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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늪, 습지, 사구, 그리고 곡이 있는 풍경

고충환



이주형/ 늪, 습지, 사구, 그리고 곡이 있는 풍경 




곡(谷)들은 나에게 프로히트의 계곡을 떠올리게 했다. Uncanny valley. 지금 나의 삶이 수많은 일들로 이어져 복잡하듯, 수많은 곡(谷)들이 내 삶을 감싸고 있었다. 난 언제나 내 삶이 햇볕에 바짝 마른 듯한 명확함을 보여주기를 바라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언제나 불명확한 부분이 있고, 판단이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부분이 있다. 이것은 거대한 하나의 계곡이 되어 나에게 심곡, 내가 살았던 깊은 구지를 떠올리게 하였다. 
(작가 노트) 


미술을 하나의 형식으로 간주하고 순수한 형식을 추구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의해 견인된 추상미술이 아니라면 그림들은 대개 어떤 식으로든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인격 그러므로 창작 주체의 개성(아이덴티티)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인물은 물론이거니와 풍경이나 정물이 다 그렇다. 이런 광의의 층위에서 보면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그림은 일정 정도 자기를 그린 그림 곧 자화상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의미 그러므로 협의의 층위에서 자화상이라고 하면 자기가 직접 등장하는 그림, 자기를 직접 대상화해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작가 이주형의 그림을 초기부터 쭉 봐왔지만, 작가의 그림에서 이런 자화상에 해당하는 그림을 본 기억이 없다. 아마도 영 없지는 않을 것이지만, 여하튼 근작에서 이런 자화상을 그린 그림이 있어서 주목된다. 

반백의 머리에 안경을 쓴 작가가 얼굴을 비스듬하게 기울여 화면 아래쪽을 보고 있다. 캔버스가 층층인 것을 보아 아마도 작업실일 것이다. 뭘 꼭 본다기보다는 다만 얼굴 각도가 화면 아래쪽을 향하고 있는 것인데, 아마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을 것이고 굳이 보는 것으로 치자면 자기 내면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의 전면을 그렸는데, 의외로 그림의 제목이 <뒤>다. 전면을 보지 말고 그림의 이면을 보라는 말인가. 표면에 드러나 보이는 의미가 아닌, 이면에 숨은 의미를 읽어달라는 주문인가. 

