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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아감의 모양, 심경자의 <가르마> 연작 | 이연우

현대미술포럼





살아감의 모양, 심경자의 <가르마> 연작 






심경자(1944∼)는 운보 김기창과 이당 김은호와 같은 동양화가들의 가르침 아래 미술조류를 온몸으로 체득하며 수도여자사범대학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 시기 그는 한지와 탁본기법을 활용하며 이미 추상미술의 대열에 합류해 있었으나, 당시 한국 미술계의 분위기는 여전히 구상을 선호하고 있었다. 추상미술에 대한 인정에 갈증을 느낀 그는 1976년 문예진흥원에서 개인전을 가진 후 파리행을 단행한다.

1978년부터 1979년까지는 문화공보원장의 주선으로 고암 이응노(1904∼1989)를 만났고, 그의 소개로 폴 파케티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폴 파케티 화랑이 프랑스에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을 소개하고 앵포르멜을 선두했을 정도의 저명한 화랑이었음을 환기하면, 이 시기 파리에서의 활동은 추상에 대한 심경자의 확신을 굳히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전 세계의 미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 때 심경자 또한 그 중심에 있었음은 그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파리에서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았다는 기쁨에 그치지 않고 1979년 서울의 샘터화랑, 1988년 런던의 레이튼 하우스 미술관, 1993년 갤러리 현대 등에서 개인전을 이어갔으며, 2004년에는 갤러리 현대에서 또 한 번 그의 개인전이 열렸다.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앵포르멜을 비롯한 추상미술의 형성은 주로 파리에서 체류하던 이응노, 문신, 한묵 등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가운데 심경자 역시 파케티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작가 자신 또한 신인에게는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 화랑으로 파케티 화랑을 언급한 바 있고, 동시대 파리에서 체류했던 김창열(1929∼2021) 화백의 언급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1) 그러나 그는 당시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여성으로서의 삶으로 복귀하기 위해 파리에서 2년간의 생활 후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처럼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이뤄진 그의 여정은 한국미술사의 주축이 되는 작가로서의 모습과 아내, 어머니,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대변한다. 

이처럼 심경자의 작품세계는 다양한 함의를 가지는데, 그 의의에 비해 작업에 관한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다. 이 같은 연구의 공백은 작가 본인의 육아와 가사일, 여성의 유학생활이 흔하지 않았던 시기적 상황,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본업으로 돌아갈 것에 대한 외부의 사회적 인식과 첨예하게 맞물려 있다. 이처럼 다양한 연유로 주류미술사에서 소외된 ‘여성’작가의 작업을 반추할 때, 그 맥락은 더욱 풍성해질 수 있으리라는 고민에서 이 글은 시작되었다. 그에 따라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지속된 심경자의 작업 중 <가르마> 연작을 살펴보고자 한다.

40년간에 걸친 심경자의 작업은 탁본 기법을 바탕으로 한다. 탁본은 서양회화에서 사용되던 프로타주 기법과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이 두 기법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하던 프로타주가 무의식의 세계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심경자의 작업은 대상물과 날씨를 신중히 고르고, 탁본을 뜨고 말려서 채색하는 인고의 시간을 거친다. 특히 나무테를 대상으로 맑고 바람이 불지 않는 건조한 날을 골라 수행하듯 반복적으로 문질러 완성한 그의 탁본은, 자연과의 합일을 중요시하는 동양화의 문인적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1973년에 완성한 <가르마>는 이처럼 탁본의 기법에 충실하고자 했던 초창기 심경자의 의도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무색의 배경에 나무의 나이테, 기와의 와당, 별전, 오래된 동전의 물질감이 잘 드러나는데, 이는 탁본이 그의 작업을 차별화하는 주요 기법이었던 만큼 기법 자체에 집중하던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나며 심경자의 작업은 나무, 기와 같이 기본적인 탁본에 초점을 맞추던 시기에서 벗어나 조금 더 회화적인 형태로 변모한다. 깨끗하고 말끔한 탁본을 콜라주 하던 것에서 확장하여 콜라주 위에 채색을 하거나 흰 점을 찍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인데, 이는 각기 다른 것들을 한 화면 위에 조화롭게 배치하고자 한 그의 의도에서 발현된 것이다.

