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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리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고충환



이지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리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불시에 안개가 찾아오곤 했다. 사실 그 안개는 불안이었다. 그렇게 불안은 내게 안개처럼 찾아왔다가 걷히고 다시 찾아왔다가 걷히는, 잡히지 않는 그물망 같았다...불안 자체를 끌어안고 그 감정을 응시하고 싶다. 불안은 내게 해소해야 할 대상이 아닌, 삶의 동력이자 화해해야 할 대상이었다. 
(작가 노트) 

루이스 부르주아는 상처가 자신의 조각을 만들었다고 했다. 작가에게 상처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포옹하고 쓰다듬고 친해지는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이고 대상이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식으로 말하자면 타자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맞아들이는 과정이었고, 환대해야 할 손님이었다. 

작가 이지선의 작가 노트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증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작가에게 상처는 곧 불안이었다. 작가에게 불안은 상상력을 자극해 이야기를 지어내게 만든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예술은 서사 곧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그러므로 상상력을 자극해 이야기를 꾸며내게 만드는 불안은 작가의 회화가 유래한 원천이고 동력이라고 해도 좋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불안? 세기말적인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론적인 불안이야말로 다름 아닌 상상력의 원천이라고 보는 한편으로, 상상력이 예술의 원인임을 인정한 보들레르와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이처럼 상상력의 밑바닥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러므로 어쩌면 상상력과 불안은 한 몸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처럼 불안이 밀어 올린 상상력으로부터 초현실주의가 개화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여기서 작가의 그림이 왠지 초현실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초현실주의도 문학적이고 작가의 그림 또한 문학적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동화적이라고 해야 할까. 동화도 문학의 한 형식이다. 그림이 있는 문학 혹은 그림으로 풀어낸 문학이라고 해야 할까. 동화가 어린아이의 문학임을 인정한다면, 유아적인 심성으로 그린 그림이고, 유년의 기억을 좆아 서사 그러므로 이야기로 풀어낸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정도 초현실적인, 반무의식적인, 자동기술적이고 자유 연상적인, 의식의 흐름을 좆아 그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앞서 예술은 서사 곧 이야기의 기술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어쩌면 저마다의 사연을 저만의 형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가 유래한 원천에 해당하는 이야기, 근원적인 이야기, 원형적인 이야기, 이야기들의 이야기가 있다. 영웅신화와 성장 소설이 그것이다. 그 원형적인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하이데거는 존재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진다고 했다). 그 앞에는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고, 때로 위인이 나타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그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여기서 목적지는 출생의 비밀일 수도, 생의 과업일 수도, 때로 낭만주의 신화(예컨대 비극적인 사랑과 내세를 기약하는 사랑에서 그 전형적인 경우를 확인해볼 수 있는)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현실원칙을 넘어서는 이상향일 수도 있다.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처럼 원형적인 이야기가 변주되고 확장된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서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는가. 여기에 칠흑 같은 밤 위로 꿈을 꾸듯 가물거리는 도시의 불빛이 내다보이는, 아마도 달빛으로 환한 사구(모래언덕)가 있다. 사구와 도시 사이에는 수풀이 가로막고 있고, 사구의 표면에는 누군가의 발자국이 연이어져 있다. 아마도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작가의 발자국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 동화되고 감정이입 된,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가 찍은 발자국일 것이다. 그렇게 정황상 작가는 사구 쪽에 서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작가는 이 그림을 <경계의 계절>이라고 부른다. 무슨 경계? 도시와 사구 사이에서 경계를 이루는 숲은 아마도 사구에서 도시 쪽으로 건너가는, 유년에서 어른들의 세계로 건너가는(자크 라캉이라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건너가는), 무의식에서 의식 세계로 건너가는, 이상향에서 현실 쪽으로 건너가는, 낮에서 밤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거쳐야 할 통과의례를 상징하며, 그 과정이 알 수 없는 불안과 막연한 두려움을 자아낸다. 여기서 작가가 건너가야 할 밤은 미증유의 세계를 상징하고, 도시는 현실원칙이 지배하는 현실을 상징한다. 사구에는 정주를 상징하는 오두막이 있고, 여정을 상징하는 나룻배가 있다. 그렇게 작가는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자신만의 이상향에 당도한 줄 알았는데, 다시금 현실이, 칠흑 같은 밤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사구에 정주해야 할까. 자신의 이상향에 머물러도 될까. 그렇게 작가에게 현실은 요원한 일일까. 그런데, 칠흑 같은 밤에 잠긴 도시의 불빛이 꿈이라도 꾸듯 아롱거린다. 비록 현실원칙이 지배하는 도시이지만, 꿈을 꿀 수는 있다. 현실을 살면서, 또 다른 이상향을 꿈꿀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이상향과 현실원칙을 대비시키면서, 동시에 화해의 여지를 열어놓는다. 

