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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 주체의 자리를 마련하는 절대적 타자

이선영

지난 연말연시에 열린 이정민 전은 자신의 고뇌와 욕망, 그리고 분노 등을 솔직한 문체로 드러낸 그림일기 같은 전시이다. 작품들은 조형적인 새로움을 위한 야심보다는 앞으로의 길을 위해 이제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는데 목적이 있다. 삶의 화두가 되어주었던 조각 글들을 전시장의 작은 방에 가득 쌓아 놓은 것은 그러한 목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거기에는 작가가 읽었던 책, 들었던 설교, 불렀던 노래 등이 적혀있다. 글자라는 매개는 모호한 현대 미술의 어법을 넘어서, 관객과 좀 더 용이하게 소통하고자 하는 선택이다. 그러나 글이라고 해서 이미지에 비해 늘 상 그 의미가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이정민의 작품에서 이미지와 글의 중간 형태이며, 완결되지 않은 조각 글들은 말하기의 어려움, 재현의 난점, 그와 관련된 주체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글자들은 의미가 분명하면서도 숨겨진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작가는 드러내면서 감추기, 감추면서 드러내기라는 전략을 쓴다.

가령 작품 [못 알아보도록 쓴말](2011)에는 낯선 외국어로 ‘저를 사랑해 주세요’라는 문장을 적어 놓았다. 뒤죽박죽 쓰거나 거꾸로 쓴 글, 여러 층으로 겹쳐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글 등은, 굳이 의미를 찾는 자에게만 열려 있다. ‘꽃도둑’이라는 전시부제는 타자들로부터 얻은 ‘아름답고 깊이 있는 생각들’을 자기 것으로 취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단지 자신에게 감흥을 준 것을 훔치고 베끼는 것을 넘어서, ‘내 마음에 심어져 내 것이 나온다’는 희망사항 또한 포함한다. 작가 노트에는 자신의 작품이 ‘가지지 못해 서글프기만 했던 내 현재를 마주’하면서, ‘그렇게 거짓되고 모자란 나를 마주하는 일’임을 밝힌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비추어보는 일은, 그것이 동시에 공개된 장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기에 부끄러운 일이다. 작가는 ‘창피하고 보고 싶지 않은 것’도 거의 전시했다고 밝힌다. 천정 가까운 모퉁이 위에 보일 듯 말듯 붙여놓은 글자 작품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요](2009)는 이 전시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자아에 집중하는 이정민의 작품은 단순한 나르시시즘이나 자기연민을 넘어서, 종교적 지향과 밀접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녀가 믿는 기독교의 신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보다도 자아이기 때문이다. 초월적 신을 향하는 그 자아는 인간을 죄의식과 불안에 빠지게 하지만, 그것이 개인적으로, 역사적으로 진보라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J.G. 아라푸라는 [불안과 평정으로서의 종교]에서 불안과 평정이라는 키워드로 서양과 동양의 종교, 더 정확히는 종교의 확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정신의 두 영역들을 비교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기독교는 불안을 낳는 대표적인 종교이다. 저자에 의하면 정신적인 삶의 기독교적 표현은 종말과 그 종말의 지연, 그것에 포함된 기대와 고통, 그리고 구원에 결정적으로 관련된다. 이 존재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지는 의식과 이성을 고양시킨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세계관을 ‘존재는 무한자아 유한자, 그리고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사이에 태어난 아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지속적인 투쟁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신의 통일성이 강력하게 주장되어 온 곳이면 어디든지 간에 인간의 존재는 주어진 어떤 것, 즉 완전 타자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진정한 부여자인 신의 이유 없는 행위의 결과로 이해된다. 기독교적 주체에게 죄의식, 타락, 양심은 뗄 수 없는 문제이다. 기독교에서 죄의식은 ‘신의 은총의 결핍’이다. 당위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는 늘 상 균열을 일으킨다. 아라푸라는 기독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심적인 개념으로, 죄의식을 지목하며, 절대 타자와 마주한 개인의 불안은 양심과 죄의식으로 나타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정민의 작품에서 자신을 비추는 고백적인 작품에 내재한 것은 멜랑콜리와 사랑, 욕망 같은 파토스이며, 이 파토스는 세속적인 것만큼이나 종교적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작가이자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자의 사고와 감성에 깊이 새겨져 있다. 나란히 배열된 작품 [말해주세요](2009)와 [안다구요](2011)는 18에 꽃이 새겨진 이미지와, 십자가에 꽃이 있는 이미지를 대조했다. [안다구요]에는 산상수훈 같은 성경 내용이 담겨 있고, [말해주세요]에서 작가는 18이라는 욕 뒤에 ‘님의 침묵’을 밑에서부터 못 알아보게 적어 놓았다. 그것은 ‘아무리 기도해도 대답이 없는’ 신을 원망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주체의 갈구에 대한 신의 침묵은 멜랑콜리를 자아낸다. 신이 인간사에 무관심하다고 느껴질 때, 종교인은 고뇌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정민의 작품에서 종교적 멜랑콜리가 집약된 도상은 눈물방울이다.

