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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 없기 때문에 있는 것

이선영

없기 때문에 있는 것


이수경 전 (12.16—2015.1.4.,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이선영(미술평론가)

  

한국이 ‘다문화’ 사회가 되기 이전부터 이국적인 분위기가 있었던 이태원 지역, 요즘 갑자기 이색적인 맛 집들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그곳에 자리한 작지만 작지 않은 미술 공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는 특이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여있다. 아무 색깔도 장식도 없는 투명 볼이 달려있는 크리스마스트리는 이수경의 작품이다. 100여개의 투명 볼은 관객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기 때문에, ‘아낌없이 주는’ 이 나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썰렁해질 것이다. 관객은 이 투명 볼을 가져가 자신만의 크리스마스 장식에 사용하고 그 사진을 작가에게 되돌려 보냄으로서 완성된다. 번쩍거림이나 색색의 화려함이 빠진 무장식의 빈 볼은 그 다음 작업이 가능해질 중성적인 여백에 해당된다. 이수경의 작품은 작가(발신자)가 만들어 놓은 것을 단순히 소비하는 관객(수신자)를 넘어서, 새로이 쓰게 한다. 그것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이 가능하게 하는 작품, 아니 텍스트이다. 


곤륜산 크리스마스 트리

열린 예술작품으로서의 텍스트는 어떤 기원이나 목표보다는 변형의 과정을 중시한다. 과정은 원본 또는 원형이라고 가정된 어떤 최초의 것을 재현(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을 야기한다. 특정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전 세계인의 축제가 된 크리스마스 자체가 그렇다. 크리스마스트리는 기독교 이전, 고대 수목신앙의 산물이지만, 기독교가 각 지역에서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흡수된 ‘이교적’ 전통이다. 기독교는 신/인간/자연이라는 분명한 계층적 질서가 있기에 자연을 숭배하는 전통은 이교, 또는 이단시되었지만, 종교가 삶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교리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크리스마스트리 외에 성모의 원형이 된 고대의 여신들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무는 한 겨울이어도 죽은 기색이 없는 푸릇함으로 서 있으며, 소원이 적힌 쪽지들이나 선물이 들어있는 양말 등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는 크리스마스트리는 고대적 풍요로움을 여전히 간직한다. 성탄절은 여전히 성스러운 날이지만, 성스러움의 고요한 측면 보다는 축제적인 측면이 더 강조되는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 원색의 천들이 감겨있는 성황당 나무도 이야기 한다. 이 나무 아래서 우리 조상은 소원을 빌었다. 땅과 하늘을 잇는 나무의 생김새는 동서를 아우르는 보편적 상징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 및 역사에서 비롯된 상징은 고착되지 않는다. 투명 볼에 함께 딸려온 금색 글자가 수놓아진 하얀 리본은 변형의 한 과정이기도 한 번역이 있다. 그것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으로부터 온 문장을 영역한 것으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 속의 산 곤륜산에 대한 묘사들이다. ‘서해의 남쪽, 유사의 언저리, 적수의 뒤편 흑수의 앞쪽에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은 곤륜구라고 한다....’는 등의 문장으로 이어진 경전은 우리의 기본적인 방향 감각조차도 혼란에 빠트리면서 어디로 튈지 모를 상상을 촉발시킨다. 미셀 푸코로 하여금 [말과 사물]이라는 책을 쓰게 했던, 이상한 분류법으로 폭소를 자아냈던 중국의 백과사전처럼, 지금여기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지형도를 가진다. 


번역된 도자기 27

푸코의 분류법에 의하면 그곳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헤테로피아일 것이다. 푸코에 의하면 헤테로피아는 주어진 사회적 공간에서 나타나는 희귀한 공간들이며, 그 기능이 다른 것과 다르거나 심지어는 정반대이다. 헤테로피아는 현실적 뿌리로부터 해방된 시공간적 이미지이다. 지금여기의 지배적 질서가 너무 결정론적이라고 생각될 때, 그러한 가혹함과 진부함이 헤테로피아적 상상력을 고무한다. 이수경이 참고하고 있는 동양의 고전은 미국사람들보다 더 미국화 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이색적인 텍스트로 다가온다. 전문가들에게는 자자구구 엄격하게 해석되어야할 정전일지 모르지만, 지금 여기의 논리와는 거리가 있기에, 어처구니없는 상상력으로 비약될 수 있는 틈이 숭숭 뚫려있다. 산해경은 동/서양화의 구별 없이 현대의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공조하면 상상은 현실이 된다. 상상적 현실은 허위의식이나 이데올로기 등으로 비판되기도 하지만, 예술이나 종교 또한 기대고 있는 방식이다. 


