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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준석 / 존재와 관계의 메타포

고충환

모준석, 존재와 관계의 메타포


    모준석은 동 선이나 동 파이프를 이용해 조각을 한다. 일종의 바디를 만든 연후에 바디를 모형 삼아 조각을 하는데, 먼저 만들고 싶은 형태 그대로의 바디를 흙으로 빚어 만들고 이를 석고로 떠낸다. 이렇게 만든 모형을 실측 그대로 조각으로 옮기는데, 조각을 위한 모형으로 제작된 것이란 점에서 그 자체가 조각은 아니지만 하나의 조각이 제작되는 과정을 역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캐스팅 기법으로 치자면, 하나의 조각이 잉태되는 모태이며 집이랄 수 있는 거푸집에 해당하겠다. 바디도 거푸집도 과정에 속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바디와 조각, 거푸집과 조각의 관계가 조각과 관련한 흥미로운 역학관계를 보여준다. 현대조각의 개념이 다원화되면서 한갓 과정으로만 여겨졌던 부분이며 성질이 재조명되고, 그 자체가 본격적인 작업이며 조각의 한 형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프로세스 아트와 조각의 본질을 묻는 것과 같은 일종의 개념미술의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향후 작가의 작업을 확장하고 심화할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바디가 만들어지고 나면 형태 그대로 조각으로 옮기는데, 실측에 맞춰 자른 동 선이나 동 파이프를 용접으로 덧붙여 나간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동 선이나 동 파이프를 망치로 두드려 그 표면에 비정형의 자국을 만드는 것인데(단조기법으로서 전통적인 방법이며 용어로 치자면 방짜기법이 되겠다), 자칫 기계적인 인상과 함께 건조해보일 수 있는 형태에다가 물성에 바탕을 둔 아날로그적인 분위기를 부가해 좀 더 감각적으로 어필되게 한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작가는 교회당도 있고 언덕을 오르는 계단도 있고 집집이 창문이 나 있는, 자잘한 집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동네며 마을을 형상화한다. 집과 집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그 형상은 일종의 풍경조각으로 정의할 만한 것인데, 주지하다시피 풍경조각은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 조각을 서사의 지평으로, 삶의 현장성의 층위로 불러내고 확장시킨 경우로서, 삶의 면면들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들려주는 친근함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집집이 나 있는 창문들에 색유리를 끼워 넣어 실감을 더하는 한편,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감각적 효과를 꾀한다. 


모준석_동 선 용접 가변설치_2013

    이 일련의 형상들에서 작가는 집을 짓고 마을을 설계하고 건축을 축조한다. 집이라는 최소단위를 모나드 삼아 이를 점차 부풀려나가면서 마을을 만들고 커뮤니티를 형성시킨다. 작가의 작업에서 집이 핵심적인 의미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겠다. 그렇다면 집은 무슨 의미인가. 집은 집이면서 집이 아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집은 집 이상이다. 이를테면 교회를 몸에다 비유한 것이나(예수), 내 방에서 나가달라고 주문한 것(비토 아콘치), 그리고 나의 집은 너의 집 너의 집은 나의 집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서로 이질적인 정체성들 간의 상호영향사를 주제화한(부산비엔날레) 것에서 보듯 집은 일종의 정체성의 산실이며 표상이다. 그런가하면 집은 나에게 친근한(캐니) 것이지만 동시에 이방인에게는 낯설다(언캐니). 호기심의 대상이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고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 느낌이며 감정 그대로 주체가 타자(특히 익명의 주체)를 대하는 태도며 입장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나에게 한정한 경우에도 집은 세계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면서 동시에 세계로부터 나를 고립시킨다. 이처럼 집은 존재의 양가성을 증언한다. 집은 말하자면 양가성에 바탕을 둔 존재의 몸이고 정체성이고 인격을 표상한다. 존재의 양가성이란 존재가 주체이면서 동시에 잠정적인 타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의 인식에 의해 뒷받침되며, 집은 바로 이런 존재의 양가성에 지지되는 존재 자체를 표상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집을 만들면서 사람을 만들고 마을을 만들고 커뮤니티를 만든다. 집과 집들이 어우러져서 사람의 몸을 만들고 몸과 몸이 어우러져서 커뮤니티를 형성시키는 것인데, 그 이면에는 집이며 마을과 같은 건축물이나 그 건축물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커뮤니티를 일종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전통적인 관념이며 세계관이며 우주관이 반영돼 있다. 살과 피가 흐르는 동네며 지구를, 세계며 우주를 상형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집과 집들이 어우러진 것은 곧 정체성과 정체성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관계 맺는 상황논리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 바로 네트워크다. 집과 집들이 겹겹이 포개지고 중첩된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나와 네가 상호 관계 맺는 네트워크를 형상화한 것이고, 주체와 타자가 서로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커뮤니티를 형상화한 것이다. 

