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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민 / 현대의 묵시록과 예술

이선영

현대의 묵시록과 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제단화처럼 웅장한 규모를 가지는 김승민의 작품은 청년 작가의 야심 찬 세계관을 집약한다. 단편적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젊은 작가들이 많다는 점과 비교된다. 작품 속 등장인물은 작가 자신을 떠올린다. 서사가 있는 작품에서 그것을 끌어갈 수 있는 주인공은 필수다. 예술은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시작하고, 그것이 아니라면 산산이 흩어져 버릴 것들을 모아준다. 예술과 일상과 다르다. 예술이 아니라면 일상에서의 이런저런 경험이나 깨달음은 그저 소비되고 흘러간다. 일상적 단편들을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빈칸들은 있기 마련이고 작가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통해 예술은 의도치 않게 새로운 것, 적어도 뜻밖의 것을 말할 수 있다. 예술은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통해 세상에 대해서도 발언한다. 현대는 그자체가 과도기로 정의된 이래, 어느 세대든 위기가 아닌 적은 없었지만, 29세의 청년 작가가 최근 몇 년 간 겪은 사건들은 유래가 없었다. 




끝없는 불길 속에 우리는,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93.9x 390.9(cm),



1996년 제주 태생으로, 제주에 내재한 근대 역사의 비극 또한 지역문화 전통의 일부로 묵직하게 자리한다. 그는 수년째 제주 4.3 미술제에도 출품해 오고 있고, 4.3 사건과 비슷한 맥락에 있는 여수, 광주, 대구 등 다른 지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왔다. 번영을 구가하는 자유 대한민국’의 곳곳에 제국과 야합한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근대사회의 철학적 근간을 조명했던 막스 베버는 [정치인의 직업과 소명]에서 국가를 ‘합법적 폭력 수단을 토대로 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관계’로 정의한 바 있다. 아직도 제주 4.3 사건을 ‘공산당(남로당)의 소행’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는 극우 정치인들이 활개치는 정치적 퇴행은 무력감을 주며, 역사적 비극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작가와도 관련된 4.3 피해자는 증조 할아버지뻘이다. 그는 이전 세대의 역사, 사회의식과도 거리가 있는, 그래서 약간은 냉소적이라고 평가되는 세대에 속한다. 


역사적, 사회적 고난에 더해, 자연적 재난도 거의 SF 소설급이다. 멀리서 보면 추상적인 재난은 개인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불안과 공포감을 준다. 김승민의 작품 속에 내재한 환상은 종말론부터 SF까지 관통하는 총체적 재난과 관련되어 있다. 기후 위기부터 전쟁에 이르는 다양한 재난은 불로 가시화된다. 불은 인류 문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지만 그것은 양날의 칼이다. ‘우연히 마주한 불길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할 때’라는 2022년 개인전 작가노트 제목은 그의 작업에서 불이 가지는 상징을 알려준다. 그는 예술이 ‘재난을 마주했을 때의 태도’에 영향을 주기를 바란다. 정신분석학에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방식의 하나로 미리 위험 상황을 반복해 보는 것이 있다. 실제로 그는 초등학교 때 바다와 계곡물에 빠진 경험들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어제의 기억보다 더 선명할 몇 십 년 전 기억이다. 한국사회의 자살률 통계를 염두에 두면 죽음은 우리곁에 편재한다.