투명 볼에 딸려온 하얀 리본에 새겨진 문장은 텍스트에서 발췌, 번역한 것이다. 텍스트는 이전의 텍스트들로 짜여 진 것이고, 그것들이 짜여 진 것인 한 틈들이 있으며, 이 틈들에서 새로운 텍스트들이 생겨난다. 크리스마스트리의 고대적 전통이 동양의 오랜 고전과 만나 어떤 작품을 만들고, 그것이 타자에게 전달되어 또 다른 변형을 준비한다. 이수경의 작품은 그것이 예술작품 뿐 아니라, 세계의 구성 원리임을 보여준다. 트리 주변에 둥글게 배치한, 깨진 조각들로 짜깁기된 도자기 작품 [번역된 도자기] 또한 이러한 혼성적 과정을 반복한다. 번역이라는 반복적 행위에는 차이가 전제되며, 결국 차이를 낳는다. 장식구처럼 만들어진 둥근 도자기들은 구라는 소우주 속에 투사될 수많은 희망의 상상처럼 각기 다른 파편들로 조합되어 있다. 그것은 뒤에 서있는 [곤륜산 크리스마스트리]를 또 하나의 소우주로 반복한다. 둥그스름한 것들은 여기저기에서 온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있지만 응집력이 있다. 도자기는 깨지기 쉬우면서도 불과 흙으로 만들어진 재질 그 자체는 매우 강해서 유물로도 가장 많이 남아 시대구분에 사용되기도 한다. 


2014 tvg 33



2014 tvg 34


어디가 입구인지 찾아보기 힘든 이수경의 돌연변이 도자기는 단단함과 가변성이라는 모순된 범주들의 범벅이다. 원래의 기형과 무관하게 어디로 뻗어나갈지 알 수 없는 변이체는 예술 뿐 아니라, 삶의 모델처럼 다가온다. 이 전시에는 예술과 삶 사이에 매우 적절하게 자리한 또 하나의 방식인 키치 형식의 그림이 걸려있다. 그것은 ‘고향으로 데려가 주오’라는 전시부제를 낳게 했던 미국의 컨트리 가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고향의 풍경이다. 크리스마스트리용 나무를 베어왔을 법한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호숫가 풍경이다. 숲과 호수 사이에 있는 나즈막한 굴뚝 집은 고향을 상징한다. 대부분 이러한 토포스는 국적불명이다. 작가는 그 풍경의 가운데를 죽 늘여 놓았다. 현실을 이루고 있는 허구의 몫은 크다. [순간이동연습용 그림]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중간에 드리워진 미끈한 색 면의 활주로를 타고 고향으로 우리를 데려다줄 듯하다. 달콤한 환상을 자극하는 키치 풍의 그림은 고향 아닌 곳에서도 고향에 대한 향수를 충족시켜준다. 그것이 키치의 기능이다. 


painting for out of body travel


painting for out of body travel(오른쪽 부분)

그러나 타지에서 던져진 듯한 실존적 상황에 놓인 현대인들은 고향, 고향 노래하지만, 과연 고향이란 곳이 언제나 ‘꽃피는 산골~’이었는가. 작가는 가수 존 덴버가 정작 이 노래의 원형이 된 웨스트버지니아 지역을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한 가수가 불렀고 미국인들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교감했던 고향을 그리는 그 히트곡의 진실은 허구이다. 물론 그것은 까발려질 진실이나 고발될 현실은 아니다. 심지어는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럴듯한 곡이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며, 변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다. 그것은 부재적 상황에 연루될 수밖에 없는 예술의 언어를 압축한다. 예술을 포함한 모든 언어는 사물과 거리를 둔다. 사물과 하나 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언어 자체는 사물의 부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감미로운 선율과 목소리에 담긴 노래 속 그곳은  상상의 장소였고, 유토피아가 그러하듯이 지상에는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은 허구를 현실화한다. 허구를 현실처럼 꾸민다는 것이 아니라, 허구 역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키치는 물론 예술과도 가까운 종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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