한편으로 이상향을 의미하는 유토피아는 원래, 없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왔다. 그런 곳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상향 자체는 불가능한 기획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가능한 기획을 꿈꾸고 심지어 실천하기조차 하는 것에 삶의 모순이 있고 존재의 부조리가 있다. 그리고 예술은 이처럼 불가능한 기획을 꿈꾸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삶의 모순을 드러내고 존재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행위와 관련이 깊다. 

그렇게 모순과 부조리가 경계의 틈새에 움튼다(다시 라캉을 인용하자면,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 상징계와 억압된 상상계 사이에 움트는 실재계, 그리고 그렇게 상징계의 현실원칙을 위협하는 실재계의 돌발적인 출현, 예기치 못한 출현으로부터 잔혹동화가 예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잔혹동화는 이런 존재론적인 모순과 부조리가 억압을 정산하기 위해 되돌아온, 프로이트로 치자면 억압된 것들이 귀환한 것일 수 있다. 비록 동화적인 서사와 형식에 바탕을 둔 작가의 그림이 그 지경까지 갔다고는 할 수가 없지만, 여하튼). 그러므로 예술가를 이런 경계와 사이, 그리고 차이에 민감한 경계인이라고 해도 좋고, 그 의식(그 자체 자의식이라고 해도 좋을)을 일종의 경계인 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는 일부 실내를 그린 그림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숲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 많다. 그리고 강을 건너고 다리를 건너는 그림도 있다(경계의 계절, 검은 안개가 피어나면,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용기의 파도, 아무도 찾지 않는 숲, 나의 선택, 고요한 세계, 경계의 밤, 깊은 숨, 밤에 명상을, 숨은 숲, 깨어나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는 아마도 작가의 자화상이지 싶은(아니면 기억으로 되불러낸 유년의 초상?) 소녀들이 등장하는데, 그림에서 소녀들은 등을 보이며 숲을 향해 서 있거나, 숲을 가로질러 가거나, 숲에서 막 걸어 나오고 있다. 

여기서 숲은 아마도 미증유의 세계를 상징하며, 존재가 유래한 원형을 상징하며, 현실원칙과는 배치되는 억압된 무의식을, 원초적인 욕망을, 상상력을 상징한다. 그 숲에서 걸어 나오는(깨어나는), 작가의 숲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인데, 비록 숲이 상상력을 잉태하고, 욕망을 잉태하고, 무의식을 잉태했지만,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 자신을 잉태했지만, 작가는 상상력이 두렵고, 욕망이 두렵고, 무의식이 두렵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 자신이 두렵다. 여기서 작가는 이중적으로 분리된다. 현실원칙을 사는 자기(페르소나 그러므로 가면 주체)와 원형적인 자기(아이덴티티 그러므로 억압된 주체)로 분열된다. 

그렇게 현실원칙을 사는 자기가 볼 때 원형적인 자기, 억압된 자기,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_타자가 두렵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작가의 그림에서 불안은 분열된 자기가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불안은 작가로 하여금 자기를 표현하도록 밀어 올린 원인이면서, 동시에 억압된 자기와 만나고 원형적 자기를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작가의 그림에는 붓질과 함께 부분적으로 마블링 기법이 도입되는데, 마블링 기법이 화면 위에 비정형의 얼룩을 만든다. 그 얼룩이 미증유의 세계를 닮았다. 그리고 작가는 이쪽에서 저편으로, 미증유의 세계를 헤엄쳐 지나간다. 그렇게 작가는 이상향에 가닿을 것이고, 사실은 그곳에서 억압된 자기, 원형적 자기와 만날 것이다. 정신분석학으로 치자면 불안의 원인인 외상과 그리고 불교로 치자면 진정한 자기(진아)와 만날 터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비록 개인사적인 경험을 그리고 아마도 유년의 기억을 소환한 상상력을 그린 것이지만, 그 경험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상상력이 보편성을 얻는다. 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 저마다 자기 내면의 불안과 불안정한 유년의 기억과 모순과 부조리로 점철된 존재론적 조건과 대면하게 만든다. 그렇게 사람들 저마다 지나쳐왔을 성장 서사의 전형을 예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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