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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현/ 빛처럼 아롱거리는,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고충환

김소현/ 빛처럼 아롱거리는,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김소현은 약시였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돋보기를 끼고 다녔다. 돋보기를 통해 본 세상은 과장돼 보였고, 돋보기를 벗고 본 세상은 온통 흐릿한 실루엣처럼 보였다. 흐릿한 실루엣처럼 보이던 세상이 갑자기 선명해지는 것이 과장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 세상을 재현한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시각과 시점을 전제한다. 시각과 시점이 그림에 선행한다는 것이고, 어떤 시각과 시점(다르게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는 것이 그림에 영향을 미치고 그림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흐릿하게 보인다고 했다. 실루엣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건 어쩜 특히 형태에 대해서 그렇다. 이처럼 형태 감각이 약화되면서 다른 감각이 오히려 오롯해지는데, 빛과 어둠, 빛과 색채, 빛과 그림자가 그 경계를 허물고 상호작용하는 자연현상(다르게는 감각현상)에 민감해진다. 그 현상 그대로 유년시절 작가의 놀이가 되고, 이후 작가의 그림의 원천이 된다. 
아마도 대개는 저만의 놀이였을 것이다. 그 놀이가 자연의 비가시적 실체에 눈 뜨게 했고, 덩달아 작가 자신을 내면적으로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자연의 비가시적 실체와 작가 자신의 내면과의 교감이, 대개는 우호적이고 적당히 비현실적이고 마치 꿈을 꾸듯 몽환적인(아님 몽롱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각적인 상호작용이 바탕이 된다. 다르게는 형태가 실루엣으로 환원되는, 그림자가 형태를 암시하는, 빛과 그림자가 그 경계를 허물어 상호 간섭하는, 빛과 색채가 경계 너머로 서로 삼투되는 자연현상 혹은 감각현상을 통해 마치 흐르는 구름처럼 밑도 끝도 없는 형상을 만들어내는, 그런 놀이(그림자놀이 그리고 숨은그림찾기 놀이 그리고 어쩜 환영놀이?)가, 그 놀이의 회화적 승화가 바탕이 된다. 그걸 작가는 내면풍경이라고 부른다. 엄밀하게는 내면적이기만 한, 그래서 관념적인 풍경이라기보다는, 자연과의 교감에 의한, 그래서 자연현상을 내재화한 풍경이고 그림이다. 

작가의 그림은 자연현상과 작가의 내면이 하나로 만나지는 교감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 속엔 자연이 들어있고 자연현상이 들어있다. 교감이 성립하려면 상방간의 관계(작가의 경우에는 자연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 교환이 있고 교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과 작가와의 상호작용이 있고, 자연현상과 감각현상의 상호간섭이 녹아들어있다. 
그럼에도 얼핏 작가의 그림은 자연 혹은 자연현상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형식논리(다르게는 형식놀이?)의 소산처럼 보인다. 색과 색이 서로 스미고, 밝은 부분과 어둔 부분이 경계를 허무는, 그리고 그렇게 허물어진 경계가 만들어준 비정형의 형태 그대로 마블링으로 떠낸 추상화 같다. 도대체 고정된 것, 결정적인 것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다만 밑도 끝도 없는 흐름과 항상적인 이행이 있을 뿐인, 그리고 그렇게 흐르는 색과 흐르는 색이 서로 부침하면서 고유의 아우라를 발산하는 추상화 같다. 보기에 따라선 투명성을 머금은 색이나, 색의 이면에서 감지되는 빛과의 상호작용이 색채 추상으로 그린 스테인드글라스 같다. 실제로 작가는 캔버스와 함께 투명한 유리판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데, 작가는 붓는다고 표현을 했지만 사실은 색을 흘려서 그린다. 이처럼 색을 붓거나 흘려서 그리는 식의 프로세스가 작가의 그림에서 확인되는 흐르는 색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가하면 예로부터 기와 기운(다르게는 에너지)을 흐르는 것으로 봤다. 그렇게 치자면 그림에서의 흐르는 색은 흐르는 기와 기운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에너지와 에너지가 상호 부침하고 삼투하는, 서로 충돌하고 간섭하는 역동적인 현장처럼도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다만 흐르는 색을 그린, 아님 빛의 스펙트럼을 그린, 혹은 기의 운동성을 그린 형식논리의 결과일 뿐인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실 따지고 보면 흐르는 색도 빛의 스펙트럼도 기의 운동성도 하나같이 자연에서 건너온 것들이고, 작가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자연에서 발견한 것들이다. 