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비평의 개척자 이경성
대담 정리: 김현숙(미술사가)


이경성 선생께서는 우리나라미술이 근대를 거쳐 현대로의 길을 걷는데 동참해오셨습니다. 동참이라기 보다는 앞장서서 지휘해 왔다고 얘기하는 쪽이 옳겠습니다만 그런만큼 오늘 우리의 미술에 영향이 남달랐다고 보이는데, 우선 선생님께서 미술부문에 종사해오신 약력을 간단하게나마 더듬어 주시지요.


제가 태어난 해가 1919년이고 내년이면 팔순이 됩니다. 그러니 그동안 내 생애의 공간자체가 우리나라로서는 근대기이고 또 현대기인 셈이지요. 그리고 철들면서부터 계속 미술쪽 일에 관여하다보니 아닌 게 아니라 박물관장, 미술관장, 미술대학 교수, 평론가, 학자 등으로 불리워왔지요. 그러나 오늘에 돌이켜보면 왠지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 같지 않고 과연 내가 무엇이었나 회의가 들기도 하여 오늘 이 자리가 부담스럽군요.

법대 출신의 미술평론가
미술계의 원로로서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길은 거의 모두 선구적인 것에 해당 하는 것이었고 모든 분야에 초석을 깔아놓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니 송구스럽습니다.
후학들이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같아 죄송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매우 뛰어난 심미안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요, 작품을 보는 눈이나 전시 디스플레이에 대한 감각이 남달라서 현대미술관 관장 시절 선생님이 한 번 휘 둘러보고 진열 수정을 한 후면 전시가 새롭게 빛을 발하곤 했던일이 매우 인상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언제부터 미술에 관심이 생기셨는지요?


사실 저는 어린 시절, 글씨 못쓰고 그림 못 그린다고 야단을 맞으면 맞았지 칭찬받은 기억은 없습니다. 미술과의 만남은 매우 우연하게 시작되었습니다.
법학 공부를 하여 판사가 되겠노라고 부모를 설득하였지만, 마음 속으로는 문학공부를 하겠다고 다짐하며 동경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역에 마중나오기로 한 문학하는 친구가 일이 생겨서 그 대신 이남수라는 미술학도가 나를 맞아주었고, 이후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이남수를 따라 열심히 미술관이며 박물관이며 화랑을 다녔지요. 나는 이 사건을 거의 운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법관이 되는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하지않았거든요.
모친 중병소식을 듣고 귀국한 후 징병을 피하기 위해 잠시 경성 지방법원의 서기로 근무했지만 다시 고등문관시험을 치른다고 가족을 속이고 꿈에도 그리던 동경으로 가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등록, 미술사를 공부했습니다.

그 당시 동경화단에 대한 특별한 인상이 남아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김흥수, 조각가 조규봉 등 한국인과 만나면서 배고프고 가난하지만, 정신은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삶을 만끽했었지요. 무엇보다 와세다대학 입학 면접시험 때 만났던 학자 아이쯔 야이찌(會津八一)선생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는 법률을 포기하고 미술사를 택한 나를 격려하면서 조선미술사는 조선인이 직접 다시 써야 한다고 충고했지요.


1997년 김달진, 이경성, 김현숙


박물관 재직시절

단순하게 결론내리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라든가, 선생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아이쯔 야이찌 같은 일본인 인텔리들의 존재가 있어 그나마 인류지성사에 위안이 되지 않았나 싶군요. 그런데 당시 미학 미술사학자인 고유섭 선생과 인천 동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특별한 관계는없었는지요.

동경에 있을 때 서면으로 편지를 왕래하면서 정신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만 애석하게도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마다 고사꾸(洪田耕作)의 通論考古學 등을 읽게 된 것도 고유섭선생의 권고였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종사할 뜻을 굳힌 것도 그 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후에 인천시립박물관장을 하신 일이라든지 우리나라 공예 관계책을 저술하신 계기가 바로 고유섭선생의 영향이군요. 우리나라 최초의 시립박물관을 개관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요.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박물관일을 하고 싶어 궁리하던 중 무작정 군정청교화국장을 찾아갔었지요. 해방후 혼란스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박물관일을하겠다는 청년이 나타나니 기특했던지, 그 자리에서 국립중앙박물관 김재원박사를 전화로 불러내 선처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인천시립박물관 창설을 도와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예산은 하나도 없었지만 미군정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건물을 보수하고 소장품은 인천 향토관의 소장품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으로부터의 작품대여, 그리고 몇몇 사람으로부터 기증을 받아내 가까스로 개관행사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이화여대 박물관 창설이나 홍익대 박물관 창설에도 선생님의 손길이 깊이 관여된 것으로 아는데요.

