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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성

박영택

1980년대 후반 미술계는, 분명 이전과 달랐다. 감수성이 달라졌다. 조금은 종류가 다른 젊은 세대들이 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미술의 개념이나 미술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작품도 분명 색달랐다. 매체를 선택하고 다루고 조작하는 솜씨도 남달랐다. 그들에게 기계, 새로운 매체는 확장된 육체였다. 그래서 몸이 다르고 그 몸에서 생산되는 것들, 그 몸이 지각하고 사유하고 느끼고 욕망하는 것들이 달랐다. 그들에게는 의식이나 관념보다 몸이 우선했다. 감각이 중요했다. 그래서 패션부터가 튀었다. 평범을 거부하고 집단적인 취향을 가로질러가면서 묘한 개인성을 흘리고 다녔다.
미술이란 것을 선배세대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유희하고 즐기거나 희롱하기 시작했다. 너무 무겁고 너무 개념적이거나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던 미술을 자신들의 삶에서, 육체에서 떼어놓았다. 정을 떼듯이 말이다. 그들에게 미술은 논리나 의무나 과제가 아니라 놀이이고 감각이고 심각하지 않은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세상, 현실을 보는 눈이 달라졌기에 가능한 지점이었다.
당시 나는 <황금사과>나 혹은 <선데이서울>전을 통해 그런 일련의 신세대 인종을 만났다. 그보다 먼저, 그러니까 1986년 우연한 기회에 최정화가 운영하던 화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당시 그의 작업에 대한 인상이나 기억보다 또렷하게 부감되었던 것은 조금은 시니컬하고 양아치같으면서도 무척이나‘쉬크’한 그의 인상과 취향이었다. 철저한 개인성으로 무장한 인간, 세련되고 독자한 감수성으로 집단화의 경향을 모조리 지우고 자기에 게 몰입해 있는 그런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이 개별성에 의한 자존과 미술작업을 결국 한 개인의 감각과 심미관의 총화로 자연스레 인식하고 길어올리며 이렇게 삶과 미술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뿌리에서 키워내고자 했던 것도 그들이었다.
여기에는 분명 사회적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1987년을 기점으로 사회운동의 파고가 잦아들고 88 서울올림픽 이후 급격하게 불어 닥친 세계화 열풍과 해외여행자유화, 시장개방 추세에 발맞춰 외국작가의 국내전과 국내작가의 해외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미술의 변화는 물리적 시차가 아니라 공간적 전이의 양태를 적극 띄게 되었다 등등의 변화가 그것이다. 80년대 후반에 유학을 간 세대들이 90년대 중반 이후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미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눈과 인식이 폭이 그만큼 넓어졌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눈들이 무척 높아졌다는 얘기며 서구현대미술을 바라보던 방식과 영향관게가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이 섞여서 새로운 미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로인해 90년대 미술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낯설고 생경한 감수성을 안겼으며 달라진 미술술개념을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안정된 경제생활, 컴퓨터를 비롯한 통신 매체의 급속한 발달과 보급, 상대적 다수인 대중이 중심이 되는 대중문화시대에 다시 개인이 부각되었으며 그 개인은 ‘문제적 개인’이 아니라 일상에서 만나는 ‘일상적 개인’이란 인식도 뒤따른다. 바로 그러한 달라진 사회환경에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들에 의해 이전과는 다른 미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 유학생들이 대거 귀국하고 그로인해 기존 미술교육이나 관습과는 다른 균열들이 분명 생겨났고 아울러 광주비엔날레와 휘트니비엔날레 한국전 등이 열리면서 세계현대미술의 흐름과 향상, 현장을 이 땅에서 직접적으로 목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세대는 그 모든 것을 스폰지 마냥 빨아들였다.

