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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휴벗 보스(Hubert Vos)의 <고종 황제 어진 1898>

이석우

역사를 일깨우는 그림(5)


최후까지 지켜 저항한 왕, 고종 황제
- 휴벗 보스(Hubert Vos)의 ‘고종 황제 어진’(1898) -





Ⅰ.


고종(1852-1919)은 왕의 자리에 43년 7개월(1863.12-1907.7)재위 하였다. 숙종의 46년에 이어 조선 왕조 왕들 중 두 번째로 장기 집권한 왕이다. 1907년 강제로 왕위를 물러난 뒤에도 12년 동안이나 살아서 나라가 일본에 병합(1910.8.22)되고, 근정전에 일장기가 걸리는 치욕까지 당해야했다.
12세에 등극한 그에게는 감당치 못할 비바람 시련도 많았다. 그와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겪은 역사의 풍랑이 어떠했는지 큼직한 일들의 대종이라도 짚어 보아야겠다.
1876년 선택의 여지없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나라를 열어야 했다. 1880년 개화정책이 본격화한 듯 하더니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다.(1882) 구체제 아래서의 군인들이 신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터진 일종의 쿠데타였다. 그 밑바닥에는 대원군과 민비와의 권력 쟁취 게임이 짙게 깔려 있었다. 민비는 목숨을 지켜 황급히 도망하고 대원군의 재집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청나라가 그를 납치하여 인천항을 통해 청나라 보정에 압송하여 유패시킴에 그의 통치는 33일의 천하에 그쳤다. 서구근대시민국가를 만들겠다고, 일본의 힘에 기대어 일으킨 갑신정변(1884)은 다시 고종의 왕권 체제에 대한 저돌적 도전이었다.
백성은 가난과 핍박에 견디다 못해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1893년에는 63곳에서나 일어나는 등 전국으로 확대되며 그 절정에 이르렀다. 수령의 탐학이 혹심했던 전라도 지역에서 두 차례에 걸쳐 거대한 농민 항쟁 운동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동학혁명이다. (1차; 1894. 6-11, 2차; 1894. 10)
그 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출병한 청국과 일본은 급기야 청일전쟁(1894)으로 조선의 지배권을 다투었다. 끝내 민황후조차 눈 뻔히 뜬 그의 앞에서 참혹한 시해를 당해야 했다. (1895) 경복궁에 연금 당하다시피 된 고종은 목숨을 구해 1896년 2월 11일 아침 6시 경복궁을 빠져 나와 7시경 러시아 공관에 도망하듯 피신하였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라는 수모이다. 그가 다시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온 것은 1897년 2월 20일, 1년 9일만이었다.
이때부터 감연히 진행시킨 것이 ‘광무개혁’(1897.10-1907)이라고 알려진 고종 주도하의 적극적 개혁조치이다. 이는 왕권을 강화하고 그 위세 아래 위로부터 개혁을 실현하려는 근대화 작업을 지향하고 있었다. 고종은 1897년 8월 16일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같은 해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그에 걸맞는 국채를 선포하였다.
그 과정에서 황제권을 강화하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설정했다. 교육, 과학, 통신, 교통, 도시개발과 정보기관의 설립 등이 개혁의 내용이며,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 했다. 그래서 근래의 몇 학자들은 이 광무개혁이야말로 자생적 근대화 작업이며, 이것이 순조로이 지속되었더라면 조선의 국권은 지켜지고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도 막았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일본은 이런 개혁의 성공이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의 기회를 잃게 하는 것으로 보고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승리하자 1905년 조선을 강제 병탄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으러 핵심적인 질문은 무엇인가? 고종은 과연 이 왕조의 몰락과 근대국가 수립의 실패에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가이다. 다시 개화파 등이 시도한 근대화 모델과 고종이 추구한 왕권강화를 통한 개혁이념 중 어느 쪽이 더 바른 역사의 선택이었는가의 문제와도 맥을 같이한다. 이는 무능한 고종이 개혁에 저해 요인이었는가 아니면 일본의 한반도 병탄야욕이 오히려 고종의 개혁을 중단케 하고 끝내 조선을 식민지화 했는가의 질문에 이르게 한다.
전자의 입장이라면 고종은 개혁에 우유부단하고 암약한 시대착오적 군주로 근대화와 독립국 유지의 실패는 기본적으로 그의 책임으로 돌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광무개혁의 좌절의 책임이 일본 측에 있다면 고종의 시도와 그 시대상은 긍정적으로 재평가 받을 만하다. 1880년 조선은 이미 은둔의 나라가 아니었으며 서구의 근대 정치사상과 제도를 잘 알고 있었다는 지적이다. 고종의 어둡고 유약한 왕으로서의 이미지도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을 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킬 때의 구실로 파악한다.




