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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봄 전 / 보편성이 된 특수성

이선영

보편성이 된 특수성

두 번째 봄 전 (4.26-7.10, 광주시립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 공립미술관으로 이후 전국에 세워진 공립미술관의 주요 모델이 되었던 광주시립미술관은 올해 30주년을 ‘두번째 봄’이라고 규정하면서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한다. 광주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 33인이 초대된 이 전시는 크게 ‘항해의 시작-역동과 실험’, ‘빛의 도시 광주-뉴미디어아트’, ‘연대와 확장’으로 나뉜다. 보다 많은 작가를 참여를 위해 높은 천고의 전시장 잉여 공간까지 남김없이 활용하면서도 전시회로서의 완성도를 유지한 이 전시는 지역 미술의 단면이자 2022년 현재 현대미술의 한 현장으로, 역사와 당대성의 요구에 응한다. 어떤 경우는 옛 작품이, 다른 경우는 현재 작품이 호출됐고, 몇 십 년의 간극을 확인할 수 있는 배열도 있었다. ‘80년 광주’라는 역사적 분기점이 깊이 각인되어 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광주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비슷한 경향이다. 대안공간의 약진과 기념비 중심의 공공미술을 극복하려는 공공예술, 독립 기획자들의 활동, 각 지자체에서의 문화재단 설립과 그에 따른 레지던시 관련 활동과 전시는 거의 공통적이며, 이번 전시도 그러한 경향이 반영됐다. 그것은 실험, 미디어, 확장 같은 전시의 키워드에서도 확실하게 나타난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첫 번째 주자로서, 이후에 보편화된 많은 관례를 만들었다. 이번 전시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외부 인사는 장석원, 조인호, 백종옥, 문희영으로, 각각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흐름을 시기별, 장르별로 작품 선정에 영향을 주었다. 



송필용, 학살-금남로, 1986, 캔버스에 아크릴, 234×140cm(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광주시립미술관)



강운, 순수형태-여명, 2001, 캔버스에 유채, 333×218cm



정정주, Facade2021-1, 2021, 스테인리스 스틸, 거울, LED 조명, 240×500×27cm 


특히 광주 미술문화 연구소장인 조인호는 그동안 발로 뛰며 수집해온 광주미술의 현장을 6개의 아카이브로 나눠서, 그자체도 전시작품으로 포함시켜 전시의 시공간적 축을 확장시켰다. 참여작가 33인 외에 다른 작가와 그룹의 영상물을 보여줌으로서 30년간의 광주미술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전시를 총괄 진행한 김희랑은 몇 달 준비가 아닌 20년 이상의 준비라고 말할 만큼 지역과의 밀착성을 보여준다. 요즘처럼 미술관의 인적 구성이 자주 바뀌면서 방향성이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는 가운데, 책임감을 가진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한 지역의 문화예술 동향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작가에게도 연구자들에게도 힘이 된다. 특히 광주는 어느 지역보다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적인 물음에 직면해왔다. 지난 6월에 열렸던 전시 연계 세미나에서 발제자 장석원은 [90년대 이후, 광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광주는 예향으로서의 전통적 자부심을 갖고 있고, 1980년대 이후에는 민주화의 성지로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으며, 1995년도에 광주비엔날레가 열리고부터는 국제적 예술 중심지로 부상하려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장석원은 광주미술을 크게 세 갈래로 나눈다. ‘예향’이라는 표현은 전통을, ‘민주화의 성지’라는 표현에서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진보적 흐름을, 광주비엔날레 이후에는 현대미술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문화적) 전통과 (예술적) 현대, 그리고 (정치적) 투쟁 간의 관계는 광주에서 확연했지만, 전반적으로 한국 사회와 미술을 관통하는 문제였다. 보편과 특수가 교차되는 지점에 광주가 있었다. 



