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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철이의 <학살, 1951>

이석우





역사묘 일깨욱는 그림 (2)이 한쥐의 작품이라도 남겨지지 ?刻年囑錯?/b>


J 부끄러>遲?잊어가는 시대. 그러3?얼굴은 두 손만으로, 아니 마스크로조차 가릴 수 없는 부끄러움은`있다. 닭순히 한국전쟁에서의 인릭피해만?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물론 3敞의 비교적 짧은 전쟁동안에 죽은 자만 30구만? 큙시 남북한 총인구 3000만곇라 추햏하면 그들만도 1/10이 넘돠다.
G舊嗤?그보다 더 부끄러~?일이 곓다. 민간인학살이 그것이다. 헤아리건데 민간인 학살의 피텍자는 1p0만에 이른다고 본다. 민鼎인학살이란 무슨 말인가. 무장도졑各?민址인을 을이나 예彪된 적으로 보고 이들을 忽해하는`행위이다. 국민보도연맹퓕 20만 삵해, 전주형무소 수감자 1?0명 학살, 황해도 신천의 3만 5츌여명 민2@?죽음, 빨치산 소탕(?+작전 과정에서 비협력, 협력자라는 이유로b죽은 부지기수의 양민. 6/25로 밀문고 9.28로 회복하고 다시 1.4로 후퇴하는b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여러 번 갈弼 적과 동지는 그만큼 많은 이들을 희생시팼다. 여기에 혈연에 기초?증오,「彭≠?자의 분풀이, 정권의 아집`등은 마치 인간이 얼마나÷騈曠?|?있는 지를 보여주는 전毁장을 퉓불케 하였다.
국립현큝미술관 >痔弱諮】?만난 ~학살>은 그 역사의 증언 뿐 아니띳 뛰어난 작품성에서 나를4母?놀v箚?했다. 눈물 머금은 쇼릿발 같첬 달빛 아래 산자와 죽은!자 모두#슬픔과 체념으로 깊이 잦옰들어 잉다. 흥건한 핏속에 누워잉는 시체5湧?오히려 달빛에 더 반昏되고 입다. 학살당한 어린애까지 포함되어 있는 켟 시체들궩 막대기로 흐집으며 확일해야하퀯 산자의 찢어지는 가슴. 3陋孤?랍떳이 낮의 해 아래가 아니라 어둠b속에 숨기라도 하듯 공포와 슬픔익 뒤엉키는 순간. 그것이 r藉像?죒1909년 5월 3일’의 학살s?다르다. 어둠에 묻힌 듯한 장면B?그렸퀰데도 원s? 공간?형태감이 뚜렷하다. 차?0르는 슬파을 이곳에 담았다고 할까. 우리 歇족의 한은 이렇게 쌓여왜다.
죈철이. 그는 많은 이야기風 품고 s琉꼴낮?순전히 살다간 팭람이다.c마띠에르 실험을 끊임없익 시도했存, 재야작가로, 명리와 ?욕을 멀覇하며 제자를 사랑하였다. 숙직실을 화실 {絶?작쓿을 해오던 그는 정년하는'날 붓 됴 자루를 들고 나와 그림읗 길을 캻겠다 다짐하여 동료들을 嚆연하게`했다.
이 참혹한 학살은 이제야 그 얼굴을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 모두가 이 일을 덮어두고 침묵해 왔다는 점에서 나도 너도 공범자일 터이다. 이 일을 그는 레드 콤플렉스의 어두운 공포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붓으로 증언했다. 현대미술 50년사에서 이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 이 작품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현실 삶에서 가슴저리도록 외면당했지만, 이 한 점의 작품으로 그는 그의 몫을 다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 이철이 (1909-1969)를 취재하는 중에 나는 재미있는 일을 만나게 되었다. 일본 유학 후 이철이는 귀국하여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대동아전쟁시절 모든 것이 궁핍하여 약조차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산후 조리도 여의치 않아 불과 몇 년 만에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둔 아들의 이름이 이상국(李相國)이다. 이철이는 상처 후 줄곧 독신생활을 했기 때문에 혈육은 아들 하나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철이가 대동중학교 미술교사 시절 훗날 화가가 된 제자 이상국(李相國)을 만나게 된다. 아들과 동명 이인인 셈이다.본인은 평소 알고지내던 화가 이상국이 이철이의 아들인 줄 알고 전화를 했더니, 그는 제자이고 아들은 사업가인 이름이 같은 이상국이라는 것이다.
그의 제자 사랑은 쏟아부은 듯 뜨거웠다. 석고나 미술재료를 서슴없이 사다 주는 것은 물론 예술가로서의 진로지도에 확고한 방향을 제시했다. 제자 이상국은 ‘선생님은 저에게 미술 그 자체’ 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안타까움은 이렇다.