김승민은 2023년 작가노트에서 ‘예술의 가장 큰 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조차 재현할 수 있다는 점’으로 본다. 그러면서 ‘각종 신앙과 관련된 상징들을 변형시켜 등장시킴으로써 미래의 재난 앞에서도 유효한 믿음이 있는지 탐구’한다. 그의 작가노트에는 ‘불안’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미래의 불안을 예술을 통해 직시하고, 불안에 대한 대응책을 모색’ 한다. ‘나는 내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기반으로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문제를 건드린다.’ ‘나는 삶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비일상적인 사건들에 대한 불안을 그려낸다.’(2023) 재앙을 비롯한 사건 자체에 대한 불안과 더불어 작가에게는 또 다른 불안이 있다. 그것은 해럴드 불름이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지적 한 바다. 저자는 주로 예술계 내에서의 영향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정보혁명의 시대에 또다른 차원이 펼쳐진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소재들이 떠다니는데, 그림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구체적인 사실의 전달에 있어 압도적인 사진이나 영상, 그리고 이미지 보다 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는 말/글이라는 수단이 이미 존재한다. 그림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스펙터클의 시대에 그림에서의 소통가능성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예술은 가능성일 뿐 현실성이 아니다. 큰 나무 앞에서 굿을 하는 무당처럼 다른 세상으로부터 살아 돌아온다. 간접 체험의 장은 단연 인터넷이다. 20대의 작가는 SNS 같은 소통방식에 익숙해서 재난 또한 이미지로 소비하는 문화 내부에 있다. 2022년 작가노트는 ‘요즘에는 1인 미디어가 발전하며 자극적인 재앙의 이미지는 스스로를 복제하며 계속해서 증식해 나간다’고 진단한다. ‘SNS 새로고침을 하기만 해도 물밀듯 쏟아지는 재난 영상을 보는 것이 일종의 루틴이 되었다’고 하면서, ‘하지만 재앙의 이미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경계한다. ‘상징과 서사가 배제된 체 리얼리티에 충실한 미디어 속 재앙’이 문제라는 것이다. 


현장에 카메라를 바로 갖다 댄 듯 한 각종 장면과 영상들은 사실주의의 문법을 따른다. 허구일수록 더 정교한 사실적 형식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사회학자 스콧 래쉬와 조나단 프리드먼이 편집한 [현대성과 정체성]은 대중적 재현의 특징을 사실주의로 본다. 저자들의 논지에 의하면 19세기에 전형적인 지배적인 문화형식인 사실주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들로 연결돼 있는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 텍스트의 구성에 있어서 작가의 역할은 독자로부터 은폐된다. TV 드라마, 영화, SF 같은 대중적 장르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사실주의의 관습을 따르는 이미지는 하나의 그럴듯한 세계에 관한 관점을 제시한다. 저자들이 사실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은 그것이 문화적 형식의 생산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김승민은 이러한 사실주의 텍스트들과 달리, 작가가 개입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 그리고 자연이나 인공적 대상들은 작가가 부여한 상징적 맥락이 있다. 




잃어버린 고리,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62.2X130.3(cm)



허구는 수동적 소비 대상일 뿐 아니라, 현실을 적극적인 구성할 수 있는 원리가 되기도 한다. 현대 예술은 사실주의의 관습들과 결별해 왔다. 사실주의는 허구다. 대중문화나 예술이나 마찬가지다. 모더니즘은 사실주의의 허구성을 강조한다. 투명한 창이 아니라 작가의 개입을 통해 허구를 허구로 인식한다. 허구든 사실이든 막대한 정보가 흘러 다니는 생태계에서 지각과 기억의 조건도 변화한다. ‘팝콘 브레인’으로 명명된 현상도 있지 않은가. 자극적 이미지에만 노출되다 보니 더 강한 자극에만 반응하는 단세포적인 유형이 되는 것이다. 그는 2023년 작가 노트에서도 미디어가 재난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했다. 작가는 ‘생전 가보지도 못한 지역의 사건 사고는 플롯을 따라 미디어에 송출되는 과정을 통해 모든 사건은 평평해진다. 그리고 평평함은 언제든지 끔찍한 불행이 누군가의 일상에 덮어씌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비극을 큐레이션하여 상영해주는 미디어’를 본다. 


재난과 희생 이미지는 생성형 AI도 가세해서 게임의 수준으로 조합될 수도 있다. 이전에는 디지털 방식으로 이미지를 꼴라주 해서 다시 그리기도 했지만, 회화로 돌아왔다. 주어진 정보를 조합하는 것과 스스로 맥락을 잡아가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변화는 코드의 소비를 넘어서 ‘두려움을 이겨내는’ 예술에 대한 각성과 관련된다. 하지만 이제 청년기를 보내면서 개인적 불안을 넘어서, 보편적인 공감과 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최근 작품은 불안보다는 애도에 방점을 찍는다. 불안은 사건에 대한 예기(豫期)인 반면, 애도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의미 부여가 중요하다. 애도는 희생의 슬픔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전제한다. 비록 그 공동체가 이전 시대만큼 확실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상상보다 현실이 더 환상적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현실과 밀접한 애도 또한 예술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있다. 역사든 자연이든, 개인을 넘어서는 힘에 의한 희생과 죽음에 대한 애도이다. 작가는 사건 현장에 ‘꽃 한 송이 놓는 마음을 살리고’ 싶다고 말한다. 