Ⅱ.


이 글에서 다루는 휴벗 보스의 고종 황제 초상화가 광무개혁시기에 그려졌다(1898)는 점이 나의 깊은 관심을 끄는 부분이다. 제작 시기가 대한제국이 선언되고 광무개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다음 다음해(1899)에 해당된다.
보스의 이 고종 어진은 고종이 주도적으로 주문하였다는 제작과정상의 특성이 또한 색다르다. 그 이전 1880년대까지의 사진 초상이나 작품들은 촬영자의 주문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1890년에 제작된 쉰들러(Antonio Zeno Shindler, 1823?-1899)의 고종초상유화(1890초)도 작가 주도적이었다. 고종 실물을 놓고 그린 것이 아니라 퍼시발 로웰이 촬영한 고종 사진을 참고해서 유화로 그렸던 것이다.(계간미술 34, 1985 여름)
고종은 어떤 심경의 변화 때문에 보스의 경우 제작비까지 지불하면서 자신을 그리도록 했을 것인가. 권행가의 연구에 따르면 고종은 근대 군주로서 유화 초상화에 대한 필요를 알고 있었다. 이 무렵까지는 민영환 등이 러시아, 유럽 등의 여행에서 이미 황제의 초상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었다. 보스가 황제 초상을 제작할 때쯤에는 ‘고종의 초상은 단순히 주권국가의 표상 정도를 넘어 … 절대 군주로서 황제상 확립에 이용할 수 있는 매제임이 충분히 인지’되고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반면 이 초상화를 제작한 보스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고종 초상을 통해 사라져가는 인종 표본을 분류해내고 그것을 파리만국박람회에 전시하려는 것이 그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그런 내심의 숨은 의도가 있었기에 더욱 정확한 실제를 그리려고 부심했을 터이다. 하지만 고종으로서는 보스의 그런 의중을 역으로 이용하여, 세계만방에 조선의 황제가 엄위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을 듯하다.
그가 1907년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고 러시아 등과도 접촉한 사례로 보아 이런 가설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그 무렵 외국인의 사진기 앞에도 자주 섰는데 그는 이를 대외적으로 조선을 알리는 외교적 활동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 그의 이런 의중은 결과적으로 적중한 것이 아닐까. 초상작품은 1900년 6월에 파리박람회에 출품되고 같은 해 12월 워싱턴의 코코란스 갤러리, 1902년 뉴욕 유니언리그 클럽에서 전시되었다. 그로부터 80년이 흐른 1982년 그의 한 서린 덕수궁, 그곳 미술관에서 이 아우라는 1년이나 특별전시 됐고, 지난해(2006) 한국미술 100년전에도 다시 전시되어 우리의 역사적 회상을 새롭게 한 점에서 그렇다.
이때는 조상 추모와 진전에 보전한다는 전통적 어진 제작의 의도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어진을 황권의 강화와 나라의 대외적 이미지 구축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신민의 애국 충정과 숭상을 유도하는 아주 신속하고 직접적인 소통 매제가 되어가고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그 무렵 초상화에 대해 그 전통적 성격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소멸의 국면이 아니라 새로운 매체로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당시 그 주변의 어수선한 위기 상황은 고종 자신의 위상 강화를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필요로 하게 하였다. 러시아 공관에서 환궁 후 손상된 체통을 회복해야했고,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끝내 1904년 러일 전쟁, 1907년 자신의 퇴위) 중국으로부터 독립성 확인의 필요가 이를 재촉했을 것 같다.
그 때문에 고종은 임금의 정장인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보스 앞에 흔연히 섰으며 그의 흉배에 독립성을 강조한 태극문도 그려 넣도록 할 만큼 과감해졌다. 전체 분위기는 황금빛, 밝은 빛이 화면 가득하고 비스듬한 나무 계단에 선 고종은 귀공자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아무런 다른 장식들을 넣지 않고 제거함으로 자신의 개성을 뚜렷이 했으리라. 물론 이 점이 인종 표본의 유형 추출에 집중한 보스의 의도와 무관하다 할 수 없으나 전체 화면은 계몽 군주적 분위기를 살리려한 듯하다.
