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원/ 순수한 마음, 행복의 아이콘
고충환 | 미술평론가
샤넬, 구찌, 루이뷔통. 명품의 대명사로 알려진 브랜드다. 명품에 대한 기호와 기준이 사람들마다 다르긴 하지만,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자본주의의 꽃에 해당하는 브랜드라는 사실에 이견을 보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꽃이 명이라고 한다면, 최근 밝혀진 대로 노동력을 착취한 산물이라는 암도 있다. 이런 억압적인 현실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꽃을 소비하면서 행복하다고 여긴다. 행복하기 위해선 이런 명품 하나쯤 있어야 해, 하는 식이다. 명품을 소유하는 순간, 마치 저절로 행복해지기라도 하는 것 같다. 명품이 행복의 보증수표로, 행복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고 해야 할까.
이런 현실에 작가 정성원은 마치 시대 감정에 불화하기라도 하듯 이와는 그 결이 사뭇 다른 작업을 제안한다(자크 랑시에르는 제도적 장치, 정치적 장치와의 불화에, 시대와의 불화에, 상식과의 불화에 예술의 실천 논리가 있다고 했다). 폐가전과 같은 잡동사니에 금칠을 했다. 번쩍거리는 표면 질감으로 유혹하지만, 알고 보면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문명으로 삶의 질이 풍요로워졌다고는 하나, 오히려 정신적 삶은 피폐해졌고(뒤르켐), 신이 죽은 시대에 물신이 죽은 신의 빈자리를 대신했지만, 현실은 공허하기만 하다. 물신은 욕망의 화신이다. 그리고 욕망은 고갈을 모른다. 죽어야, 비로소, 죽는다. 그렇게 욕망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할 포스터).
그렇게 명품이 행복의 아이콘인 줄 알았지만, 오히려 다만, 자기를 상실한 시대와 공허한 마음을 증명해줄 뿐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요원한 일인가.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없는가. 다만 환영적인 현실로만 존재하는 신기루와도 같은 것인가. 작가는 고민에 빠진다.
그렇게 행복이 작가의 생각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토끼와 양과 사슴, 코끼리와 말과 펭귄과 같은 동물들을 행복의 아이콘으로 제안한다. 동물과 사람은 다르다(물론 생물학적으로 사람도 동물이지만). 동물이 아닌 만큼 동물의 생각을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사람이 보기에 동물들은 하나같이 귀엽고 예쁘고 순수하다. 동물들을 보면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으로 보아, 행복의 아이콘이랄 만 하다.
그러나 여기서 동물이 저절로 행복의 아이콘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동물은 언제 어떻게 행복의 아이콘이 되는가. 또한 그 등식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뭔가. 동물이 순수(그리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전적으로 동물의 입장에서가 아닌, 사람이 동물에 투사한 감정이고 감정이입의 결과다. 순수한 어린아이가 순수한 동물을 본다. 스스로 순수하지 않으면 순수한 존재를, 존재의 순간을 알아차릴 수도 보아낼 수도 없다. 작가에게 행복이란 순수와 동의어이다. 순수한 것이 행복한 것이다. 순수한 동물을 빌려 어린아이와도 같은 순수한 마음을 동경하는 것이며, 행복한 동물을 통해 상실한 유년을 되찾고 싶은 것이다. 그 순수한 마음을 되찾을 때 비로소 순수한 존재를 알아차릴 수도 보아낼 수도 향유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비로소 행복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동물을 매개로 사실은 상실한 유년을 되찾고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는 기획을 의미한다고 해도 좋다. 상실한 상상계의 복원을 꿈꾼다고 해도 좋다(자크 라캉).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무의식보다 깊은, 원형적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칼 융). 그러므로 어쩌면 상실의 시대를 사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를 지향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사과에서 꽃이 핀다. 토끼의 귀에서 글라디올러스가 피고, 사슴의 뿔에서 백합이 핀다. 휘날리는 벚꽃 천지를 배경으로 풍선을 매단 양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작가의 분신이며, 작가의 욕망이 투사된 대리 수행자들이다. 