적 세계와 초월적 세계에 심취되어 왔다. 표면과 내면,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생성과 붕괴, 자유와 부자유 등 서로 다른 세계에서 얻어지는 요소들을 통합, 조율해 나가는 일이다. … 요즈음 나의 관심사는 획의 반복에서 얻어지는 문자들의 만남이다. 이 문자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발췌하고 돋구어서, 회화적 요소와 문자적 요소를 거의 같은 조건 내에서 어떻게 공존, 공생하게 하느냐는 점이다”(1998. 11. 작가노트)
 
그림과 문자의 경계를 오가며 제작된 이정지의 작업은 모더니즘의 ‘순수’ 미학을 중심으로 기술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소외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서체 중에서도 전아함보다는 균제미와 박력이 있어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추사체(秋史體)와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습서하는데 천착하며 주위의 시선에 정면으로 맞섰다. <MU®UE 94-2>(1993)에서 거대한 캔버스 전면을 나이프로 날카롭게 긁어 채운 운필의 강약과 일필휘지의 역동적인 필력은 연약한 여성의 것이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기운이 넘쳐난다. 

이 같은 서체작업은 단순히 문자가 갖는 조형적 의미에 주목했다기보다는 긁기 개념이 보다 넓은 의미로 발전된 시도로 보이는데,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작가가 언급한 이어령(1933∼) 이론이 이와 밀접하게 닿아있기 때문이다. 국어국문학자 이어령은 긁기를 그리기의 어원이 되는 중요한 개념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예로부터 문인들이 원고를 쓰는 것을 ‘긁는다’고 표현하는 것을 빌어 그리기가 쓰기와 한 줄기에서 파생된 수행적 행위의 또 다른 용례임을 강조한 바 있다. 즉 이어령의 이론은 동양문화의 뿌리가 되는 서화동체(書畫同體)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 셈이다. 긁기-그리기-쓰기로의 이행은 민족주의와 모더니즘이라는 두 개의 가부장적 담론 밖에 타자로 머물러 있던 여성 모더니스트가 그것들을 작업 안에서 적극 결합시키고, 내면화하는 경위를 통해 자연히 발전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정지는 부계혈통 안에서 ‘남성적인’ 의미로 주조된 요소들을 작업에 적극적으로 포섭시키면서도 그들의 담론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또 여성적 소재와 기법을 일종의 전략으로 사용하는 ‘여성주의’ 작가들로부터도 변별력을 확보했다. 의식적으로 어떠한 주류에 편승하지 않는 그의 전위적 태도는 남성의 것과 여성의 것을 구분하지 않고도 작업의 독자성을 획득하는 성과를 달성해냈다. 이정지의 추상회화가 보여주는 방법적 다름에서 우리는 이분법에 기반한 모더니즘의 해석을 뛰어넘는 대안적 추상미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페미니즘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러한 차이, 방법적 다름에 있지 않을까. 

 

이소임(1988∼),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수집연구과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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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정지와의 인터뷰, 2020년 12월 23일, 작가의 스튜디오. 

2) 크리스찬 아카데미와의 협동 하에 개최된 <여성집단교육세미나>는 ‘예술과 여성’ ‘한국사회, 여성, 예술’ ‘한국사회의 여성미술’ 등의 주제로 3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정지, <생태(生態)>, 1971, 캔버스에 유채, 145.5×97cm, 사진 제공: 선화랑




이정지, <무제>, 연도미상, 한지에 먹, 사진 제공: 선화랑




이정지, <부활>, 1973, 캔버스에 유채, 53×41cm, 사진 제공: 선화랑




이정지, <무제>, 1983, 캔버스에 유채, 227×182cm, 사진 제공: 선화랑




이정지, <MU®UE 94-2>, 1993, 캔버스에 유채, 290×436.4cm, 사진 제공: 선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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