고종의 역사적 위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평가에 따라 이 초상어진에서 받은 인상 또한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평자들은 수심에 가득차고 유약해 보인다는 감상이다. 어쩌면 짙은 회의적인 모습까지 느끼게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4년 전 사랑하는 황비를 잃고 풍전등화의 왕조 앞에 목숨조차 아무런 방어 없이 열려진 상황에 놓인 황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심사였을 터이다. 그러나 그 같은 신입견에서 이 그림을 보기 때문에 그처럼 슬픈 고종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그 점에서 본인은 이 그림을 보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예부터 군자는 호오 희로애락을 너무 드러내 놓지 않는다고 했는데 만인지상인 그가 군자의 표정을 지켜야 필요는 언제나 항재 했으리라. 오히려 조용한 그의 얼굴에서 좌절을 이기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는 인고의 지도자상을 읽어 봄이 어떨까. 그의 가녀린 체격이나 섬세하고 긴 손가락에서 난세를 이길 걸출의 돌파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목구비가 수려한 균형이 잘 잡힌 영특한 면모를 느끼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내가 보는 그는 외유내강의 강인한 인물이기를 바라는 나의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그는 겪을 수 있는 모든 수모와 외세의 침탈,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쓰러져가는 대한제국을 세우려고 최후까지 몸부림쳐 저항했던 황제라는데 너무 인색할 이유가 없다. 일인들이 하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강제 퇴위시키고 끝내 독살(?)까지 시키지 않았던가.
이글을 준비하면서 찾아간 덕수궁(경운궁)은 곳곳이 사무치게 새삼스러웠다. 내 주변에 있는 역사의 현장을 그저 그곳에 있는 것으로 느끼고 얼마나 수없이 지나치고 말았던가. 고종이 23년 머무는 동안 1904년 중층인 중화전이 불탔다. 1906년 단층으로 다시 지어 정무 등의 행사를 했지만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서는 비좁았다. 석어당은 선조 임금의 추모처이자 광해군이 머무르고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다. 덕흥전은 고종 황제가 귀빈 접견처로 쓰던 곳, 함영전은 고종의 생활처이고 침전이자 승하한 곳, 그의 거동과 숨결이 아직도 묻어 있는 듯하다. 즉조당의 현판은 고종의 친필이다. 고종은 퇴위한 뒤에 12년을 덕수궁에 머물렀는데 ‘불면증이 심해져 새벽에 까치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잠들었다.’고 한다. 그의 승하한 나이 68세, 주변을 돌아봐야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이가 몇이나 되었겠는가. 저기 가는 과객은 국권 수호의 의지가 서린 이 궁의 역사를 아는가 느끼는가. 그의 능은 경기도 양주시 금곡리에 민비와 한 봉분 아래 누워있다.
보스의 초상화를 몇 번 보았지만 이글을 위해 다시 보고자 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작품 보존관리실 김영덕 선생에게 이를 요청하였다. 아쉽게도 2년간 대여해 왔기 때문에 지난 1월 7일 반납 조치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언제 다시 볼 날이 올는지…



참고 문헌
권행가, ‘고종의 초상-휴벗 보스<고종 초상>을 중심으로’, 근대미술연구(2005) 국립현
대미술관 (pp.73-97)
‘사진 속에 재현된 대한 제국 황제의 표상-고종초상 사진을 중심으로, 한국근
대미술사학 16집’, (2006, 상반기. pp.7-41)
국립현대미술관, 구한말 미국인 화가 보스가 그린 고종 황제 초상화 특별전시도록, 1982
김영상, 서울 600년<4>, 대학당, 1996
이태진, 고종 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5
김윤수 외, 한국미술 100년①, 한길사, 2006
정국진, ‘고종 황제어진 특별전’, 계간미술 23(1982, 가을, pp.188-189)
조창수, ‘미국에서 발견된 고종 초상 유화’, 계간미술 34 (1985, 여름, pp.10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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