꽃 자체가 동물들과는 또 다른 행복의 아이콘으로 덧붙여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고, 작가의 사적인, 그러면서도 모두가 공감할 만한 알레고리적 서사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를테면 토끼의 긴 귀를 꽃으로 대신한 것은 자신을 헐뜯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도 마침내 좋은 소리만 듣자고 작정한 변심의(그러므로 어느 정도 자신을 내려놓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고, 사슴의 뿔을 대신한 꽃은 권력과 투쟁의 도구를 화해와 행복의 표상으로 바꿔놓은 것일 수 있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양들은 세상의 중력(아마도 세상의 논리와 이해관계)에 구애받지 않는 자신의, 그리고 예술가들의 자유 영혼을 상징할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고 낯설다. 알만한 모티브와 함께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묘사가 친근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현실과 함께, 모티브와 모티브, 공간과 공간, 상황과 상황의 이질적인 결합이, 의외의 조합이 낯설다. 이를테면 토끼의 귀와 꽃의 결합과 같은. 사슴의 뿔과 꽃의 조합과 같은. 하늘을 나는 양과 같은. 낮과 밤이 공존하는 것과 같은. 시간과 시간 그러므로 고대 유적과 현재가 공존하는 것과 같은. 감각적 현실과 허구적 사실처럼 어긋난 시공간이 하나의 화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과 같은.
회화에 관한 한 모든 상상력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그리고 그 현실이 반드시 감각적 현실과 비교될 필요는 없다는 회화적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지만, 그 증언에도 미술사적 배경은 있다. 말하자면 그림에 나타난 이질적인 결합과 의외의 조합이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 그러므로 사물의 전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주지하다시피 초현실주의는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을 억압된 현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이라고 봤고,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우회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장으로 봤다. 무의식이 공연되는 꿈의 극장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 극장에서 욕망은 자기만의 탈주선을 따라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재편되고 재구성된다. 이를 통해 의외의 비전을 열어놓는 것이지만, 그 자체 허무맹랑한 것이라기보다는 억압된 현실이 표출된 것이란 점에서, 잠재적인 현실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현실의 표출이란 점에서 현실성을 얻는다.
관련해서 작가의 <antic and utopia>라는 제목이 주목된다. 이런저런 주제와 제목이 있지만,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먼저, antic을 보면, 색다른, 이상한, 괴상한, 이라는 의미가 있다. 어원상으로 골동품을 의미하는 antique이라는 말이 유래한 뿌리 말이기도 하고, 의미상으로 성 소수자를 뜻하는 퀴어(Queer)와도 통하는 말이다(수전 손택). 자신과 다른 타자에 배타적인 세상의 인심을 엿볼 수 있고, 상식과 선입견과 편견으로 무장한 세상의 벽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작가는 진즉에 세상과는 다른 종류의 비전이 있고 세상이 있음을 인식했고, 그 인식을 자기만의 회화적 현실이며 사실로 재현했다. 다르게 보는 방법을 제안하는 기술 그러므로 인식의 전환에서 예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존 버거의 예술론에도 부합하는 대목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렇게 보아낸 다른 비전을 다른 세상을 작가는 utopia로 풀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다만 사람들의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장소, 허구적 장소, 없는 장소, 부재의 장소다. 감각적 현실과 허구적 사실이 모두 현실이 되는 회화적 현실 혹은 사실 자체를 유토피아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만의 회화적 실재, 그러므로 자기가 구축해 놓은 비전의 세상을 통해 이상한 동물들이 친근한 동물로 변신하는, 동물과 동물로 의인화된 사람(그 자신 동물이기도 한)이 공존하는, 동물이 사람처럼 말하고 웃고 울고 하품하고 꿈꾸는, 그러므로 사람들과 더불어 친구가 되는, 어쩌면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마음이 아니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그런, 사해동포주의를, 행복의 아이콘을, 유토피아를, 현대인을 위한 우화를 그려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