세로로 배열된 작품 [열쇠](2011), [부자청년](2010), [전화](2009)는 세 가지 눈물을 보여준다. 눈물방울 아래에는 글자들이 있다. 그것은 구원을 요구하는 자의 탄식과 회개의 눈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녀가 궁극적으로 흘리고 싶어 하는 ‘영적인 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연민에 가득한 눈물도 있다. 그것은 개인을 더욱 곤궁하게 하고 외롭게 하는 물질문명 속에서 살아가며,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세적 욕망을 초월하지 못하는 인간을 반영한다. 고통은 무기력을 넘어 분노를 낳는다. 이정민의 작품에 많이 나오는 18이라는 숫자는 분노가 병이되고, 그것이 다시 우울을 낳는 과정을 보여준다. 천상을 향하는 초월은 승화와 밀접 하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말도 있듯이, 승화는 추락이나 퇴행 또한 전제한다. 드높이 솟은 수직의 십자가에는 천상으로의 고양과 지상으로의 추락이라는 이원구조 사이의 긴장과 드라마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작품 [질문](2010)은 유채색 꽃 배경에 무채색으로 다양한 18들이 자리한다. 18은 비가 되어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것은 ‘알고 싶고 외쳐도 더 미궁 속으로 빠진’ 우울로 축축하다. 18이 나오는 작품 [18 꽃]에 대해 ‘18꽃은 책기지심(責己之心)에서 비롯된다. 욕(慾)되어 욕(辱)된 18꽃은 나에게 주는 꽃이다’라고 작가 노트에서 밝힌다. 18은 대부분 스스로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나오는 욕이지만, 그나마 자신이 가장 괜찮아 보일 때는 그림을 그릴 때라고 한다. 이정민에게 그림은 그 자체가 ‘묵상이고 기도이며 예배’이다. 성스러운 도상인 십자가 뿐 아니라 세속적인 욕설에조차 등장하는 꽃들은 종교적 의미가 있다. 작가에 의하면 꽃이 피는 것 자체가 자기 맘대로 필 수 없다. ‘자연에 따라 피게 해주시는 때가 다르다. 나를 쓰시는 것도 이 땅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거기에는, 툭하면 18을 내뱉는 미성숙한 자신을 ‘알맞은 때에 알맞은 모양으로 꽃을 피워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젊은 여자이기도 한 작가에게 파토스는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색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연에 대한 내용의 유행가가 담긴 [조금 더 볼륨을 높여 줘](2011), 교태스러운 형태로 핑크빛 꽃향기까지 물씬 풍기는 글자 작품 [오빠](2010)는 육체적 욕망 또한 서려있다.

전시된 작품들은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작가는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 자체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정민의 작품에서 단편은 전체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포함한다. 작품들은 제작 연도도 제목도 모두 다르다. 전시부제와 같은 작품 [꽃도둑](2011)은 여러 크기의 작품 22개의 각을 맞추어서 설치했다. 배치 방식에 따라 외곽선은 변화무쌍하게 변할 것이며, 관객들은 글자 작품들의 순서를 마음대로 맞추어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소우주적 면모가 있으면서도, 종교적 세계관에 특징적인 존재의 대 연쇄처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단자적 세계에서, 신은 부재를 채워줄 활동적이고 충만한 존재로 간주된다. 충만은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체험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이상화된 대타자는 숭고하고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으며, 나에게 걸 맞는 훌륭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이때 주체는 자신을 이상적 타자와 동일시함으로서만 존재한다. 자아가 대타자에게 품고 있는 사랑을 통해 그 자아를 내포하는 자아의 이상은 자아를 통일하고 자아의 욕동들을 억제하며, 그것으로 하나의 주체를 만든다. 정신현상은 타자와 연결된 열린 체계이며, 또 그러한 조건에서만 다시 새로워질 수 있다. 사랑은 주관성을 고양시키지만, 동시에 고독을 낳는다. 기다림은 이전에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불완전성을 고통스럽게 느끼도록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은 불확실해져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낳는다. 사랑의 강생 상태에서 주체는 육감적으로 그리고 이상적으로 그와 결합한다. 그것은 정신이 육신이 되고, 육신이 말씀이 되는 강생의 체험이다. 열광적이면서도 우울한, 일자를 향한 타는 듯한 감수성은 종교적이며 예술적이고, 또한 관능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종교와 예술, 그리고 에로티시즘의 접점이 있다.

