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정원_오래참으사
창조의 빛과 회복의 상상력 – 성경적 관점에서 읽는 정원의 회화
'환상정원'은 단지 자연에 대한 회화적 해석을 넘어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와 긴밀하게 호응하는 시각적 묵상이다. 작가는 병든 문명 속에서 ‘정원’을 다시 심는다. 그것은 ‘에덴의 회귀’를 꿈꾸는 상징이자, 창세기의 창조 질서와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영적 생태계’다.
창세기의 정원 – 창조 질서의 시각화
‘정원’은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조성하신 최초의 공간이다. 질서 있고 조화로운 세계, 인간과 자연이 친밀한 관계를 맺는 생명의 거처였다. 환상정원속 회색정원은 이 창조된 질서의 흔적과 파괴된 균형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림 속 식물들은 흙이 아닌 시멘트 위에 놓여 있다. ‘낡은 의자’와 ‘회색 도시’는 타락한 문명의 상징이며, 이질적인 장소에 놓인 초록 화분은 그 속에서도 계속 자라나는 생명의 끈질김을 암시한다. 창조의 조화는 인간의 탐욕과 무관심으로 균열되었지만, 작가는 그 속에서 여전히 신과 인간의 회복을 향한 가능성을 본다.
“빛이 있으라” – 신이 주신 빛의 회화성
성경의 창조는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이 빛을 시각예술의 핵심 요소이자, 신의 임재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작품 속 ‘빛’은 단순한 조명 효과를 넘어서, 혼돈 가운데 질서를 회복하고, 무(無)로부터 세계를 일으켜 세우는 신적 에너지로 기능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구멍’과 ‘균열’은 결핍의 시각화인 동시에, 새로운 공간으로 나아가는 ‘창조의 문’이 된다. 이는 루치오 폰타나의 찢어진 캔버스처럼, 닫힌 세계에 열린 차원을 부여하며,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혼돈을 가르듯 세계를 열어젖히는 이미지로 해석된다.
타락 이후의 정원 – 회복의 징후로서의 예술
창세기의 정원은 곧 타락과 함께 폐허가 되었고, 인간은 신과 단절되었다. 그러나 성경(베드로후서3장)은 이 신과의 회복을 종말론적 약속으로 다시 제시한다. 태초의 에덴의 정원은 이미 상실되었으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정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다.
작품 속 ‘초록 화분’은 단절된 창조질서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은 생명의 잔여물이며, 회복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는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창조주가 허락하신 재생의 은혜이며,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영혼구원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조각'이다.
예술, 예언적 회복의 언어
'환상정원'은 오늘날의 병든 세계에서 인간이 자연과 신과 맺어야 할 새로운 언약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종말론적 절망으로부터 탈각하여, 신적 회복의 청사진을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작가는 냉소와 해체가 아니라, “빛의 회복”이라는 복음적 전망을 그린다.
그림 속 정원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처럼,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곳이다. 그렇기에 이 정원은 상상이 아니라 ‘희망의 예언’이다. 회화는 하나의 기도처럼, 깨어진 세상을 향해 ‘다시 보기’와 ‘다시 심기’를 제안한다.
'환상정원_오래참으사'는 창조와 타락, 회복이라는 성경적 구조를 시각예술 언어로 재현한 신학적 작업이다. 이는 단순한 미학을 넘어, ‘정원’이라는 상징을 통해 창조 세계를 회복하려는 신적 뜻에 대한 예술가의 응답이자 오래참으심이다.
이 회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정원을 가꾸고 있는가?
그리고 누구의 빛으로 그 정원을 밝히려 하는가?