이화여대 박물관은 김활란 박사의 소장품을 근간으로 하였는데 개관 전까지의 과정에 참여했고 홍익대학교로 이직하여 홍익대 현대미술관을 창설하고 관장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이 때 구입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이중섭의 흰소인데, 이중섭이 일본에 건너갈 여비마련을 위해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개최한 개인전때 5만원을 주고 샀고, 박수근작품도 5만원에 샀던 것으로기억합니다. 그 후 홍익대 현대미술관은 대학기준령에 의해 홍익대박물관으로 개칭되었지요.

국립현대미술관장 시절

해방후 우리나라 근대미술에 관한 논문을 처음으로 발표하셨고 홍익대 미학미술사학과 개설에 앞장서서 근대미술사를 지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의 평론활동을 병행하셨기 때문에 결국 선생님의 영역은 우리나라 고미술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는 전 기간인 셈입니다. 그런데 현대미술관 관장에 취임하시면서는 미술관의 현대화, 국제화에 총력을 가함으로써 근대미술 혹은 전통성을 도외시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네.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국주의의 상혼이 짙은 우리는 전통을 존중하는 의식이 강하고 그 때문에 미래보다는 과거의 것에 더 믿음과 가치를 부여하려 합니다. 이는 타문화로부터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본능적이며 의식적인 반작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지역적인 배타성을 강화시킬 우려도 큽니다. 전통이 창조로 이어지지 못하고 보수의 나락으로 빠지고 마는 경우는 허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1980년대는 이미 세계가 글로벌화되어 문화가 앞장서서 이 조류에 동참할 필요성이 절실했습니다. 결국 저로서는 과거를 돌아보는 쪽보다 미래에 투자하는 혁신적인 정책을 택했습니다. 당시미술관 예산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르기에는 역부족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서구미술 모방문제에 대해서 저는 시각을 조금 달리 하고 싶습니다. 이제 지구는 하나입니다. 고도의 정보화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국가별 차이는 점점 사라지고 문제는 누가 21세기의 정보를 신속하게 흡수하여 자기화하느냐에 관건이 있는 거지요. 한국적 정보화를 고집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취임한 최만린 현대미술관 관장의 근대미술관 창설에 대한 의지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어느 정도 화단의 역사, 미술관문화의 역사가 쌓였고 이제 여유와 자신감을 겸비해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추스릴 단계가 되었다는 반증일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그동안 선생님께서 쌓아오신 국내외의 경험으로 미루어 세계 속의 한국미술의 위상 혹은 전망은 어떻다고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 해 주십시오.

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로비엔날레 커미셔너로서 국제미술계 안에서 한국미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졌는데, 이때 느낀 것이 우리 미술의 수준이 아직 국제적인 세련미를 갖추지는 못했다하더라도 무언가 독특한 내용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소게츠미술관 명예관장을 하면서 일본미술과 한국미술을 가까이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일본화단은 매우 안정되고 질서가 잡혀 있어서 모든 작가의 생활이 어느 정도 평준화되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작가별 차이가 극심한 편이지요. 미술계의 구조 및 유통구조가 탄탄하지 못한 탓이겠고 그만큼 작가로서 살아남기가 어렵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균질화, 평준화된 일본토양보다 한국의 정리되지 못하고 투박한 토양이 현대미술의 혁명성,전위성을 발아시키는데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일본미술이 대체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일률성을 벗어나기 어렵다면, 이에 비해 우리는 거친 토양을 헤치고 힘과 개성을 지닌 다양한 작가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건 일본과의 단순 비교인 경우입니다. 무엇보다 획일화된 사고를 경계하고 창조성과 전위성을 육성한다면 우리나라 미술의 전망은 매우 밝을 것으로 봅니다.

이경성 선생은 1919년 인천에서 태어나, 1941년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부터 1981년까지 홍익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고, 국립현대미술관장직을 두 차례에 걸쳐 역임했다. 세종 문화상, 프랑스 문화훈장을 수상했고, 주요 저서로는 《한국미술사》, 《근대한국미술가논고》, 《한국근대회화》 등이 있다.
가나아트 1997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