실제로 그림을 보면 작가 뒤편에 뭔가 시커먼 덩어리가 숨어 있다. 그림자다. 흔히 그림자는 주체의 반영이고 분신이라고 했다. 그림자를 놓고 악마와 거래한 이야기도 있고(여기서 그림자는 아마도 영혼을 의미할 것), 그림자가 일어나 걸으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도 있다. 미술사에서도 보면 그림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작가들이 있었다. 에드바르트 뭉크와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작가들이 그렇다. 아마도 얼굴이, 표면이, 전면이 못다 한 이야기를 그림자가 대신해준다는 심층적인, 내면적인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자처럼 보이는 어둠 속에 또 다른 뭔가가 있다. 어둠 속에 숨어 있어서 잘 안 보이지만, 작가가 그린 모든 그림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러므로 보기에 따라선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가 있는, 머리칼 같기도 하고 털 뭉치 같기도 한, 알 듯 모를 듯한 형태가 있다. 나는 그림자에 나를 숨기고, 그림자 또한 나의 분신을 숨긴다. 나의 진실(실체)은 그림자에 숨어 있고, 그렇게 숨겨진 나의 진실(실체)은 나 자신만큼이나 분명한 실체(비록 알 듯 모를 듯한 형태지만)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작가의 모든 그림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알 수 없는 털 뭉치(?)는 작가의 분신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기가 그린 모든 그림에,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모든 장소에 자신의 분신을 보낸다. 일상적인, 존재론적인, 역사적인 사건 현장의 목격자로서 그리고 증언자로서 자기 사신을 보내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단 알 수 없는 형태를 다름 아닌 작가의 분신으로 보면, 비로소 작가의 다른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말풍선> 시리즈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함축한 것이고(보기에 따라선 혀처럼도 보이는), <산의 언어>에서 분신은 설핏 웃는 것처럼도 보인다(보기에 따라선 수목처럼도 보이는). 여기에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해 보자면, <이빨 요정>은 아마도 아기의 탈락된 젖니를 보관하고 있다가 이를 기념(기억)할 요량으로 그린 것이며, 외적으로 보아 풍경을 소재로 한 일련의 <곡> 시리즈 중 일부 머리의 뒤통수를 그린 것 같은 그림들이 주목된다. 비록 형태적 유사성으로 보아 뒤통수처럼 보이는 것이지만, 거기서 숨은 얼굴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미셀 투르니에는 <뒷모습>에서 사람의 뒷모습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숨긴다). 앞모습은 그저 보이는 것이 다지만, 뒷모습은 애정과 연민과 근성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그 숨은 뜻을 볼 수도 읽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애정과 연민과 근성이야말로 또 다른 제3의 눈인 것이고(촉각이 제2의 눈이다), 그 눈으로 본 뒷모습은 그 자체 또 다른 얼굴일 수 있다. 이처럼 그 자체 또 다른 얼굴인 뒤통수에서 작가가 보이는가. 작가의 무엇이 보이는가. 작가의 내면이, 작가의 무의식이, 작가의 번민이, 작가의 상처가, 작가의 자의식이 보이는가. 제3의 눈으로 본다면 비로소 볼 수 있을 것이다. 애정의 눈길을 보낸다면 비로소 보여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 머리칼인가. 왜 털 뭉친가. 왜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형태인가. 분신이라고는 하지만, 분신이 도대체 뭔가.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산다고 했다. 거울을 보면 그 속에 또 다른 내가 있다. 나를 닮았지만 내가 아니다. 자기_타자다. 그런가 하면 현재하는 내가 과거 속의 나와 만나기도 한다. 자기반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일이고 실제로도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나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유령들과 산다. 후회하는, 상실된, 미련으로 남은, 돌이킬 수 없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억압된, 무의식으로 밀려난, 비록 의식하지 못하지만 무의식 그러므로 몸은 기억하고 있는, 그렇게 시시각각 데자뷰(설핏 나를 본 것 같은 착각)를 불러일으키는 유령들이다. 

프로이트는 두려움을 머리칼이 일서서는 것으로 표현했다(통속적으로도 그렇게 표현한다). 친근한 것이 생경해질 때(언캐니), 자신이 낯설어질 때(실존주의의 자기소외), 억압된 자신과 맞닥트릴 때(억압된 것들의 귀환과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되돌아온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 머리칼이 일어선다. 머리칼을 닮은, 털 뭉치를 닮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작가의 분신은 아마도 이 에피소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꼭 공포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그 자체 형태도 색깔도 없는 자기반성적인 기질과 존재론적인 물음(성찰)이 육화된 경우로 보면 좋을 것이다. 자기_타자, 분신, 무의식적 자기, 몸이 기억하는 자기 그러므로 어쩌면 원형적 자기를 표상하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단순하게는 존재의 정수에 해당하는 머리에 착안한 형태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분신이 작가가 그린 그림 도처에 서성거리고, 지켜보고, 번민하고, 부유한다. 


작가는 심곡동에서 유년의 상당 부분을 보냈다. 심곡은 깊은 계곡을 의미하며, 순우리말로는 깊은 구지(그 자체 근작의 주제이기도 한)라고 한다. 현재에는 반곡동에 사는데, 인근에는 둔곡이 있고 사곡이 있으며 지곡이 있고 백곡도 있다. 한때 능곡에서도 살았었다. 내가 사는 삶의 터전에는, 내가 지나쳐온 삶의 길 위에는 왜 이처럼 곡이 많을까, 혹 곡은 나의 인격과 무슨 의미심장한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 의문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환경결정론에 의하면, 환경이 인격을 결정한다). 