보르_스스로자멸하리라, 162.2×260.6cm, Acrylic on wood , 2025

비오트라늄_숨은진실, 162.2×130.3cm , Acrylic on wood, 2025

마른 뼈의 환상, 89.5×130cm, Acrylic on wood, 2024

일 점 일 획, 53.0×45.5cm, Acrylic on wood, 2024

복음_영혼구원, 53.0×45.5cm, Acrylic on wood, 2025
하 빛 개인전 「환상정원: 오래 참으사」
김노암 | 미술평론
1. 신앙의 근원에서
‘환상정원: 오래 참으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지닌 하빛 작가의 영적 사유와 내면적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업의 중심에는 신의 인내와 인간의 구속(救贖), 그리고 그 사이를 매개하는 예술적 환상(illusion)의 세계가 있다. 작가의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과 상징, 그리고 문장들은 단지 시각적 장식이 아니라 신앙과 예술이 교차하는 존재론적 실험의 흔적이다.
세속의 가치가 압도하는 시대에 개인의 신앙을 예술적 실천과 조화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하 빛의 회화는 바로 그 경계에서 작동한다. 19세기 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후, 인간은 신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의 의미를 창조해야 했다. 하빛의 작업은 이 ‘신의 부재 이후의 예술’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재의 시대 속에서도 신의 현존을 포기하지 않는 예술의 고백이다.
삶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내포한다. 고통이 삶을 낳았는지, 혹은 삶이 고통을 낳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술은 그 둘이 분리될 수 없음을 오래전부터 증언해 왔다. 예술가의 창작 행위는 단순한 미적 생산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는 영적 실천이다. 하 빛의 작업에서 보이는 화면의 긁힘, 절단, 부조의 흔적들은 모두 ‘상처의 형식학’이라 부를 수 있다.
상처 없는 창작은 불가능하다. 상처를 견디는 것은 곧 창작의 전제이자 신앙의 증거이다. 작가가 그리는 빛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라, 상처와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내면의 부활’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참음’은 단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사이의 간극을 인내로 메우는 영적 수행이다. 하 빛의 예술은 바로 그 인내의 형식이며, 세속의 소음 속에서도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 기울이는 예술가의 자세와 태도를 중시한다.
2. 타락과 구속의 이미지들
작가의 노트에 등장하는 구절은 이번 전시의 중심 서사를 드러낸다.
“소돔과 고모라_인간의 타락, 대한민국은 휴전 중인 분단국가로 해결해야 할 여러 과제들을 안고 있다. 이는 성경에서 말세에 일어나는 한 현상으로, 인간의 타락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빛의 회화는 ‘타락’과 ‘회복’의 긴장 구조를 반복적으로 호출한다. 「소돔과 고모라」 연작에서 보이는 무너진 도시와 뒤틀린 인체의 형상, 「낡은 벤치」, 「씨앗」, 「연명」, 「산업폐기물」 등의 제목은 모두 도덕적 붕괴와 재생의 모티프를 공유한다. 작가에 따르면 ‘정원’은 더 이상 생명의 근원이 아니다. 그것은 이상이 붕괴된 문명의 유산이며, 시멘트 위에 놓인 인공 식물과 잎사귀 모양의 구멍으로 상징되는 심리적·생태적 파편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정원이 아니라, 현재에는 부재하는 ‘환상’으로 표현된다. 나아가 기독교적 의미에서 ‘에덴’을 뜻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에덴’ 밖으로 쫓겨나 방황하는 인류의 존재론적 사건을 상기시킨다. 나뭇잎 형태로 텅 빈 부분들은 인간 영혼의 결핍이기도 하다. 이는 결핍과 욕망으로 점철되는 비극적 인류사의 드라마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대형 콜라주 작업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회화와 부조가 결합된 혼성적 화면을 통해 평면 위에 시간의 층위를 새긴다. 깎고, 쌓고, 덧입히는 과정은 단순한 조형의 변주가 아니라 죄와 속죄의 반복적 순환을 암시한다. 명암의 대조는 단순한 색채의 대비가 아니라 ‘빛과 어둠’의 신학적 변증법이다. 그 속에서 버려진 의자, 떨어진 나뭇잎, 빛과 그림자는 모두 침묵 속의 기도문처럼 화면을 채운다.
대표작 「환상정원_버려진 문명」은폐기된 의자를 중심에 두고, 인류의 욕망이 쌓아올린 바벨탑을 은유한다. 바벨탑은 신의 질서를 거슬러 오르려는 인간의 교만을 상징한다. 하 빛은 그것을 문명의 욕망 구조에 대한 윤리적 경고로 변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절망으로 끝내지 않는다. 의자의 표면에 새겨진 한글과 히브리어의 성경 구절은 신의 구속사적 약속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신은 인간을 오래 참으사”에서 상기되는 인내는 신의 성품이며, 동시에 인간이 닮아가야 할 미덕이다.