그는 동양회화의 주요한 재료가 되는 먹, 한지, 그리고 문인의 정신을 가져가는 동시에 추상과의 끈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주로 구상회화로 이루어져 있던 한국의 미술계에서 파리로 나아가고자 한 것 또한 자신이 만들어가는 추상 세계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례로, 그의 작품 중 <가르마>(1993)는 나이테를 탁본한 것들을 이어 붙여 만든 추상의 화면인 동시에 근경과 원경이 드러나는 동양의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콜라주한 탁본에 삼각산과 해, 구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동시에 드러난 화면은 구상과 추상의 특성을 함께 나타낸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을 대척점에 두기보다 일견 상반된 두 가지 요소를 아우르며 작업했던 그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심경자는 자신의 구술채록문을 통해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 개별성 있게 만들어진 것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우리 삶의 행로와 같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언급처럼, 그의 작품은 수없이 다양한 소재를 오랜 시간에 걸쳐 탁본을 뜨고 이를 콜라주해 완성된다. 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탁본들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면서도, 각각의 개체는 서로를 방해하거나 다른 한쪽을 흡수해버리지 않는다. 한지에 은은하게 스며든 채색은 캔버스에 즉물적으로 나타나는 유화물감의 마티에르나 채색과는 다르게 서로의 다름과 같음을 이해하며 포용의 원리를 나타낸다.

심경자가 자신의 대표적 연작인 <가르마> 시리즈에 대해 “우리들 어머니, 할머니의 상이 담겨져 있어 내가 살아온, 살아갈 길을 의미하는 추상의 선”이라고 언급한 것은 한국 여성으로서의 삶을 확장하여 자연에 투영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빗어 가른 금을 의미하는 가르마는 머리를 빗어내려 묶은 한국 여인을 연상하게 한다. 심경자는 자신의 세대에 그치지 않고, 지나간 세대와 미래 세대를 잇는 매개체로 가르마의 의미를 확장시킴으로써 작품에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하고자 했다.

부드러운 기하학적 형태의 곡선과 타원이 조화롭게 배치된 그의 작품에서 오랜 세월 외부의 날씨를 견뎌내며 단단해진 나무의 나이테가 소재가 되었음은 상상하기 힘들다. 단단한 물질감을 은은하고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한지, 운율을 형성하는 곡선과 직선은 아내로서, 또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무게와 더불어 한국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다시 한국으로, 런던으로 넘나드는 작가로서의 고단한 삶과 그를 통해 더욱 유연해지는 여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단서이기도 하다. 

1986년에 제작된 <가르마>는 둥근 나이테의 형태 위에 갖가지 동전과 기와의 와당무늬, 나무의 겉껍질을 탁본한 것을 콜라주해 만든 작품이다. 단단함과 부드러움, 곡선과 직선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은 그가 살아온 여정을 형상화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삶은 우주적 풍경과 동양의 산수화, 혹은 세포와 같은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하는 미시적 세계로까지 확장된다.

<가르마>는 현재의 삶에 그치지 않고 <Karma>라는 영문 제목명을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과거에서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상기하게 한다. 업(業)을 뜻하는 ‘karma’는 현재의 행위가 언젠가 열매 맺는다는 불교적 진리를 드러낸다. 이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닌 가로지름으로써 세대를 연결하고, 넘나듦으로써 상호작용하고자 하는 작가 본인의 의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가르마는 살아온 것으로 대변되는 과거이자 살아가고 있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는 미래의 시점을 한 화면에 응축한 결과물인 것이다. 

이처럼 심경자의 작업은 결국 모두 자연으로 회귀하는 동시에 작가 스스로와 타인, 과거와 미래, 구상과 추상, 곡선과 직선 사이의 경계에 자신을 끊임없이 노출시킨다. <가르마>라는 시리즈의 제목은 대극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주제의 갈림길에 서있는 작가 본인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서구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포용과 화해로 나아가는 동양의 정신성을 강조하던 그의 태도를 드러낸다. 

이분법을 경계하고, 대척점에 있는 것들을 아우름으로써 재자신의 작업을 완성시켜 나갔던 심경자의 작품세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인생에 있어 온 모든 것들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써 소외되어 왔다. 그의 작품은 목표 외의 것들을 소거하며 이루어가는 작품세계와는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형성된 것이다. 심경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모양을 지극히 동양적 정신성과 한지라는 매개체, 탁본이라는 기법을 통해 담고자 했다. 이 같은 그의 작품을 발굴하는 일은 한국현대미술사의 복잡다단한 구조에 더욱 풍성한 색채를 입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연우(1989∼),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전남도립미술관 개관준비단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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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정은, “심경자 구술채록문 제2차 파리에서의 작업활동과 현대화의 모색”, 2008,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p. 168.





심경자, <가르마>, 1973, 한지에 수묵, 채색, 150×197cm




심경자, <가르마>, 1983, 종이에 채색, 콜라주, 탁본, 2곡 병풍, 180.5×220.5cm




심경자, <가르마>, 1986, 한지에 수묵, 채색, 160×200cm




심경자, <가르마>, 1993, 한지에 수묵, 채색, 130×15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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