주변을 둘러봐도 지명에 유독 곡이 많기는 하다. 아마도 자연스러운 지형에 따라 붙여진 우연한 지명일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쉽게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 작가를 붙잡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일이 작가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게 일련의 곡 시리즈를 매개로 작가는 어느덧 중년에 이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한편, 이를 계기로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보편적인 물음을 물어 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외적으로 보아 풍경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곡 시리즈는 대개 능선과 공지선을 경계 삼아 화면 아랫부분의 땅과 화면 윗부분의 하늘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에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에 해당하는 형태가 때로 땅 위에 그리고 더러 하늘 위에 아니면 경계 위에서 서성이고 있다. 땅은 대개 파헤쳐진 벌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데, 실제 지형에 충실한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몸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곳에 대한 몸의 흔적을, 몸의 기억을 그린 것일 터이다. 

어떻게 그런가. 여기서 메를로 퐁티의 우주적 살 개념이 도움을 줄 수 있겠다. 주체와 객체는 우주적 살로 덮여 있어서 서로 분리할 수가 없다. 주체의 의식과 무관하게 주체는 이미 객체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객체가 없으면 주체도 없다. 그렇게 객체는 주체를 이미 자신의 일부로서 예정하고 있었다. 비록 거기에 지금 나는 없지만, 내 몸(몸의 흔적, 몸의 기억)이 풍경의 살이 되어 거기에 여전히 그대로 간직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곳을 방문하는 행위는 그 풍경의 일부인 나와 재회하는 것이 된다. 아니면 그저, 아니, 이마저도 이러한 사실(어쩌면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만, 파헤쳐진 채 벌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풍경 자체를 사실은 작가의 황량한 마음을 풍경에 투사해 본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땅 위에는 얼핏 점 같기도 하고 작은 막대 같기도 한 비정형의 형태가 패턴을 이루고 있는데, 차양막을 설치하기 위해 그리고 줄을 치기 위해 밭에다 심어 놓은 막대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실제 풍경의 일부를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혹은 이보다는 그곳에 얽혀 있는 작가의 흔적을, 일종의 심상 흔적을 표상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이, 유독 늪(늪의 언어)이 많고, 습지가 많고, 사구(사구가 보이는 풍경, 모든 것은 사막에서 마친다)가 많다. 그리고 여기에 곡까지.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바짝 마른 명확함을 보여주고 싶지만, 정작 그런 명확함과는 거리가 먼 곳들이다. 늪도 그렇지만 습지도 하나같이 물인지 뭍인지 경계가 불명확한 곳이다. 그런가 하면 사구란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가변적인, 변화무상한 모래언덕이다. 그래서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 

여기에 곡은 어떤가.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은 천 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식을 표상한 것인데, 의식은 표면과 이면이 천 개의 주름으로 접힌 주름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표면의 의식과 주름 속에 숨어서 의식의 레이더에는 포착되지도 않는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식을 간섭하는 의식의 그림자, 의식의 함정, 의식의 지향호(메를로 퐁티)라고 해야 할까(비록 이로 인해 비로소 의식이 가능하고 또한 수정되기도 하지만, 여하튼). 

바로 작가가 실제의 피부로 체감하는 삶의 질감이 그렇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이상과 실제, 표면과 이면의 거리감을 느낀다. 때로 표면과 이면이 뒤집힌 채 혼성되는 삶, 경계 위의 삶,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삶의 그림자를, 양가적이고 가변적인 삶의 함정을 실감하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분신이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한, 그저 머리칼 같고 털 뭉치 같다는 막연한 이름으로 부를 수밖에는 없는, 그런, 유보적인 상황 논리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런, 유보적인 상황 논리를, 다만 상황 논리가 유보적이어서 그렇지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인 조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작가만의 아이덴티티가 있고 미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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