90년대 미술의 중심적 기류나 특징들은 키치적, 컬트적, 그리고 대중문화적 신세대 미술에서 두드러지게 검출된다. 이 같은 현상은 90년대 들어와 우리 사회와 문화가 대도시의 특정한 소비집단에 기반한 문화패턴의 영향을 통해 형성된 예술현상이며 한국사회의 급격한문화변동과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1991년에 유하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란 시집을 출간했다. 1984년에 나온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끼고 살았던 세대에게 그 시집은 완전히 다른 세상, 다른 감각,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려주는 조짐이었다. 이 시집은 90년대 문화, 예술계의 달라진 상황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신세대 작가들의 감성을 대변하였다. 당시는 아직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게급투쟁과 관련된 이념 논쟁이 지배적이던 시대였다. 그러나 유하는 그 어느 편에 서는 대신 자본주의가 개인의 내면에 새겨 온 무의식적인 트라우마를 표현하는 다양한 종류의 시를 선보였다. 그는 이념의 시대 이면에 작동하는 것,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유혹과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욕망 등을 직감했다. 따라서 우리의 욕망이 메커니즘이 이해는 불가피하게 요구되었다. 당시 신세대들은 소비자본주의의 욕망구조를 스스럼없이 드러낸 이들이다. 여기에 비판적인 거리가 존재하느냐 아니냐는 뒤로 하고 그러한 욕망이 우선적으로 압도되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미술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신세대작가들은 그 욕망 속에서 미술을 사고 하기 시작한다.

80년대 후반 들어와 미술계에서 신세대라는 말이 유행이 되었다. 마치 유행성 열병, 전염병처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신세대에 대한 논의와 슬로건이 수많은 매체와 방송을 통해 알려졌고 여기에 대한 여러가지 분석과 전망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신세대라는 말보다 이른바 ‘X세대’라는 말이 더 유행하였다. 우리에게 이 X세대라는 말이 유행되기 시작한 것은 ‘94년쯤으로 여겨진다. 당시 X세대란 말이 화장품 광고에 등장하면서 이후 매스컴이나 광고계에서 신세대를 일컫는 말로 광범위하게 쓰여지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된다. 태평양화장품이 자신들의 상품인 ‘트윈X’ 신세대 남성용 화장품광고에 써먹던 이 말은 이후 그 광고에 등장하는 유명 탤렌트 이병헌 같은 외모, 연령, 패션, 의상, 두발 등의 감각만을 못박아 규정하는 제한된 의미로 통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다분히 상품화된 소비사회의 속성과 메커니즘에 철저하게 밀착되어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원래 X세대란 용어는 미국의 코플란트가 80년대 후반 집필한 ‘Generation-X에서 처음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가 의도한 것은 60년대 판을 쳤던 히피의 자손들을 가르키기 위해서 였다. 히피들에게 있어 거부의 대상이었던 맥도날드 햄버거로 대표되는 비인간적 인스턴트 문화에 길들여진 세대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우리에게는 상당히 긍정적인 용어로, 상품판매 촉진을 자극하기 위한 용어로 도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상 미국에서는 X세대, 프랑스에서는 레드부솔(불평불만주의자)이라고 불리는 신세대들은 그들 부모들이 누린 경제적 풍요와 명료하고 확신에 찬 시대감각, 시대정신, 유토피아와 희망을 지닌 세대와는 다른 매우 비관적이고 허무적이며 극도의 종말의식에 사로잡힌 세대들이며 이들을 부정적으로 칭하는 용어이다.
우리에게는 유행의 첨단과 패션의 아방가르드들인 한창 감수성 예민한 18세 이상, 25세 이하의 젊은세대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당시 그 인구는 대략 50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들은 철저한 소비자군단이다. 그들을 신세대라고 호출하며 소비욕망을 추동시켜온 것이다. 사실 신세대, 새로운 세대란 어느 시기에나 존재해왔지만 과거와 지금의 신세대간의 결정적인 차별성은 아무래도 문화와 사회-경제적 하부구조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쉽게 말해 삶의 조건, 생활환경이 전시대와 현격히 다르고 이 다른 삶의 조건과 환경에서 자란 세대들이 당연히 그 환경과 조건에 의해 규정되고 변화되고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감수성과 사고관과 가치관, 패션, 식성, 감각등은 바로 자신들이 자라고 배우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길들여지는 것이다.
