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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노정란의 회화, 원숙미에 이르는 심상의 색 | 이지언

현대미술포럼





노정란의 회화, 원숙미에 이르는 심상의 색






노정란의 추상회화
노정란(1948∼)의 그림은 추상회화의 형식을 담고 있으며, 작가 자신의 확고한 그림에 대한 태도를 감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시각적으로 명쾌하다. 추상의 중요한 요소인 색을 통해 인생의 희노애락을 겹겹이 쓸어올려 완성하는 노정란의 최근 작품들에 필자는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노정란의 추상회화를 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그 중요성을 살펴보자면 20세기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조 중 하나인 추상표현주의의 계보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1940-50년대 미국화단을 중심으로 탄생한 미술 흐름으로 현대예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가는 역할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미국 평론가인 알프레드 바(Alfred H. Barr Jr.)에 의해 1929년에 등장한 이 용어는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초기 작품에 대해 논의한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추상표현주의는 사실상 하나의 사조일뿐만 아니라 모더니즘과 이후 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예술 정신을 발현하는 원동력으로서 역할을 담당해왔다. 또한 한국 현대미술에서 볼 수 있는 추상표현주의적인 양상은 서구의 양식에 영향을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작가 개개인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어 작업 되었고, 또한 직접 미국에 유학하고 거주하는 작가들에 의해 심층적으로 발전되어왔다. 

미술의 여정
노정란은 한국의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975년 26세에 도미하여 롱비치 캘리포니아 주립대(California State University, Long Beach)에서 수학하면서 색과 형태에 대한 절대적인 이상미를 추구해 왔다. 1970-80년대의 미국 미술은 참으로 다양한 시도와 사조가 공존하는 시기였으며, 추상뿐만 아니라 포토리얼리즘이나 개념미술, 미니멀리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 이르는 다양한 예술들이 발현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년 동안 미국 활동은 노정란의 작업에 있어 역동적인 원천인 동시에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노정란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은 눈으로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또 서양의 정신과는 어떻게 다른 차이를 가지는가에 대한 참고 지점이 된다. 도미한 이후 작품을 보면 학창시절부터 추구했던 추상적 요소들을 꾸준히 실험한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실험 중 하나로 초창기 작업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 재직 시기와 2015년에 이르는 작품에서 특징적인 점은 짙은 무채색의 균형 있는 사용이다. 회화의 역동적인 느낌을 주는데 필요한 이 색은 모든 색의 대조를 이끌어 냄으로써 화면을 분할하고, 사용한 색들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이러한 것은 ‘황금분할 색 놀이(Golden Section Colors Play)’ 시기인 1999-2003년에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Golden Section #51>(1999)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으며, 수학적이고 기하학적 패턴이 색에 따라 분할되면서 작품에 배치되고 깊이감 있는 검은 계열의 무채색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정란의 작품 시기는 대략 네 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기는 1970-1976년으로 한국의 대학에서 수학한 시기로 이때 역시 추상회화를 추구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기는 1980-1995년으로 다양한 형태의 추상실험이 보여지며 깊이감 있는 무채색의 역할이 대부분 그림에서 중요한 조형적 역할을 하고 있다. 3기는 1999-2003년으로 색면추상의 양상이 보여지는 시기이다. 4기는 2005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로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수평적인 분할로 구성된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조에서 겹침으로
필자가 구분한 네 부분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시기는 4기로 특히 2016년부터 진행해온 작품들인 ‘색놀이_쓸기(Colors Play Sweeping)’라는 동일한 주제와 제목의 연작들이다. 가로로 구성된 색 구성은 관람자의 관점에서 명상적이고 색에 대한 직관을 넘어서 사유의 공간으로 넘어가게 한다. 특히 회색과 무채색 계열의 색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파스텔 계열의 청록색이나 형광색들이 이전의 색구성과는 다른 조합을 보이고 있다. 로스코의 색은 가시적으로 완벽한 추상의 형태를 지니지만 대부분 대상의 형태를 완전히 벗어난 개념이 아니고 사물을 지시한다는 개념을 수반하므로, 재현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추상 즉, 완전한 추상이라 부르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노정란의 ‘색놀이_쓸기’ 연작들은 완전한 추상으로서 사유의 세계 속에서 색을 가지고 유희 혹은 수행하는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그림 자체에 즐거움을 수반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색을 겹치는 작업을 20-30번을 반복하여 밑에 있는 색이 발색이 되도록 갈필하는 기법은 주목할 부분이다. 작가는 이 색들을 사용할 때 ‘그린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놀이라는 개념과 짝을 맞추어 ‘쓸기’라는 행위로 드러냄으로써 작가가 이 작품을 진행하면서 감성적으로 얼마나 충만하고 새로웠을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 또한 작가 자신은 자신의 우울과 침잠한 마음조차도 색으로 쓸어내고 자신의 마음을 만족스러운 상태로 승화함으로써 삶의 음영을 담백하게 받아들인다. 이렇듯 자신의 내면적 자아가 춤을 추듯이 색을 쓸어내는 작업과 만났을 때 우리는 추상의 묘미를 다시금 맛보게 된다. <색놀이_쓸기 #294>(2020)는 이러한 유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채색된 물감 위에 넓은 면 위로 지나가는 적당히 거친 붓의 갈필 효과는 작가의 작업 속도와 호흡을 보여주는 지점이 된다. 이렇듯 매력적인 색들이 절제된 능숙한 붓의 필력에 의해 수없이 겹쳐지고 올라가면서 발색이 되어 마음의 색은 원숙한 아름다움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색놀이_쓸기의 미학_실러의 철학
예술철학에서 ‘놀이’ 혹은 ‘유희’라는 개념은 프리드리히 실러(J. C. Friedrich von Schiller)의 미학저서 『인간의 미적교육에 관한 서한』(1794)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칸트의 『판단력비판』(1790)에 영향을 받은 연구로 서한 형식으로 쓰여진 이 글은 인간의 삶에서 예술, 즉 미적인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지 언급한다. 실러에 따르면 인간은 ‘놀이하는 한에서만 온전한 인간’이 된다. 또한 미적 놀이와 자유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며 놀이는 아름다움을 통해 성취되므로 결국 ‘미’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이때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지점을 실러는 ‘미적상태’라고 부르면서 미와 놀이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러는 추상적 생각들에 인간 삶의 경험적 가치를 귀속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경험’은 활력을 주는 미를 숭고에 가까운 의미로 본다는 점에서 실러가 언급하는 미는 숭고미를 포함하면서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유희’, 즉 ‘놀이’라는 개념을 결합한다. 