그 맥락은 「소돔과 고모라」 연작으로 이어진다. 소돔은 단순히 고대의 도성이 아니라 현대 문명의 거울이다. 탐욕과 쾌락, 폭력과 무관심이 구조화된 오늘의 사회를 작가는 ‘현대판 소돔’으로 재구성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빛에게 예술은 설교가 아니라, 상징적 경고와 구원의 가능성을 동시에 품은 예언적 언어이다.
이번 전시에 새로 제작된 대형 콜라주 작업은 인류사의 비극을 압축한 비유적 대서사시로 읽힌다. 전쟁과 기근, 착취와 학살의 이미지는 고야의 「전쟁의 참상」이나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같은 반폭력의 미학적 전통을 잇는다. 그러나 하빛의 시선은 단순한 정치적 고발을 넘어, 인간의 죄성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은총의 가능성을 향한다.
작품 「만찬을 마치고 난 후」는 바로 그 역설의 정점이다. 예수를 배반한 제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제자들, 그 사이의 긴장과 사랑은 인간 존재의 비극과 희망을 함께 품는다. 나아가 신이 부재하는 시대를 예고하는 듯한 연출이다.
3. 비극과 구원의 예술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 존재다. 왜냐하면 그는 신과 인간 사이, 현실과 초월 사이의 균열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하 빛의 작업은 이 균열을 덮지 않고 오히려 그 틈 속으로 들어간다. 비극은 절망이 아니라 구원의 조건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케노시스(kenosis, 비움)’는 그리스어로 ‘비움’ 또는 ‘공허’를 뜻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으로서의 영광과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고 인간의 형상으로 낮아지신 사건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미학적으로 확장되어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첫째, ‘자아의 비움’으로서 예술가가 자신의 주관적 욕망이나 기술적 과시를 내려놓고, 겸손한 태도로 작품 자체의 순수한 본질이나 타자의 고통에 봉사하는 창작 태도를 뜻한다.
둘째, ‘고통의 수용’으로서 완벽함이나 미적 완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고난을 창작의 전제로 받아들이는 실천적 행위를 말한다.
셋째, ‘구원의 미학’으로서 비움과 낮아짐을 통해 오히려 진정한 미적·정신적 가치를 발견하고 관객에게 깊은 영적 감화를 전달하는 예술의 역할을 강조한다.
우리는 하빛 작가의 예술을 ‘케노시스의 미학적 반복’이라 말할 수 있다. 작가의 화면에 나타나는 긁힘, 절단, 부조의 흔적이 바로 자기를 내려놓고 고통을 짊어지는 영적 비움의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며, 타자의 고통을 짊어지는 회화적 행위이다. 예술이 즉각적으로 사회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내면, 감정, 영혼의 층위에서 서서히 변화를 일으키는 ‘영적 감화’를 가능하게 한다. 하 빛의 작품 세계의 미학적 중심은 여기에 있다. 그녀의 작품은 미학적 형식의 문제를 넘어서 신앙과 존재, 윤리와 공동체의 문제를 한 화면 안에 교직(交織)한다.
모더니즘 이후 예술은 종교로부터 분리되었고, 신앙은 사적 영역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하빛의 예술은 이 단절을 다시 잇는다. 그것은 교리적 종교미술이 아니라 현대미술의 언어를 통해 다시금 신학적 사유를 복원하는 시도이다. 그녀의 회화는 결국 하나의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인류의 비극에 대한 연민의 시학이다. 인간이 개인으로 고립되지 않고, 공동체로서 서로를 염려하고 돌보는 관계 속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 빛의 ‘환상정원’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그곳은 신이 인간을 ‘오래 참으사’ 여전히 사랑하듯, 인간 또한 서로를 오래 참아내는 공동체적 구원의 풍경이다.
하빛의 「환상정원: 오래 참으사」는 신앙의 내면성과 현대미술의 실험성이 만나는 드문 예다. 그녀의 회화는 성경의 언어를 빌리되, 그것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해석한다. 고통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지만, 예술은 그 고통의 심연에서 ‘빛의 신학(theology of light)’을 다시 세운다. 하빛의 작품은 바로 그 빛을 바라보는 ‘영적 회화(Spiritual Painting)’의 가능성을 증언하고 있다.

Ha Bit, 하 빛
Education
1993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Solo 29회
개인전, 기획전, 초대전
Group 100여회
국ㆍ내외 단체 기획전, 아트페어 등등
Possession of works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정부미술은행
삼성 카드사, 올포랜드, 피엔지플랜, 성운파마코피아, 북경 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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