    실제로 선조로 축조된 작가의 조각은 조각이면서 모나드와 모나드 사이, 집과 집들 사이가 서로 열려있고 연속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열린 구조다. 작가의 조각이 선조로 축조된 이유이며 열린 구조에는 이처럼 각별한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주체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주체에 고립되지가 않고 타자에 대해 열려있다. 그 상황논리는 타자도 마찬가지. 그렇게 나는 너에게 연속되고 연장되고 연동된다. 나는 너에게 확장되고 너는 나를 싸안는다. 존재와 존재 간의 상호영향사를, 인터텍스트를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커뮤니티와 네트워크에 이어 상호영향사와 인터텍스트가 작가의 작업을 읽게 해주는 코드며 키워드임을 알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집은 집이면서 풍경이면서 조각이면서 존재의 메타포를 하나로 아우르고 있었다. 

    작가의 조각은 이처럼 집을 통해서 인간사를 말하고 인간관계를 증언한다. 이런 사실의 인식은 집과 집이 모여서 만들어진 일종의 콤플렉스 덩어리며 유기적 커뮤니티로 나타난 조형물을 가족이라고 명명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가족은 때로 리어카에 실려(우리의 여정) 그리고 더러는 배에 실린 채(키를 맡기고서) 어딘가로 떠나고 항해한다. 잦은 이사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고, 정처 없는 이주며 유목을 상형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마도 작가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란 점에서 공감과 함께 현실적 리얼리티를 획득하는가 하면, 보다 본질적으론 이주에 빗대고 항해 중인 배에 빗댄 삶의 메타포로 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삶의 본질을 일종의 여행이며 여로며 여정으로 보는 것과 같은. 그렇게 삶의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달도 만나고 바람과도 맞닥트린다. 그리고 작가는 그 인연을 계기로 달집(달 위에 조성된 집. 일종의 유토피아의 표상?)을 짓고 바람 집(막힌데 없이 온통 구멍이 숭숭 뚫린 열린 구조로 축조된 집)을 짓는다. 

    그렇게 집 속에 집이 스며들고, 빛이 스며들고, 인간미가 스며든다. 열린 구조를 매개로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 여기에 단조를 통해 아날로그적인 분위기를 강조한다고 했는데, 차갑고 중성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이 싫어서이겠지만, 그 자체를 인간관계에 대한 메타포로 볼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살과 피가 흐르는 것과 같은, 따뜻한 온기가 전해질 것만 같은, 그런 관계 말이다. 어쩌면 작가는 그런 관계야말로 진정한 관계이며, 그런 소통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일 수 있음을 주지시키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모준석_동 선 용접 가변설치_2013_1

    한편으로 작가의 조각은 매스를 결여한 것이란 점에서 매스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조각과는 다르다. 조각의 전통적인 개념과는 반하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조각의 전통적인 개념이며 표현 방법을 확장하고 심화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일종의 그림자조각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인데, 선조인 탓에 그림자가 두드러져 보이고, 이로 인해 조형의 영역을 확장하고 공간을 확장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여기에 비록 형태 자체는 고정돼 있지만, 조명을 연출하기에 따라서 여타의 가변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 것도 이런 확장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이런 사실의 인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서 작가의 조각은 조각이면서 회화적이다. 조각과 회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것. 작가의 조각은 말하자면 일종의 선조로 유형화할 수 있고, 따라서 선이 강조되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의 조각은 마치 선을 강조한 드로잉을 보는 것 같고, 이를 입체로 표현한 일종의 입체 드로잉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그림자마저 가세해 이런 회화적인 평면성의 느낌을 강조하고 있는 것. 한편으로 그림자는 실상과 허상, 실제와 이미지와의 모호한 경계 내지 상호관계 문제마저도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조각은 말하자면 실재감을 두고 조형과 그림자가 서로 다투는 형국을 예시해주고 있다. 실제로 공간에 설치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 마치 그림처럼 벽에 걸리기도 하는 작가의 조각은 이처럼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허물고, 평면과 입체를 하나로 아우른다. 그리고 나아가 실상과 허상, 실제와 이미지의 관계라고 하는 조형과 관련한 핵심적인 문제의식마저 건드린다. 

    여기에 작가는 근작에서 의도적으로 가변성과 비결정성을 강조하는 일련의 작업들에 천착한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전작에서의 집이 닫힌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면, 근작에서 집은 열린 구조를 띠며 비결정 구조를 취한다. 마치 짓다 만 구조물이며 공사 중인 건축물을 보는 것 같고, 이로써 확장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존재이며, 완성을 향해 가는 현재진행형의 존재, 아님 같은 의미지만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존재라는 사실의 인식을 조형으로 옮긴 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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