최근 작업에서 여러 화면을 이어서 제단화처럼 확장시킨 방식도 그 예다. 전대미문의 전염병이나 기후 위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재난의 급은 더 고도화되고 있다. 팬데믹은 제주에서 관광버스 사업을 하는 아버지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군대 다녀온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 있음을 체감했다. 코로나 이전에서 2015년 메르스와 사드 배치 이슈 등으로 지역 경제의 기반 중의 하나인 관광의 발길은 뚝 끊겨 제주의 삶은 이미 척박해져 있었다. 개인으로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외부적 요인에 의한 재난이 빈발해진 것은 세계화가 촘촘해지며 생겨난 도미노 효과다. 물론 누군가에게 기회였을 것이다. 가령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으면서 무기를 생산하는 방위산업체들이나 전후 재건 사업 등으로 노다지가 나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파우스트로 대변되는 ‘파괴를 통한 발전’이라는 근대화 과정이 그 예다. 원래 경영학을 전공하다가 미술대학으로 전과한 것에는 예술이 세상과 나의 총체적 문제에 대한 심도깊은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환상적인 색감을 담은 붓터치가 드러나면서도 재현적인 작품은 끝없는 질문과 대답을 위한 장이 된다. 대규모 재앙은 개개인에게 깊숙하게 작용하는 잠재적 권력을 현실화한다. 팬데믹 기간에 절실하게 체감한 바, 저 멀리 있었던 듯한 권력이 모세혈관같은 망을 타고 일상을 제어한다. 특히 팬데믹은 생명과 밀접한 정치의 모습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정치의 범주를 적과 동지의 대립 관계가 아니라, 주권/벌거벗은 생명의 관계로 파악 한 바 있다. 그는 미셀 푸코의 [앎의 의지]를 인용하면서 자연 생명이 국가권력의 메커니즘과 계산 속으로 통합되기 시작하고 정치가 생명 정치로 변화하는 근대적 과정을 말한다. 정치의 새로운 주체는 특권과 각종 지위를 가진 자유민 또는 나아가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바로 신체라는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신체의 요구와 제시로서 탄생한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에서 신체는 양가적인 존재로서, 주권 권력에 대한 예속의 대상이자 개인적 자유의 담지자다. 


[호모 사케르]에 인용된 바에 의하면, ‘정치란 인민의 생명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하는 것’(페르슈어)이다. 20세기의 전체주의는 생명과 정치의 역동적인 동일성에 기초한다. [호모 사케르]는 이 생명의 형식에서 정치와 철학, 의학적, 생물학적 과학과 법학 사이의 상호교차를 출발점으로 정의된 영역을 뛰어넘는 새로운 영역이 열리는 것을 목도한다. 모두를 위한 사회적 조치라고는 하지만 양극화된 사회에서 재앙도 양극화 된다. 지배계층의 이익을 위해 권력과 기업 복합체가 전쟁을 일으키는 예도 있었다. 독재자와 군산 복합체가 벌이는 전쟁터에는 젊은 민초들이 총알받이로 나가기 마련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적’ 만큼이나 ‘아군’에 의해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역사적 비극들도 분열을 통해 식민 지배를 효과적으로 수행한 정권과 관련된다. 남/북은 물론 동/서의 문제가 그렇다. 밖으로 나가고, 밖에서 들어오는 세계화 시대지만 제국에 굴종적이고 후진국을 착취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무를 지키는 사람들,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62.2x130.3(cm)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는 자연의 법칙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극도의 착취가 야기한 사건들이 있다.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자유와 번영’의 시대에도 분열 정치를 통해 이익을 얻는 세력들은 민초들의 삶과는 무관하다. 단기간의 경제발전의 희생양으로 삼은 생태 문제는 거대한 재앙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발전주의는 결국 물질주의를 말한다. 어떤 사회고 물질에 대한 욕망은 강했지만, 단기간에 이루어진 성과는 욕망의 강도를 더욱 높였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로가 4미터 가까이 되는 대작 [끝없는 불길 속에 우리는](2022)은 등신대를 넘는 높이로 관객 또한 그림 안에 참여하는 듯한 효과를 준다. 작가는 2023년 작가노트에서 ‘비교적 미시적인 시점에서 재난 앞에 불안한 인물이 중심이 되는 50cm 내외의 작은 스케일의 캔버스 작업과,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건이 중심이 되는, 사람 키를 넘는 거대한 스케일의 캔버스 작업은 일종의 신(Scene)과 시퀀스(Sequence)관계인 셈’이라고 말한다. 