당시 신세대라 불리우는 일군의 젊은 세대집단은 거의 모두가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 이후 우리 경제가 웬만큼 먹고 살만한 그래서 수출과 근대화의 결실이 비로소 돌아가던 떄에 태어나 자라면서 그 경제적 잉여의 과실을 섭취할 수 있었던 세대들이다. 어느 정도 틀에 잡힌 자본주의라는 그 삶의 조건, 존재조건에서 길들여지고 자라고 배운 본격적인 자본주의 세대들이라는 얘기다. 발전되고 성장된 자본주의는 생산중심에서 소비중심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서 과잉소비를 담당할 주요 계층이 될 ‘제물’을 찾다보니 신세대들이 표적이 된 것이고 그래서 이들이 다분히 소비자로서 가능하게 되었다고도 보여진다. 동시에 그간의 부모세대들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 삶의 체험과는 너무도 다른데서 파생되는 갈등과 혼돈을 스스로 짊어진 젊은 세대들이 그 간극과 차별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병적으로 돌출되어 삐져나간 지점에 신세대론이 접목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그를 통해 독특하고 개성적으로 보이는 신세대들의 라이프스타일이 강변되고 추앙받거나 비난되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변모와 그 특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급격히 늘어난 문화산업들, 즉 패션, 육체산업(성형, 슬리밍, 체형교정, 에어로빅, 화장산업 등), 영상산업(영화, 비디오-비디오방, CA-TV, M-TV등) 그리고 패스트푸드 체인점, 24시간 체인점, 수많은 커피 전문점, 팬시점, 악세사리점 등이 그것이다. 오늘날 신세대는 바로 이 소비중심의 한복판에 서서 무수히 많은 상품과 음식과 옷과 장신구를 소모하고 치장하고 관리하며 영상매체에 중독되어 있고 다분히 멀티화된 감각을 지닌 존재들이다. 또한 개방적이고 다분히 소비중심으로 삶을 즐기고 편하고 안락을 꿈꾸고 자본주의의 경제적 풍요라는 그 달콤한 맛에 길들여지고 입맛이 형성된 세대이다. 그리고 이는 그 부모세대가 힘들여 이룬 경제적 잉여, 비축을 바탕으로 해서 가능한 것이다.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부모없는 자립적인 신세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앞서 자본주의가 더이상 외적인 경제원리일 뿐만아니라 내적인 삶의 원리가 된 것이 바로 이들 신세대에 와서라고 말했는데 바로 이들은 그래서 자본주의적 가치들을 절대적으로 옹호하고 그것이 신념이 된 세대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집단주의에 대한 혐오, 절대적 개체로서의 주체에 대한 열광같은 것으로 발산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신세대란 하나의 실체이기보다는 우리 삶의 자본주의적 심화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변화를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모종의 새로운 삶의 태도 혹은 말과 행위의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90년대 신세대미술의 태동을 가능케한 것은 바로 후기산업사회적 전망과 관련되고 고도의 소비사회로 진입된 우리네 상황과도 맞물린다.

미술의 변화, 미술양식의 차이는 세계관의 차이이며 환경의 차별성에 기인한다. 그런 면에서 신세대미술의 신세대 작가들은 ‘매체에 오염된 세대, 중독된 세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화와 영화의 주인공, 텔렌트와 가수, 비디오 카메라와 전자오락의 틈바구니에서 살아 오고 광고 모델과 대중매체 스타들을 흠모하면서 살아왔고 그에 따라 생활환경과 지각방식이 유사한 세대들이 공유하는 미의식이 자연스럽게 신세대미술을 형성시켰다고 생각한다. 80년대 이전에 교육받았던 세대들과는 판이한 시각과 감수성으로 작업을 개진해나가고 있는 이들은 퍼포먼스, 컴퓨터, 멀티미디어, 인쇄, 테크놀로지, 키치적 오브제와 같은 각종 매체를 자의식 표현의 유일한 도구로 간주하면서 동시에 그 매체의 특성을 최대한 주목하고 있다. 매체라는 것이 예술활동의 기반이 되고 있고 이것이 전시대의 미술관과 현격한 차별성을 띄게 되었다. 이처럼 90년대 미술은 무엇보다도 매체의 새로움에서 찾을 수 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미술매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매체들과 그것의 색다른 조작과 변형이 대신해서 삶을 살아간다. 전시대에 그림이란 당연히 캔버스에 유채나 아크릴릭, 종이에 수채나 과슈, 화선지에 먹이나 분채, 석채, 안료를 사용한다거나 혹은 조각이라면 나무나 브론즈, 철, 석고나 폴리코트등의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해 제작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와,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두드러지게 전통적 재료에서 벗어나 첨단 과학매체, 테크놀로지등을 과감히 자연스럽게 원용하면서 이를 통해 작가들이 자신들의 감수성과 주제의식을 표출해내게 되었다. 탈장르와 매체의 확산, 재료 사용의 자유가 무한히 확장되었다. 사실 구경거리의 사회, 미디어의 사회, 후기산업사회, 정보화사회라고 묘사되는 현대 사회의 문화내지는 시각환경은 각종 매체의 활용과 이미지의 범람과 연결되며 그래서 신세대 작가들이 주목하는 것도 다름아니라 이와 같은 시각 내지 전자이미지들이다. TV와 비디오를 비롯하여 신문, 잡지, 사진, 만화, 팩시밀리, 점보트론, 네온, 홀로그래피, 레이져, 컴퓨터등 현대의 발달된 시각매체들이 제공하는 이미지들이 신세대작가들의 의식을 점유하고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날로 확산되는 대중매체와 전자기 매체의 환경 속에서 성장해야 했던 세대, 구미의 최신 정보와 패션감각을 직접적으로 일상적으로 체득해서 살아가는 존재의 자생적인 산물이 바로 90년대 신세대미술이었다. 