이정민의 작품에서 사랑의 언어는 은유적이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언어가 직설적으로 옮기려 하면 부적절하고 암시적이며 불가능한 것이 되어 수많은 은유들로 흩날려간다고 한다. 사랑의 시련은 언어의 시련, 즉 언어의 지칭력과 의사소통 능력에 대한 시험이다. 스스로와, 그리고 타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이정민의 작품은 사랑하는 대상이 주체의 은유임을 나타낸다. 이미지보다는 언어가 두드러진 그녀의 작품에서 주체가 구성되는 상징적 세계는 재현의 위기가 폭발 또는 누수 되는 장이다. 이 장의 역학관계는 라깡을 필두로 한 현대의 정신분석학에서 개진된 바 있다. 크리스테바는 [새로운 영혼의 병]에서 대화자의 논리적 및 규범적 규칙에 따른 담화연습을 상징계(symbolique)라고 부른다. 그리고 육체의 이미지, 타아와 타인의 이미지들을 결집하고 원초적 과정들을 이용하는 투입, 즉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자기와 동일시하는 과정과 투사로서의 동일화 전략의 재현을 상상계(imaginaire)라고 부른다.

상상계는 어린아이들에게 제안되었던 재현의 놀이를 통해 모든 종류의 동일화를 결집한다. 상상력은 자아에 관한 이미지들의 만화경이다. 이 이미지들로부터 발화하는 주체가 생긴다. 상상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의미, 혹은 허구로 이루어진 작품의 의미로 이해되는 상상계는 언어학적 의미작용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규범 및 논리와 분리될 수 없다. 우울증은 상징계의 부정으로 특징지어진다. 우울증과 언어능력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정서의 정신적 표본들을 언어기호로 옮기는 것의 불가능성을 예시한다. 이정민의 작품에서 주체를 구조화하는 것은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정신적 재현의 무능에서 영혼의 병이 생겨난다고 본다. 정서와 재현 간에는 분열이 있다. 그래서 언어이기도 한 작품은 상징계의 간청과 욕망의 간청 사이에서 타협하려 한다. 하나는 체물질에 가깝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재현에 가깝다. 그 무엇이든 멜랑콜리의 색채가 짙다.

글자의 비중이 높은 이정민의 작품 언어에는 우울증 환자의 증후가 있다.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우울증 환자의 말은 반복이 많고 단조롭다고 지적한다. 말을 잇기가 불가능해서 문장이 중단되고 소진되어 멈춘다고 본다. 행위와 연쇄도 실현되기에는 더 이상 시간이나 장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고통에 얽매어 더 이상 연쇄를 이끌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행동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의미는 모호하고 애매하며 공백이 많아서 거의 침묵에 가깝다. 말하자면 그는 이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고, 그래서 그는 아무렇게나 말을 하고, 그는 자기 말을 믿지 않으며 말을 한다. 말하는 존재는 시간 속에서 지속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단절, 포기, 불안을 요구한다. 정동의 과잉은 새로운 언어들, 즉 기이한 연쇄, 개인 언어, 시적 언어를 만든다. 멜랑콜리는 기호해독의 불능에서, 의미의 상실에서 끝난다. 내가 더 이상 번역하거나 은유로 표현할 수 없을 경우 나는 침묵하고 나는 죽는다. 이상적인 경우 말하는 존재는 자신의 담론과 일체를 이룬다.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 의하면, 멜랑콜리 환자는 자기 모국어에서도 이방인이다. 우울증 환자의 말은 외국어로 다듬어진 아름다운 외관처럼, 하나의 가면이다. 말을 한다는 것, 자신을 조정하고 상징계의 활동인 합법적인 허구 속에 정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법적인 정착의 힘듬, 또는 불가능성은 잃어버린 욕망의 대상을 일깨운다. 이정민의 작품에서 중간에 끊긴 조각글들 사이의 간극은 상징계의 연속성에 난 균열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간극과 균열에 멜랑콜리가 있다. 크리스테바는 멜랑콜리의 의미가, 자신을 의미하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삶을 상실하는 심층 고뇌라고 본다. 이 의미는 상궤를 벗어난 감정 상태이다. 고통은 묘사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영감, 눈물, 단어들 사이의 여백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일견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도상과 언어로 구현된 이정민의 작품에는, 다의성과 애매성이 두드러진다. 그녀의 작품은 개인화의 드라마가 행해지고 있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밀고 당김의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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