‘여러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재난이라는 거대하고 규정하기 힘든 사건에 대해 한 가지 관점에 매몰되지 않고 다면적으로 탐구한다’ 장면의 배치를 통해서 서사를 생성해 나가는‘ 작가는 ‘폐허가 된 풍경과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 각각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의미를 확장’(2022)시킨다. 바깥으로 뚫린 구멍 아래 무대와 같은 평평한 장소에 동굴에 수수께끼같은 서사의 연결고리가 될 만한 것들이 놓여있다. 빛이 들어오는 구멍은 하늘이기 보다는 물같아서, 이 장소는 물리적 인과관계로부터 초월한 그림이라는 환영으로만 가능한 공간이다. 전쟁, 멸종을 떠올리는 불타는 비행기 잔해와 대형 뼈가 가장 큰 대상이다. 어두운 고철 덩어리와 밝은 뼈, 그 둘 모두에 연결되는 불은 여러 상징적 대상이 놓인 정적인 무대 가운데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불은 묵시론적인 공포의 알레고리다.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짐승의 뼈는 멸종이나 멸종 위기종인 거대한 유기체의 잔해이다.


작가는 고래 같은 거대 해양 동물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한다. 거대한 동물의 멸망에는 공룡이 그랬듯이 기후를 비롯한 생태계 변화가 원인이었다. 큰 몸체는 변화에 취약했다. 그것은 뭐든 거대화를 통해서 비교우위를 확보하고 약육강식의 법칙을 사회의 규칙으로 만들려는 지배/권력의 과정에 대한 비판이다. 그가 두 재난의 이미지를 가까이 붙여 놓은 것에는 뜨거운 불로 상징되는 기후 위기인 생태계의 변화를 암시한다. 사계절이 뚜렷했던 한반도도 머지않아 더운 여름이 반년 넘게 이어지는 극단의 기후로 변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이미 동식물 서식지의 변화는 진행 중이다. 하지만 불안을 벗어나려는 작품에는 희망의 기호도 없지 않다. 어두운 화면 한 켠에 돋아나는 식물, 인간과 공존하는 동물, 멸종의 위협에 놓인 종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미술을 상징하는 도상들이다. 작품 속 작은 석고상은 낡은 상징이지만 그림을 시작할 때의 관문이 된다.


그들은 모두 동일자에 의해 억압되거나 부정되는 타자들이다. 재난 이미지는 중앙 무대에서 강력하고 희망적 도상들은 무대 가장자리에 배치하여 다윗과 골리앗 싸움 같은 상황을 암시한다. 재난의 결과인 죽음의 흔적이 화면의 가운데에, 희망적인 도상들이 가장자리에 배치된 상황은 비대칭적이다. 불가능해도 해야만 하는 목록에 예술이 있다는 점에서 젊은 작가의 의지가 드러난다. 자연은 물론 이성의 정점에 있었던 과학기술이 파국에 이르렀을 때 무엇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구원이라는 관념은 거창해 보이지만, 재앙이 거의 묵시론급이기 때문에 질문 또한 종교적이다. 그는 ‘일상적 현실과 신화 사이의 숨겨진 관계를 분석함과 인간의 동시대적 상황을 드러내려 한다’(2022). 근대 예술은 종교의 중요한 부분을 계승했다. 현대의 묵시록적 작품들은 총체적인 위기를 겪은 후 재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 계단으로 올라가면 이 뜨거운 열기를 식혀줄 시원한 통로가 그 길일까. 