한 작가가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출세할 때 뒤따르는 여러 가지 요건들-한 인간으로서의 성격이나 처세술, 시대적 상황 등이 선생님에게는 한가지도 충분히 만족할 만 한 것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살다가신 시대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도 감내하기 어려웠던 삭풍, 격동의 시대였고, 선생님의 비타협적인 순수함과 고집은 그 점에서 더욱 멀리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이상국, 치열했던 예술혼, 스승의 고혼 앞에서


많은이들이 세상의 영욕을 찾아 대학으로 화랑으로 진입하고 있을 때도, 그는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그곳에 묻혔다. 한때 미술실도 갖는 듯 했었으나 시대와 더불어 입시 밖으로 밀려나 실기실은 없어지고 숙직실이 자신의 미술실이 되었다. 그때문에도 그는 숙직을 도맡아 하며, 그 곳에서 그림을 그렸고, 이상국이 언제나 곁에 있었다. 그런중에도 그는 루오, 칸딘 스키, 세잔느, 몬드리안을 가르치기를 잊지 않았다. 제자들이 학비를 내지 못할 때 자신의 월급을 가불해서라도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다. 소설가 한성철은 학교를 떠나던 이철이의 그날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다.

선생님의 얼굴엔 무슨 영웅 따위의 기만적인 정열도 보이지 않았고, 악의 남루한 구걸에 시든 후줄근한 미련도 드리우지 않은 너무도 소박하고 엄청나게 관대한 자연의 음영만이 서린듯 싶었습니다
- 한성철, 병실에 계신 “싹공” 선생님전


‘싹공’이란 그의 별명은 숙제를 한번도 해오지 않은 학생에겐 가차없이 0점을 준데서 생겼다. 그는 세상에 부대끼며 살았지만 결코 미지근한 타협으로 서로의 자존심을 구기지 않았다. 또다른 그의 별칭은 페스탈로치 였는데 거기에는 악에 대한 거부와 짙은 사랑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별명이 바로 인간 이철이의 참모습을 리얼하게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강원도 횡성의 부자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춘천고를 졸업하고 1932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제국미술학교에 유학중이던 변희천, 김종하, 김원, 이괘대 등과 백우회를 창립하여 미술활동을 했다. 후배로는 김병기, 문학수, 유영국, 이중섭 등이 있었다. 비교적 화려한 주변 배경을 가졌는데도 그것을 내세워 무엇을 얻어내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술만은 놓을 수 없는 천직이자 삶이었지만 그 외의 다른 것은 버리듯이, 버릴만큼 버렸다. 그러한 이철이를 한상철은 또 이렇게 썻다.

쓸쓸한 거리에 밤이오면 가끔 곱창 굽는 냄새가 통하는 목노주점에 멍하니 앉으셨던 선생님. 그러나 선생님의 정신은 마치 풍란과도 같이 억세었고, 저 비바람에 수천년을 씻긴 스핑크스처럼 우뚝 창공과 태양을 향해 계셨습니다. 실로 오만한 태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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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범접하기 어려운, 제일 무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세상의 모든 일에 초연한 사람, 세상의 이해를 다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갈등과 고통에도 한발쯤 물러서 있을 수 있는 정신의 소유자 그가 이철이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가 그린 많은 정물화 중에 자주 그린 소재는 꽃들이었다. 그는 꽃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학교 빈터가 있으면 그것을 일구어 꽃을 심고 물주며, 거름주고 가꾸기를 좋아했다. 여름에 꽃이 피어 여러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 좋아서였다. 허름한 작업복에 똥통을 들고 다니는 그를 보고 학부형이나 학교방문자들에게 소사로 오해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소박 소탈했던 그의 내면에 깊은 역사의식이 자리잡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 같다. 그의 아들 이상국도, 남겨진 유작더미를 점검하던 중 더 깊은 곳에 숨겨지듯한 이 ‘학살’작품을 발견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이철이가 떠난지 20여년이 지난 1989년의 일이다.
그가 이 학살장면을 본 것은 언제였을까. 그의 아들의 말에 따르건데 1950년 가을이나 1951년 무렵이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가 서울에서 인민군에게 잡혀가다가 의정부근처에서 B29폭격으로 대오에서 탈출하여 도피행각을 하던 중의 어느 곳일 것이라고 기억을 되살렸다.
제자 화가 이상국은 이철이를 불행한 화가라고 규정지었다. 이 말은 그가 인생에서 실패했다는 말이 아니란다. 그토록 치열하게 미술에의 실험정신으로 대결했던 그의 삶이 이제 바야흐로 만개의 시점에 이르르고 있을 즈음에 낙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백꽃처럼 온몸으로 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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