임남진, 풍속도, 2005, 감물염색비단에 채색, 175×220cm



김상연, 풀다(解), 2012, 나무 커팅 위에 ĥ, 가변사이즈 



허달용, 담양에서-장마 Ⅱ, 2017, 한지에 수묵, 121×228cm



예향과 민주화 성지, 그리고 국제성의 좌표 속에서

예술과 정치에 관한 문제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던 지역이어서인가, 타지인의 선입견으로 볼 때 정치적 내용을 앞세운 작품들은 오히려 적었다. 몇 년 전 있었던 5.18 기념전인 [별이 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광주지역 미술에 더 필요한 것으로 ‘개방성과 자유’를 꼽는 장석원의 지적처럼 치열한 저항 이후가 중요한 것이며, 실천적 차원에서 정치와 예술은 차이가 있다. 이번 전시의 한 장처럼 ‘연대와 확장’이 중시된 것이다. 연대와 확장이라는 개념에는 자기 정체성에 관련된 순혈주의에 대한 거부가 있다. 또 하나는 광주라는 지역명과 연관되어, 빛 관련 미디어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 특이했다. 광주 미디어아트 작가들의 활동을 살펴본 백종옥(미술생태연구소장)은 ‘광주시는 2000년대 초부터 빛과 관련된 부품, 장비 등을 개발, 생산하는 광(光)산업을 지역 특화사업으로 육성해 왔다’고 말하면서, ‘광주 미디어아트 작가들은 이런 산업 환경을 창작 활동과 연결시켰다’고 평가한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미디어아트 전문 레지던시도 운영하고 있을 정도다. 손봉채, 이이남, 정정주는 빛과 관련된 작품으로 유명하다. 여러나라 국화가 한 화병에 꽂혀있는 손봉채의 최근작 [꽃들의 전쟁](2022)은 그자체가 빛을 발하는 꽃에 인공적 형식을 추가해서 입체적으로 빛나게 했다. 외바퀴 자전거를 돌리는 그림자 연극 분위기의 초기작 [보이지 않는 구역](1996)에서 작가는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가를 묻는다. 정정주는 [Facade2021-1](2021)에서 스테인리스 스틸, 거울, LED 조명 등을 이용하여 작은 방에 들어오는 빛의 추이가 담긴 이미지들을 쌓아 거대한 기념비를 만든다. 



박문종, 수북들에서, 1997, 종이에 먹, 토분, 139×220cm



윤세영, 파랑 波浪-까막섬, 2013, 장지에 석채, 분채, 은분, 스크래치, 162×130cm



표인부, 바람의 기억-어머니, 2017, 캔버스 위에 종이, 190×150×12cm


이이남의 작품 [시(詩)가 된 폭포](2021)는 전시장 천정까지 투사되는 영상을 통해 글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장관을 이룬다. 둔탁한 인간의 기념비인 건물 안팎으로 달빛과 가로등이 비치거나 높은 건물들 사이로 전조등을 켜고 달리는 자동차. 빛과 어둠으로 현대적 삶의 단면을 표현한 조근호의 [도시의 밤](2001) 시리즈는 유화지만 빛의 느낌이 미디어 작품 못지않다. 이번 전시에서 전통의 문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남도의 정서...’로 시작되는 거의 정형화된 문구가 있지만, 대체로 이 땅에서의 전통의 문제는 짧은 시간 동안 이뤄낸 근대적 발전주의로 인해 마땅한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차라리 자연은 전통과 현대를 이어준다. 구름 낀 하늘을 화면 가득히 그린 강운의 [순수형태](2000) 시리즈는 하늘 아래의 평등, 평화에 대한. 그림 내부만 집중하는 조명을 통해 마치 정지된 영상같은 밝은 화면이 특징적이다. 표인부는 [바람의 기억](2015) 시리즈에서 수많은 종잇장을 겹쳐서 바람의 길을 표현했다. 자연의 힘을 예술작품을 통해 물질하는 그의 작품은 종이의 배치, 밀도. 색에 따라 분위기도 달라진다. 나무로 조각된 날개 달린 소들을 전시장 모서리 위에 가득히 설치한 김상연의 [풀다(解)](2012)는 광주에 필요했던 든든한 수호천사들이다. 종이에 먹과 토분 같은 오래된 매체를 사용하는 박문종의 [수북들에서](1997)는 오래된 양피지처럼 얼룩과 형상이 겹쳐있다. 윤남웅의 [바람을 위한 드로잉](2022)은 꼭두인형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인간 형상들이 매달려 있다. 