자연의 본성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비정형의 얼룩과 얼룩이 어우러진 온갖 형상들이 숨어있고(숨은그림찾기 놀이), 잠재적인 형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그림자놀이), 알만한 자연현상 혹은 풍경이 암시된다(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다). 데자뷰? 신기루?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풍경? 기억 속의 풍경?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연 한가운데로 이끈다. 빛살이 비쳐드는 숲속 정적이고 고즈넉한 호숫가에서 물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마치 저 홀로 자연과 대면하고 있는 것 같은, 사물대상이 피상적인 형태를 벗고 변신하는 은밀한 순간을 목격하는 것 같은, 그런 극적이고 내밀한 현장에로 이끈다. 빛과 그림자, 빛과 어둠이 적절한 비율로 분배된, 적당히 밝고 적당히 어둑한, 모든 형태가 빛살을 받아 해체되면서 그 경계가 지워지는, 그리고 그렇게 다만 몽롱한 빛 얼룩 혹은 빛 조각으로 아롱거리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생명 있는 것들이 내는 침묵의 소리로 왁자한, 그런 외진 숲속으로 이끈다. 물거울처럼 외부환경을 반영하는,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일렁이는 수면에 형태가 일그러져 보이는, 숲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샘으로 이끈다. 때로 형형색색의 총총한 종유석과 석회 벽을 반영하는 동굴호수로 이끈다. 빛과 어둠으로 직조된 감각의 그물을 통과하면서 사물대상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교감의 현장에로 이끌고, 현실이 다만 순수한 흔적과 자취로 화해지는, 그리고 그렇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면서 현실 저편의 비전을 열어 보이는 감각적 환영에로 이끌고, 이 모든 감각현상, 이를테면 빛과 어둠, 빛과 그림자, 빛과 색의 환영(혹은 색채의 향연)을 관조하는 주체인 작가의 내면풍경에로 인도한다. 
그렇게 작가의 내면에서 추상과 구상이, 감각적 실재와 상상력이, 현실적 풍경과 기억 속의 풍경이 그 경계를 허물고 넘나들어진다. 구상적 실재의 이면에 잠재된 추상적 실재를 발굴하고, 가시적 실재의 이면에 은폐된 비가시적인 실재를 캐낸다. 이건 논리적 비약도 수사적 표현도 아니다. 모든 사물대상은 겹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개개의 것들은 뭔가 다른 것을 감추고 있다(르네 마그리트). 하나의 형은 동시에 그 이외의 형을 하나 이상 함축하고 있다(앙리 포시용). 여기에 상징주의는 감각적 현실을 비감각적 실재의 메타포로 봤고(그래서 상징주의다), 낭만주의는 현실을 내세 곧 사후세계의 반영 혹은 희미한 그림자로 간주했다(이처럼 현실로 소환된 내세로부터 낭만주의 고유의 멜랑콜리가 유래한다). 그리고 초현실주의는 꿈(어쩌면 상상력과도 무관하지가 않은)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이며 현실의 원형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추상은 도처에 있다. 이를테면 사물대상을 클로즈업해서 볼 때, 다른 사물대상과의 유기적인 관계로부터 단절된 상태로 볼 때, 빛과 물을 통해서 굴절된 상태로 볼 때 구상은 추상이 되고 현실은 비현실적 비전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어쩌면 구상도 그렇지만 추상도 다만 감각적 현실에 대한 시지각적 경험의 차이가 그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익숙한 것, 알만한 것, 생경한 것, 낯 설은 것 모두가 발원하는 원천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개인적인 기억 역시 사물대상을 왜곡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그림자, 아마도 대개는 빛으로 아롱거리는, 혹은 미세하게 파문하는 물가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재현한 것이지만, 정작 감각적 실재와는 거리가 먼 그 자체 순수한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그림자는 추상인가 구상인가. 현실인가 비현실인가. 말장난 같지만, 작가는 사물대상의 모호한 경계에, 애매한 정체성에 관심이 많다. 사실 관습적인 눈 밖에서 보면 모든 것이 모호하고 애매하다. 그리고 관습적인 눈 밖에서 보기는 중요한 예술적 덕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쩜 작가의 회화는 구상 속에 숨은 추상을 발견하고 잠재적인 현실을 발굴하는 것일 수 있고, 이로써 감각적 현실을 확장시켜주는 것일 수 있다. 아마도 <형상 찾기>란 작가의 주제의식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구상 속에 숨은 추상, 감각적 현실 속에 잠재된 가능한 현실, 가시적 실재의 이면에 가려진 비가시적 실재를 발굴하고 캐내는 것이며, 이로써 현실의 또 다른 겹구조를 열어 보이는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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