바로 그 같은 매체를 통한 감수성과 미의식은 전시대와는 다른 식의 작업세계를 펼쳐보이는 자양분이 되었다. 다른 감각, 다른 몸과 의식이 가능하게 된 것 역시 그러한 매체의 영향에 의해서이다. 무엇보다도 대중문화와 멀티미디어의 확산에 따른 문화지형의 전반적인 변화는 80년대의 저항적 문화지형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미술(특히 회화)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소비문화의 확산과 영상매체와 정보 네트웤의 급증에 따른 문화지형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이미지와 그것 아닌 것을 구별짓는것 자체가 무의미해졌고 이제 이미지는 단지 시각체험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몸 전체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삶의 환경이 되었다.
새로운 매체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낡은 매체, 낡았다고 여긴 매체는 잠재력이 소진되기 보다는 새롭게 변형되어야 할 필요성도 개진되었다. 신세대적 키치미술, 페미니즘 계열의 여성작가, 회화적 오브제 및 설치로서의 사진, 비디오나 조각 설치의 대형 현장 작업, 그리고 새로운 개념주의적 오브제 등이 90년대 들어와 주목받고 있는 작가들의 작업들이다. 일종의 다원주의 내지 포스트모던한 작업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 특히나 테크놀로지와 컴퓨터 등 첨단기기를 활용한 작업, 설치들이 강세를 띄었다. 그러나 회화가 죽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여전히 회화를 새롭게 질문해보는 방식과 사고들이 전개되기도 했다.

또한 90년대 미술은 이른바 ‘포스트’주의가 횡행했으며 미술에 있어 반성, 전복, 탈경계 등의 용어도 빈번하게 등장했던 시기이다. 대중문화의 경계를 교란하려는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 미술적인 경향이 강세를 띄었다. 90년대 와서 모더니즘과 민중 미술이라는 구분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과 함께 중화되었다. 이념적 대안보다는 종합적인 절충주의가 지배했으며 집단보다는 개인의 다양한 사고와 상상력이 중시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분명 90년대는 대중매체와 전자매체를 이용한 각종 혼합매체를 활용해 대중문화의 시각이미지와 어법을 모방하는 미술과 키치적 감수성과 이미지를 활용한 미술이 강력한 조류를 형성하면서 미술개념 자체가 변질되거나 그 위상의 변화가 급변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90년대 미술에서는 대중문화의 경계를 교란하려는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적 미술 경향이 강세를 띄었다. 90년대 문화는 기존 우리미술구조를 뒤바꾸고 흔들고 새로운 감각과 인식의 시선을 분명 넓혀준 측면을 분명 지니고 있다. 반면에 급격히 대중문화로 기운 미술은 자본주의의 상업주의 문화구조 등에 더욱 깊숙히 침윤되고 있음도 엿볼 수 있었으며 서구미술의 영향력에 더 강하게 끌려가는 측면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90년대는 미술을 둘러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다소 희박해졌고 오히려 익명성에 기대고 있으며 그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적 표출 형식인 광고나 컴퓨터그래픽을 넘나들었다. 점차 미술은 정체성을 잃어가거나 부정되는 흐름과 만났다. 여기에는 동.서양의 간극도 없고 세계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구분의 유효성도 없다. 80년대가 보여주었던 사회적 현상의 반성적 기능에 대한 지향도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다. 미술에 혼재된 일상이 미술의 이름으로 재등장할 때, 마치 현재의 일상이 그렇듯, 미술은 또 하나의 가상적 일상을 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90년대에 들어와 우리 사회의 현대성의 축은 크게 바뀌었다. 전통과 현대의 융합, 서구화와 국제화의 추구, 민족주의와 한국성의 발현 등등이 그동안 미술에서 현대성을 이루는 골간이었다면 이제는 보다 다양한 개인의 일상적 경험과 시각문화적 현상에 대한 반향이 주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미술의 지향점이 변화되고 있기보다는 현 사회에서 미술 자체의 위상이 근본적으로 뒤바뀌는 지점으로부터 시작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모더니즘과 민중 미술이라는 구분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과 함께 중화되었으며 개인의 다양한 사고와 상상력이 우선적으로 중시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러 한국미술계는 급속한 외형적 성장과 국제화를 이루어내었다. 그 속도와 변화의 폭과 넓이는 다른 시간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른바 문화 전반에 걸쳐 다원주의와 해체가 범람했고 현재 진행형인 서구미술사조의 신속한 유입과 지적 담론 등이 이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 되었으며 이른바 국제주의적 스타일이 적극 유행되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에도 여전히 동일하며 가속도가 붙어있다. 자연스레 그간의 20세기 미술을 지배해온 시각적 패러다임, 혹은 한국현대미술을 지탱해온 몇 가지 범주들이 붕괴되었다.
