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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박물관을 위한 변명

이인범

박물관을 말하며 비정부기구(NGO)인 국제박물관협의회(ICOM)를 비켜가긴 어렵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설립된 이 국제적인 박물관 연대는 광풍같이 휘몰아치던 전체주의의 참화를 딛고, 정치적 패권주의에 맞서 문화유산과 예술에서 잠재적 인류 구원의 힘을 모색하며 새로운 미래를 디자인하는 데 성공해 왔다. 이 ICOM 회의가 아시아권에서는 처음으로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열렸다. 그렇다면 회의 개최국으로서 우리 박물관 제도의 현실은 어떠한가.

8일 한국박물관협회가 연 세미나는 우리의 현 주소가 어디인지 짐작케 해준다. '사립 박물관.미술관 제도 활성화와 제도 개선'을 주제로 열린 이 모임은 말이 세미나지, 사실은 200개에 이르는 우리 사립 박물관.미술관을 위해 박물관 학예사 인건비(약 30억원)의 정부 지원을 청원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만성적 재정난과 인재난에 시달리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짜낸 고육지책이었으리라. 그나마 이러한 생각도 참여정부에 들어서면서 지난해 생전 처음 로또복권 기금으로 지원 아닌 지원 혜택을 받은 데 힘입고 있다.

경제규모 면에서 이제 세계 10위권에 있음을 자랑하는 나라, 100조원이 넘는 적지 않은 예산을 운용하는 나라, 공허하기 짝이 없는 국립박물관.도립박물관 건물 짓는 데 수백억원을 쓰는 나라의 풍경치고는 진귀하기 그지없다.

더욱이 눈길을 끄는 것은 사립 박물관을 개인의 사익을 챙기는 영리기구로 이해하는 국민을 어떻게 설득해 낼 것인가가 세미나의 핵심 쟁점이었다는 점이다.

평생 동안 애지중지 모아온 귀중한 수집품과 사재를 털어 국민과 더불어 나누겠다고 만든 박물관.미술관을 향해 정당성 시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무엇보다 이러한 사태는 사적 소유에 마냥 긍정적일 수 없는 우리의 사회 역사적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박물관 사람들을 '가진 자들' 일반과 연결시켜 생각할 경우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선입견은 그동안 정부 정책의 무정견에서 비롯된 것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현행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문제다. 법에서 말하는 박물관은 '비영리적인 항구적 기구'가 아니다. 그리고 활동하는 기구라기보다 '시설'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ICOM이 최소한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제시하고 있는 박물관 정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박물관이란 '가진 자들'이 일시적으로 편의상 만들었다가 그만둬도 되는, 혹은 사익을 위한 영리기구로 오인시킬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린벨트 내 토지 이용이나 각종 허가사항 간소화 등 모처럼의 진흥 조치는 신종 '부동산 개발법' 정도로 오해를 야기하는가 하면, 아예 '규제 개혁' 차원에서 작품 거래 허용 논란 같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 거침없이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원인이야 어떻든 우리의 선입견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그러니 새삼스럽지만 국공립이든 사립이든 박물관.미술관이란 공공성을 지닌다는 점에선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아니 오히려 '사립' 박물관.미술관은 각종 욕망이 들끓는 사회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사적 소유가 아니라 공공의 몫으로 돌리고자 하는 숭고한 뜻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분배 정책에 관심을 가진 정부라면, 사립 박물관 정책에 구휼 같은 지원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눈을 돌려야 마땅하다. 사립 박물관이야말로 '가진 사람'들의 자발적인 공공이익에 대한 종사라는 점에서 박물관 문화의 진정한 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가지지않은 자에게 나누거나, 지원의 배분 문제를 놓고 도식적이고 이분법적으로 접근함으로써 갈등을 부추기는 일 없이도 함께 더불어 살 공동체의 지혜가 녹아 있으니 말이다.

중앙일보 2005.6.10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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