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전시비평〕
전현전 선, 2012. 5. 4-5. 22, 옆집갤러리
상상으로 여는 ‘어른 동화’
김성호(미술평론가)
전현선의 회화는 텍스트가 비어있는 동화책이다. 거기에는 이국적인 공간과 낯선 과거의 시간이 정체불명으로 뒹군다. 게다가 거기에는 할머니, 소녀, 늑대, 토끼, 멧돼지 등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로 충만하다. 동화(童話)의 시공간을 살고 있는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서로와 서로에게 무언의 메시지들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역할들을 만들어나간다.
“누가 주연이고 누가 조연일까?”
전현선, 마지막 산책, watercolor on canvas, 100 x 100 cm, 2012,
가상의 등장인물들 사이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말풍선의 여백’ 안에 텍스트를 적어 넣음으로써 주,조연을 캐스팅하고, 모호한 사건들을 구체화시키는 이들은 다름 아닌 관람객들이다. 늑대와 할머니 사이에 위치한 테이블 위에서, 때로는 돌멩이처럼 떠다니는 구름들 위에서, 때로는 빽빽한 수풀 위에서, 전현선의 말풍선은 관람객을 기다린다. 무의식 속에서 잠자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되살려 자신의 말풍선 안에 이야기를 담아달라고 말이다.
전현선, 비밀스런 만남_A Secret Meeting, watercolor on canvas, 90×90cm, 2011
그러나 작가 전현선이 《Road to Endless Opposites》라는 전시부제를 통해서 의도하고 있듯이, 관람객들이 채우는 ‘말풍선’안의 텍스트들은 제각기 다른 것이다. 분명코 그것들은 끝없이 갈라지거나 맞부딪히며 어딘지 모를 유목의 공간으로 정처 없이 이동한다. 정체불명인 상태로 이동 중인 그녀의 ‘어른 동화’는 따라서 희망만은 포기하지 말아달라는 애틋한 청원이며 절망과 아픔의 기억을 함께 나누자는 공유의 제스처가 된다.
전현선의 회화는 대립과 긴장, 모략과 음모, 배신과 복수, 폭력과 잔혹함이 뒤섞인 ‘어른의 세계’를 은유하는 동화이다. 생각해보자.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스토리텔링이 교육과 계몽을 목표로 하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의 전형이라면, ‘악에 대한 열린 결말’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의 전형이다. 그것은 현실계로부터 탈피시켜 상상력 가득한 비현실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전현선, 별이 유난히도 반짝거렸던 밤, watercolor on canvas, 80.3 x 65.0 cm, 2011.
작품을 보자.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배가 갈라져 죽어있고 그 주위에는 표정을 짐작할 수 없는 왕비 혹은 여왕인 할머니와 공주로 보이는 소녀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만족스러운 결말〉이란 제목은 우리로 하여금 이 ‘잔혹 동화’ 속 두 주인공의 알 수 없는 표정이 숨기고 있던 감정의 차원을 비로소 알게 만든다. 비현실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와 같은 사건은 그녀의 작품에서 하나의 영화적 시퀀스처럼 포착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그것의 내러티브를 상상하게 만든다. 하나의 사건은 작가의 선언대로 이미 ‘만족스러운 결말’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사건의 징후를 낳기에 족하다.

전현선, 만족스러운 결말_A Gratifying Ending, watercolor on canvas, 72.7x 91cm, 2011
전현선이 캔버스에 수채화를 사용하는 방식은 이러한 사건의 징후들을 연쇄시키는 그녀의 동화적 내러티브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수분의 증발과 자기 중합으로 건조된 수채화의 엷은 물감 층이란 물과 만날 때면 언제나 다시 풀어지면서 새로운 물질의 침투를 용인하기 때문이다.
전현선, 하이얀 밤, acrylic on canvas, 116.8 x 91.0 cm, 2011.
도망치듯 걷고 있는 소녀의 뒤편에서 사람처럼 걸어가고 있는 늑대는 또 무엇인가? 의인화된 늑대일까? 늑대의 껍질을 입은 사람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전현선, Untitled, watercolor on canvas, 80.3 x 65.0 cm, 2012.
전현선, 숲속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watercolor on canvas, 145.5 x 112.0 cm, 2011.
그녀의 작품에서 의인화된 동물들은 사람의 분신인 비현실계의 페르소나(persona)처럼 그려진다. 페르소나란 용어가 원래 ‘가면’을 의미하듯이, 그녀의 의인화된 동물은 한 주체가 분절된 또 다른 자아의 페르소나이자, 인격을 입은 대화의 상대자이다. 그것은 인간 아닌 또 다른 주체이자 육화된 인간으로 나타난다. 그런 면에서 의인화된 동물들은 그녀의 ‘어른 동화’에서 현실계와 비현실계를 잇는 인터페이스이자 관객을 초대하는 또 다른 주연이 된다. ●
출전 /
김성호, “상상으로 여는 어른 동화”, 『퍼블릭아트』, 2012. 6월호, p.138, (전현선 전, 2012. 5. 4~5. 22, 옆집갤러리)
이미지 출처 /
옆집갤러리, 네오룩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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