그 통로는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이동해야 하는 계단과도 달리, 차원을 이동하는 문처럼 조난자들을 구원해 줄 것이다. 예술 또한 선형적 인과론을 넘어서 도약과 비약이 일어나는 장이다. 종교는 오래전부터 구원에 대한 희망을 제시했고 이후 과학이 그 전능한 역할을 맡았지만, 이성의 또 다른 측면인 과학기술이 오남용되면서 생기는 재앙이 있다. 그는 2023년 작가노트에서 ‘과거에는 재난의 원인을 세상의 혼란이나 신의 분노로 해석했지만, 현대에 들어서면서 재난은 사회적이고 과학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현대사회는 재난의 발생과 확산을 더 잘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 시스템과 기술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인류를 둘러싼 종말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지는 않는다’면서, ‘재난을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춤과 동시에 현대사회가 낳은 더 강력하고 다양한 재난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터, 캔버스에 아크릴, 116.0x81.0(cm), 2023



작품 [잃어버린 고리](2022)는 [끝없는 불길 속에 우리는]을 암시하는 듯한 설정이다. 깊은 숲의 동굴 입구에 거대한 뼛조각을 발견하는 인물은 그것이 ‘잃어버린 고리’임을 말한다. 그의 작품에는 남아있는 단편으로 전체를 추리해야 하는 역사적, 고고학적 수수께끼가 자주 등장한다. 남은 조각들은 침묵한다. 침묵하는 대상으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말하게 하는 것은 역사가나 과학자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더 실감나게 다가오게 하는 공감의 기술은 예술가의 몫이다. 김승민의 작품은 붓터치가 남아있고 색 또한 대상의 고유색으로부터 거리가 있지만, 재현적이다. 대개 서사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와 한 쌍으로 이해된다. 그의 작품은 사실주의는 아니지만 서사가 있다. 리꾀르는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에서 묘사와 설명의 관계를 말한다. 그에 의하면 묘사한다는 것은 설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무엇을 이라는 질문은 왜라는 질문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폴 리꾀르에 의하면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이야기는 없다. 예술은 찬양과 비난이 담긴 평가, 가치측정, 판단이 시도되는 방대한 실험실이며 이를 통해서 이야기성은 윤리에 예비과정이 된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덕적 판단을 위한 상상적 공간을 펼쳐내는 것이다. 폴 리꾀르는 규범에 대한 목표의 우위라는 방향성을 가지며, 윤리적 목표를 정의로운 제도들에서 타인과 함께하는 그리고 타인을 위한 좋은 삶의 목표라고 부른다. 폴 리꾀르에 의하면 윤리적 목표의 첫 번째 구성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잘 산다’ ‘좋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프루스트를 따라서 말한다면 ‘진정한 삶’ 이상적인 삶이란 각자가 행복의 목표로, 좋은 삶에 대한 구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에게 생활/삶(vie)이란 낱말은 순전히 생물학적 의미로 채택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잘 알았던 윤리적-문화적 의미로 체택된 것인데, 그것은 삶의 생물학적 뿌리내림과 동시에 전체로서 인간의 통일성을 동시에 지칭한다. 


저자는 이야기에서 인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인물의 동일성을 만들어 주는 것은 이야기의 동일성이다. 김승민의 작품에는 비극과 고통 그자체가 아니라 그 전후의 상황을 암시된다. 폴 리쾨르에 의하면 비극은 그 어떤 것도 벗어날 수 없는 한계 경험들, 논리적 궁지들을 낳는 경험들이다. 또한 고통은 ‘신체적 아픔, 나아가 정신적 아픔으로 정의될 뿐 아니라 행동하는 능력 곧 수행 역량의 감소와 나아가 파괴, 자기의 총체성에 대한 침해로 느껴지는 그런 감소와 파괴’로 정의된다. 대재앙을 포함하여 수많은 현실이 정보화되어 떠도는 우주에서 어떤 것을 부각하는 것은 사실 자체 만큼이나 방법이다. 예술은 그 방법을 제공한다. 게임 참여자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더욱 촘촘해지는 현대에서 내용이든 방법이든 정치와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동물이 쾌락과 고통을 표시하는 목소리만을 가진데 반해, 인간은 정의와 불의를 공동으로 다루는 말을 소유하고 있다 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는 결국 누가 말을 소유하며 누가 목소리만을 소유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승민은 남은 뼛조각이나 바람 소리만 반향하는 나무에게 목소리를 주려 한다. 중요한 장면을 그리는 화가 또한 비슷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한 장면으로 서사를 응축해야 하는 회화 자체가 수수께끼다. 그의 장면-회화는 거듭되는 해석을 요구한다. 그것은 암석이나 나무숲을 이루는 수많은 겹과 주름에 새겨진 자연의 수수께끼와 동렬에 있다. 자연이든 역사든 단번에 주어지는 사실 또는 진실은 없다. 그것은 모든 것을 계몽의 빛 아래 놓고 생산하고 소비하는 코드들과 달리 묵직한 비밀에 잠겨있다. 그는 ‘작품의 형태는 대부분 현실적이지만, 색감을 통해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더해줌으로써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자 한다. 김승민의 작품은 재현적 요소가 강하지만, 재현주의를 교란하는 여러 형식적 장치들이 존재한다. 


