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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뉴드로잉 프로젝트, 드로잉은 어떻게 심플을 구현하는가

고충환



제6회 뉴드로잉 프로젝트, 드로잉은 어떻게 심플을 구현하는가 



공모전 형식의 뉴드로잉 프로젝트가 올해로 제6회째를 맞았다. 공모전도 많고 수상 제도도 많지만, 대외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다면 권위는 어디서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 선정된 작가가 모든 면에서 공감할 만해야 하고, 여기에 특화를 통해 차별화와 변별성을 기할 수 있다면 더 좋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특화를 지향했다가 이후 점차 흐지부지된 다른 경우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특화를 실제로 실행하고 지속하기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무턱대고 특화를 한다고 해서 특화가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다. 먼저 개념이 서야 하고, 방향이 정립되어야 하고, 정체성 문제를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주최 측의 일관성과 지속성이 더해져 최초 느슨한 개념을 더 단단하게 벼르는 과정이 있어야 공모전도 성공할 수 있고, 수상도 생산적인 그리고 유의미한 제도로 정착될 수 있다. 

뉴드로잉 프로젝트는 주지하다시피 드로잉으로 자기를 특화했다. 그리고 드로잉은 공모전을 주최한 장욱진 미술관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이 깊다. 널리 알려진 것이 고 장욱진 선생은 살아생전 기회 있을 때마다 심플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드로잉은 심플을 실천해 널리 알리는 일이 될 것이고, 이 일이 곧 고인의 유적을 받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핏 드로잉은 심플을 풀어낸 형식처럼 보이고, 그러므로 심플과 드로잉은 하나로 부합하는 것 같지만, 문제는 간단치 않다. 도대체 심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심플은 정신적 가치인가, 아니면 형식적 개념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입장과 태도와 관련된 문제인가. 아마도 이 모두에 다 해당할 것이다. 

그 대략적인 의미를 짚어 보자면 심플은 단조로운, 단순한, 절제된, 군더더기가 없는, 말이 필요 없는, 말보다 의미보다 먼저 있는 그래서 예시(그리고 예지)적인, 함축적인, 암시적인, 열려있는, 격이 있는, 유격이 있는, 유유자적한, 유연한, 비 혹은 반 결정적인, 변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가변적인,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충만한 공, 충만한 허, 충만한 무와 같은 자기 모순적인 개념과 정의들을 아우를 것이다. 결정화할 수 없는 것을 결정화한, 그래서 여전히 결정화할 수 없는 것이 전혀 억압되지 않은 채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암시적인 형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말을, 의미를, 개념을, 논리를 넘어선 지경이며 차원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너무 애매모호 한가. 두루뭉술한가. 그리고 여기에 때로 자기 모순적이기조차 한가. 그러나 어쩌랴. 다름 아닌 여기에 예술의 숨결이 있고, 미덕이 있고, 생명이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여하튼 그렇게 심플의 열린 개념이 즉흥적인, 즉각적인, 즉발적인, 논리보다 생각보다 먼저 오는, 직관적인, 몸적인, 우연적인, 우연을 가장한, 정도를 의미하는 드로잉의 개념과 그 의미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 결정화하는 것은 예술의 숨통을 틀어막는 일이다. 예술의 숨길을 열어주면서 심플과 드로잉의 개념이 만나는 접점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의 범주를 좁혀 나가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 모색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여기에 뉴드로잉 프로젝트의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번 공모에는 총 107명의 작가가 참여하여, 그중 20명의 작가가 선정돼 전시를 열었다. 그 경향을 보면, 먼저 드로잉의 개념에 충실하면서도 확장 가능성을 예시해주는 경우들이 있었다(김지민, 윤정민, 이준학, 이진영, 정유미, 정윤조, 홍예진). 그중 윤정민은 철사로 얼굴 형태를 만들고 벽에 걸었는데, 그림자를 조형의 한 요소로 끌어들여 형태를 확장한다. 이와 함께 철사로 형태를 만든 후 그 위에 석고를 덧발라 만든 인체 형상도 있었는데, 입체이면서 평면성을 유지하고 있는, 입체와 평면을 아우르면서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가 드로잉의 본성에 부합하면서 드로잉의 개념을 재고하게 만든다는 생각이다. 

입체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조각을 제안한 경우가 있어서 주목된다. 이진영의 조각으로, 산의 모형 같기도 하고 수석을 변주한 것도 같은 형태를 보여준다. 원본을 따지지도 사본을 묻지도 않는, 무한복제가 가능한 그림문자를 의미하는 이모지에 착안한 것이 이미지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을, 어쩌면 가상현실 시대에 이미지의 존재 방식을 예시해주는 것이 흥미롭다. 