90년대 미술의 주역들은 무엇보다도 기성세대의 미술관, 권력화 된 구조를 지운 자리에서 홀연히 서식했다. 더 이상 미술에 있어서 평면성, 환원주의, 강령적인 민중미술의 내용과 형식, 장르의 결벽성, 신화적 작가상, 순수주의와 아방가르드 개념 등은 힘을 상실했다. 이는 미술 자체의 의미 변화를 진단하는 이론들 및 형식의 붕괴, 그리고 시각을 넓혀 그것이 거주하는 제도공간, 즉 미술관, 미술시장, 미술정책 등을 다시 보는 제도비판 담론들을 통해 제기되는데 힘입은 바 크다. 기존 제도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와 그 제도를 유지하려는 힘들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미술계의 상황, 풍경이 되었다. ‘중심의 상실’ 이후, 자신을 시대,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그 의미의 짜임을 탐색하고 이를 작업화 해내고 있는 작가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주된 전략이 되었고 미술의 문제가 된 것이다.

이처럼 90년대 신세대 작가들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미술은 기성세대가 지닌 기존의 미술어법이나 관행을 가로질러 가는 전복과 위반의 제스처를 보여주는, 매우 발랄하고 재치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아이디어위주의 작업인 동시에 과도한 사적취향과 컬트주의 그리고 모든 것을 섞어 놓은 ‘짬뽕’과 혼성취향, 의도적인 감성의 위계 혼란, 권위주의의 대항, 부조리의 미학, 과도한 나르시시즘(대상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애로 매몰되는)과 권태와 허무주의 등으로 범벅져있기도 했다. 거기에는 또한 냉소주의, 무관심, 도덕적 전망의 결여, 편집적 자기애, 비판성의 결여, 과도한 감각주의, 개념적 사고의 함량미달 등의 비판도 붙어다녔다. 이런 시기에 전문적인 작품 비평을 동반한 고급 전위미술의 보다 본격적인 대두를 통해서 맹목적인 이미지의 과잉을 지독하게 비판하는 것과 사진과 비디오, 디지털 이미지로 대변되는 매체 소비 시장에서의 융통성 있는 활동이 개방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관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술과 문화에 대한 소비와 관심이 철저하게 나르시시즘을 위한 문화소비라는데 문제도 있었다. 특정한 문화현상이나 장르를 섭렵하고 그것에 깊이 몰입되고 열광하면서 다른 문화에 대해서 냉소하는 배타적 나르시시즘말이다. 유사한 매니아문화는 미술을 또한 키치적, 페티시즘적 성향으로 더욱 강하게 엮어가면서 새로운 댄디즘을 형성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90년대는 비록 ‘신화없는 시대’이긴 했지만 한국현대미술의 이슈들에 대한 다양한 점검들과 새로운 문화조건에 대한 논쟁이 나름대로 고조된 시기임은 분명하다. 특히나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싼 입장의 첨예함은 국내외적 정세 속에서 한국 현대미술에 잠재되어 있던 제반 컨텍스트들을 새로운 틀에서 점검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성과다. 그 성과들을 단편적이나마 부각하고 정리해온 것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젊은 모색전>이었다. 적지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그 젊은 모색전을 되돌아 볼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당시 ‘젊은’ 모색을 했던 이들의 작업을 통해 비교적 풍요로운 90년대 한국현대미술을 접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90년대를 관통해왔던 것 같다. 그것은 분명 축복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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