작품 [나무를 지키는 사람들](2022)에서 죽은 이의 머리와 촛불을 들고 있는 청년은 눈을 부릅뜬 채 다가오는 불에 맞서고 있다. 주변은 이미 폐허가 된 상황이지만, 인물 뒤의 나무는 푸른 생명력을 간직한다. 거대한 나무는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는 신성함의 상징으로 많은 신화와 종교에 나타나곤 한다. 근대사의 비극으로 억울하게 죽은 민초가 많은 지역에서 지켜야 할 가치는 역사적 기억일 것이다. 나무는 나이테 등을 통해 주변의 역사를 기록한다. 나무를 지키는 사람은 역사적 비극을 지켜본 자연을 지키는 사람이기도 하다. 작가에 의하면 이 작품은 나무를 태워야 하루 사용할 열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을 염두에 둔 것이다. 누군가는 지속가능성을 위해 자연을 보호하자고 하지만, 그것은 이익을 선점한 이들의 ‘사다리 차기’(자신을 올라갔지만 다른 사람들은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일 수 있다. 작품 [터](2023)에서 뒤편에 한데 뒤엉켜 있는 살림살이들은 부수어진 삶의 터전을 말한다. 




침묵의 시대 : 13월의 추모식, 캔버스에 아크릴, 642.4x390.9cm, 2024



지상의 상황이 어떻든 여전히 푸르른 하늘은 무심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위안도 된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폐허가 복구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형태가 남아있지 않지만 젖가슴과 머리를 마주한 작은 인체는 그것이 모자(母子)상의 일부임을 말한다. 머리가 없는 모자상은 엉망이 되었지만 여전히 삶의 터가 될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장면 속에서 살아있음을 상징하는 직립은 그 조상 밖에는 없다. 모자상은 사랑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관계를 표상하는 보편적인 상징이다. 세상의 수많은 전쟁, 재난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은 어린이를 안은 어머니일 것이다.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그들은 돌덩이처럼 굳어버린다. 제단화처럼 화면 모서리가 변형된 대작 [침묵의 시대_13월의 추모식]에는 화면 가장자리에 해골이 있기는 하지만, 추모객들이 둘러싼 뼈는 인골은 아니다. 우리 근대사에서 빈번했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는 역사를 넘어 자연사에 까지 이어진다. 


김승민의 작품에서 역사 또한 자연사의 일부이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있지만 지상의 어두컴컴함과 비교되는 밝음이 특징이다. 힘의 불균형에 의해 벌어진 비극은 더 높은 심급의 기준만이 진정한 균형을 가능하게 한다. 가령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의 평등이다.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존재와 다르게]에서 단순히 타자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제삼자의 현존(présence)에서 타자로 향하는 정의(justice)를 말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정의는 제삼자의 현존 자체 표명이다. 유럽의 철학자인 레비나스는 기독교의 신을 염두에 두지만, 김승민의 작품에서 제3자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 산, 하늘 등일 수 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묵시록적인 이미지는 ‘재난으로 인해 불에 타고 있거나 물에 잠겨 있는 등 폐허가 된 세계, 거대한 짐승의 뼈 등’이다. 무수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세계에도 기어코 미래는 찾아온다’는 희망을 가진다. 그는 ‘파국에 대한 불안과 무력감’을 이겨내고, ‘지속 가능한 세계를 희망’(2024)한다.


출전; 제주현대미술관(2024 New RIsing Artist: 부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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