그리고 정유미는 물과 섬과 바람과 구름 같은 자연과의 교감을 때로는 순간적인 필치로 그리고 더러 섬세하고 감각적인 화면으로 표현했다. 그 존재며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이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가 하면 정윤조의 영상 애니메이션은 디지털 드로잉이라는 새로운 개념 혹은 방법론을 예시해주고 있는데, MZ 세대의 시대 감정을 소재로 공허한 현실을 표현했다. 또한 홍예진은 한눈에도 억압된 무의식을 그린 것 같은, 초현실적인, 악몽 같은, 낯선, 자기반성적인 일종의 거울 경험을 그렸다.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산다고 했는데, 아마도 자기_타자와의 예기치 못한 만남을 의미할 것이다. 친근하면서도 낯선,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자기감정을 형상화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이준학은 도형 드로잉을, 김지민은 역드로잉을 각각 예시해주고 있는데, 드로잉의 확장 가능성이 엿보이지만, 아직은 개념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아 좀 더 지켜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드로잉은 즉흥적이고 즉각적이고 즉발적인 것인 만큼, 마치 휘발되는 시어처럼 생각의 흔적들이 모이기보다는 산발적으로 흩어질 수 있다. 그 자체로 순간적인 그리고 날 것 같은 생명력을 담보하는 것인데, 강정민, 강현신(영상), 유재식(잉크젯 프린트), 이지안(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의 작업이 그렇다. 그렇다면 이처럼 파편화된, 편집된, 재구성된 이미지는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는 지금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를 살고 있고, 정보가 과부하 된 시대를 살고 있고, 가상현실이 공공연한 현실을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이미지의 출처를 따지고 오리지널리티를 캐묻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하고 공허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 감정에 부합하는 이미지의 또 다른 존재 방식과 양태를 예시해주는 경우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드로잉은 원래 설계도, 개념도, 청사진, 밑그림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실제 그림을 그리기 전에 밑그림을 먼저 그려보는 것인데, 어쩌면 화가들이 습관처럼 머릿속에 그리는 그림 그러므로 허공의 드로잉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림, 관념으로 그린 그림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의미 속엔 회화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환원주의적 발상이 놓여 있고, 그 연장선에서 최근의 한 경향인 펜슬리즘을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거저 종이에 연필로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연필 하나면 충분한 그림, 연필을 위해 최적화된 그림, 연필을 위한 그림, 연필이 형식이 되고 장르가 된 그림을 의미할 것이다. 

김유진, 유효진, 이승연의 그림이 그렇다. 그중 김유진은 일종의 개념 드로잉으로 범주화할 만한 경우를 예시해주고 있다. 피아노 건반을 치는 손을 소재로 마치 이미지 정보를 복제한 것 같은 반복적인 그림이 그렇고, 여기에 청각 정보와 시각 정보가 서로 통하는 공감각이 실험되고 있는 부분도 주목해볼 일이다. 그리고 꽉 막힌 수문과 동상의 부분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유효진의 그림은 견고한 느낌과 함께, 뭔가 정적인 가운데 불안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왠지 불안정한 시대 감정을 빗댄 것 같은 알레고리적인 인상을 준다. 또한 스냅사진을 연상시키는 이승연의 그림은 마치 흔적을 붙잡는 것 같은, 흑백의 실루엣으로 나타난 그림자가 환기하는 정서가 실체이고 소재인 것 같은, 특유의 대상성과 함께 암시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김병준이 감정을 이입한 익명의 초상을, 오예진이 무의식에서 길어낸 내면의 풍경을 예시해준다. 또한 김소헌과 이희원은 각각 꽃과 선인장을 소재로 일종의 사물 초상화(식물 초상화?)로 유형화할 만한 경우를 예시해준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자연은 이제 풍문으로나 떠돌 뿐, 본연의 의미를 상실했다. 그렇게 얼핏 봐서 조환지 생환지 헷갈리는 시대 감정을 매개로 자연의 의미를 재고하게 만든다. 그리고 윤산이 미디어를 소재로 공허한 일상을, 이윤빈이 휴게소를 매개로 공허한 파사드를 예시해준다. 뻔한 말과 뻔한 위로를 지칠 줄도 모르고 반복 송출하는 미디어 위로, 겉치레적인, 키치적인 가게 장식 위로 공허한 공기가 흐른다. 


그렇게 전시에는 회화, 설치, 미디어를 망라한 5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중에는 한눈에도 드로잉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 경계와 구분은 아직도 설정 중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형식과 장르를 기준으로 드로잉을 감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고, 여기에 열린 개념, 열린 의미에 바탕을 둔 예술의 생리에 드로잉의 생리가 부합한다는 점이고, 그러므로 드로잉이 예술의 열린 생리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어쩌면 드로잉의 개념과 범주는 이런 머릿속 그림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러므로 생각의 흔적을 넘어 생각 자체를 포착하고 아우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 뉴드로잉 프로젝트의 존재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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