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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에 비친 張旭鎭의 면모

김형국

관련 책을 다섯 권이나 펴냈지만 지금도 서양화가 장욱진(張旭鎭, 1917- 1990) 이야기라면 귀가 솔깃하다. 생전에 교분이 있던 분들이 지나가는 말처럼 들려주는 일화에서 그의 면모를 새삼 느낄 수 있어서다.
1950년대 한때 함께 서울 미대 교수를 지냈던 김병기(金秉騏, 1916- ) 화백의 회고는 내가 진작 알고 있던 일화의 속편이다. 지금도 비구상화 그리기에 열심인 김화백은 1960연대 초반부터 미국에서 살고 있다. 짬짬이 귀국해서 개인전도 열고 있고 초등학교 그리고 미술대학 동기인 동갑 이중섭에 대한 회고담을 들려주어 요절 화가를 피부로 체감하지 못했던 우리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건필(健筆)이다.

그런 그에게 장욱진이 유럽을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루브르 미술관을 다녀왔다. 한번 만납시다”. 한 잔 술이 들어갔던지 “루브르는 볼게 없었다”고 덧붙이더라는 것.

김화백의 회고는 이어진다. “무얼 보았기에 볼 게 없다 했을까. 루브르는 프랑스의 중세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위에서 시민혁명도 발생했고 근대도, 현대도 축적되었다. 우린 대체로 프랑스를 건성으로 본다. 일본을 통해 전달된 인상파나 고작 에콜드파리의 미술만을 갖고 프랑스 미술이라 말하는 속단(速斷)이 상식화되어 있다. 분명한 것은 그곳의 최상은 우리의 최상과 통한다.”

1983년 봄의 유럽여행에서 그가 오래 머문 곳은 교환교수로 파리에 머물던 큰사위 거처였다. 화가 아버지를 모시고 큰딸이 함께 가고 싶은 곳은 루브르이었을 것임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자가용을 가진 친지에게 어렵사리 부탁해서 루브르에 당도했는데, 입구에서 일행들만 들어가라면서 그 사이 바깥에서 기다리겠다고 고집한다. 당연히 좋아할 것 같아 모시고 왔다며 들어가자고 재촉하니, “지금 이 나이에 루브르를 둘러보아 뭘 하겠는가”며 버티더란 것이다.

루브르를 둘러보지 않았음에도 김병기 화백에겐 “볼 게 없었다”고 말한다. 화가로서 루브르를 보지 않은 그의 방식은 상식적이 아니지만, 자기 싸움인 화업(畵業)은 상식을 넘어선 경지임을 미술비평에도 일가견이 있는 김화백이 모를 리 없다. “장욱진의 작은 그림은 현대화 추세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에서 동양적 정경이다. 세계를 둘러보고서도 볼 것이 없다 했을 때는 자신의 세계로서 선비, 운치 등 전통의 정신세계를 천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자랑스런 정신세계의 한 토막”이라 결론짓고 있다.

김화백 말처럼 장욱진은 우리 선비정신, 이를테면 ‘반구’(反求)가 몸에 익었던 분이다. 반구는 “모든 일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 찾는” 마음가짐이다. 장욱진의 그림 한평생은 곁눈질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거울삼는 세월이었다.



<작년 일본 화단은 명치시대의 서양화가 아오키 시게루(靑木繁, 1882- 1911)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화제였다. 사에키 유조(佐伯祐三, 1898-1928)와 함께 초기 서양화단에서 귀재(鬼才)로 소문났던 아오키가 동경미술학교에 다녔을 때, 프랑스 유학 1세대인 쿠로다 세이키(黑田淸輝, 1866-1924)가 교수로 있었다. 아오키가 교실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데 쿠로다가 가까이 다가간다. 화실에서 학생의 화판(畵板) 앞으로 다가가는 것은 선생의 관심 표시가 분명할 터. 그런데 아오키는 고개를 돌린 채 화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내 그림을 어찌 네가 알겠느냐”는 뜻의 몸짓이었다 한다.

미대 교수 시절 장욱진의 경우는 거꾸로다. 화실에서 열심히 그리는 학생들의 화판 앞으로 다가간다. 학생들마다 선생이 자신의 그림에 관심을 보여주는 신호라 여겨 은근히 격려 한 마디 말을 고대한다. 그런데도 장욱진은 손바닥으로 화폭을 이리저리 가려보기만 하다가 말없이 훌쩍 교실을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육성으로 들었던 장욱진의 미술교육관은 간단했다. “제자도 없고 스승도 없다”는 것. 그 시절에 대해 물으면 항상 제자란 말 대신, “한 교실에 있었다”고만 대답한다. “만들지 않았는데도 만들어졌다”(不作之作)는 무아의 경지처럼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배움을 얻었다”는 후배들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 화단의 동량들인 김종학, 윤명로, 김봉태, 이만익 같은 서양화가나 조각가 최종태, 한용진 등이 털어놓는 장욱진 덕담은 지금도 끝이 없다.

다른 예술도 그렇듯이 미술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행보(行步)다. 그래서 그림교육이라면 그리기를 좋아하는 후배들에게 나름대로 그려보라는 격려가 있을 뿐이겠다. 우리 화단의 대가급 화가가 마침내 자신의 화풍을 이어 받는 것이 화업의 정점이라 가르친다는데 그런 어린이 미술교육도 참교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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