손봉채, 보이지 않는 구역, 1996, 혼합재료, 가변사이즈 



이이남, 시(詩)가 된 폭포, 2021, 고서, 오브제, 싱글채널 비디오, 사운드, 12분 24초, 680x200cm



정기현, 토포스(Topos), 2022, ö 구조물, 비디오 설치, 360x230x270cm 



조근호, 도시의 밤 Ⅲ, 2001, 캔버스에 유채, 130.3×324cm


깊은 바다의 속도 같이 보여주는 풍경이 있는 윤세영의 [파랑 波浪-까막섬](2013)은 장지에 석채, 분채, 은분 등을 이용한 작품으로, 하늘에 떠 있는 푸른 천체는 이 땅 또한 푸른 별임을 알려주는 우주적 풍경이다. 임남진의 [풍속도](2005) 시리즈는 감물 염색 비단이나 한지에 채색된 그림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카페나 시장의 모습을 원근법을 무시한 화면에 담는다. 고층 아파트도 마트도 맥도날드 햄버거도 시장통의 북적북적함과 잘 어울린다. 사람 사는 풍경이지만 점차 사라져 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허달용의 [담양에서-장마](2017)는 대나무 잎이 비에 젖어 먹물이 빠지는 듯 절묘한 수묵화다. 일제가 철도까지 깔아서 수탈한 기름진 평야의 농산물은 예향의 물적 토대가 되었을 것이며, 1980년 광주에서의 민주화 운동도 근대를 특징짓는 생산력의 발전과 그 분배 때문에 생기는 노동과 자본의 갈등이 장기간에 걸친 군부독재라는 악재와 만나 극적으로 분출된 것이다. 80년 5월 투쟁 기간에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자발적 공동체 문화는 전설적으로 회자된다. 작품 [학살-금남로](1986)에서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죽이는 장면, 탱크와 몽둥이 그리고 흐르는 피를 그렸던 송필용은 몇십년 후 [역사의 흐름](2019)에서 굴곡이 많은 강의 모습으로 광주를 다시 그렸다. 유기체의 일부로 떨어져 나온 것들이 이합집산하여 산과 물의 형상으로 변모하는 김설아의 [사자의 은유](2019)는 실제로부터 비롯된 환상으로 생각된다. 이매리는 영상 작품 [Poetry Delivery](2015)에서 각 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있었던 폭력 사태를 공시적으로 배열한다. 



이매리, Poetry Delivery, 2015, 2채널 영상, 25분 



조현택, 스톤마켓 부산, 2022, 피그먼트 프린트, 150×310cm



주홍,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2022, 싱글채널 영상, 356


미얀마의 군사 쿠테타 사건에 대해 광주시민이 보여준 동병상련처럼, 주홍은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표현한다. 작품 [우크라이나에 평화를](2022)에서 전시장 벽에는 현장에서 활용되었던 다양한 작품/도구들이 걸려있다. 그에게 인권이나 기후위기같은 문제는 예술과 직결된다. 현대문화를 이루는 갖가지 자극적인 이미지로 포화된 방을 연출한 최요안의 사진 설치 [색즉시공 공즉시색](2022)에서는 성과 권력의 이미지가 눈에 띈다. 투쟁의 역사는 치유의 일상으로 변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시장 안에 만들어진 또 다른 작은 방을 만든 김자이의 [휴식의 기술](2022)은 모든 것을 놓고 자신을 마주하는 공간을 연출한다. 신호윤의 [2와 3 사이-피에타](2018)는 붉은 종이 줄을 길게 내려뜨려 만든 피에타상이다. 동서고금의 다양한 돌조각상이 늘어서 있는 돌조각 가게를 찍은 조현택의 작품 [스톤마켓 부산](2022)에는 현세의 안녕을 희구하는 현대인의 염원이 투사되어 있다. 예향의 전통과 정치적 투쟁에 이은 광주미술의 마지막 축은 현대성이다. 1995년 시작된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시민의 고귀한 투쟁에 대한 일종의 ‘선물’로, 지역으로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90년대 이후는 이미 한국도 세계와 동시대였기에 단지 바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광주는 이 세 좌표가 극명하게 만나는 지역으로서의 특수성을 지닌다. 광주가 예향과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 된 것은 자생적이었지만,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된 것은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이문제 또한 광주를 넘어선 보편성을 가진다. 좌우를 넘나들며 정권이 바뀌는 동안 확실해진 것은, 지배 권력과 관계없이 회색빛 관료주의의 문제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세 번째 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공성과 자율성의 조화일 것이다.


출전; 아트인 컬처 202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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