『인간의 미적교육에 관한 서한』 중 열여덟 번째 편지에서 실러는 구체적으로 미의 역할에 대해 “미를 통해서 감각적(sensuous) 인간은 형식과 사유로 인도됩니다. 아름다움을 통해서 정신적 인간은 물질로 되돌아가 감각 세계에 복귀하게 됩니다”라고 언급하면서 미와 예술, 놀이, 자유와 같은 가치를 결합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점에서 노정란의 회화 중 ‘색놀이_쓸기’ 연작들이 실러의 ‘놀이충동’, ‘미와 놀이의 만남’ 등의 테제와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전통적 개념을 넘어서 ‘색을 쓸어낸다’는 행위를 통해 그녀만의 심상의 색을 만들어내고, 이 과정이 삶을 원숙미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현재의 작품에서 목도되듯이 노정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색놀이_쓸기’라고 하는 이 행위야말로 추상표현주의나 서양 작가들 각자의 가치를 넘어서 노정란만의 고유성을 형성하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중심에서 치열하게 작업을 진행했던 한국 현대화가 노정란의 추상회화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정신과 활동을 풍부하게 하는 예술작업이자 업적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노정란의 회화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현재도 진행 중인 추상미술에 대한 생생한 증언으로 기록된다. 


 

이지언(1971∼), 이화여대 대학원 철학과 박사, 현재 조선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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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란, <Golden Section #51>, 1999, 캔버스에 아크릴, 107×180cm




노정란, <색놀이_쓸기 #294(Colors Play Sweeping)>, 2020, 캔버스에 아크릴, 38×56×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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