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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 / 자연법칙이 그린 ‘순결한’ 회화

박영택

박성환은 주어진 캔버스와 아크릴물감과 물, 바람과 중력, 그리고 그 틀을 잡고 있는 자신의 신체의 관여로 인해 이루어진 어떤 흔적, 회화를 만든다. 그것을 그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분명 작가의 의도와 개입이 있겠지만 정작 그림을 그리는 주체의 실질적인 행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작업의 결과물은 작가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지고 형성된 것이다. 사실 모든 그림이 작가의 계획적인 의도에서 출발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그것과는 무척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이른바 ‘프로세스아트’ 같은 경우는 그런 과정 자체를 실질적인 작업으로 껴안고자 한 것이다. 또는 작업하는 과정에 예기치 않은 개입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도 있다. 박성환은 그보다는 작가의 손을 전적으로 배제한 그림을 그려/만들어 보이고 있다. 화면에는 자연스레 물감의 흐르고 씻겨진, 지워진 듯한 자취만이 남아있다. 외형적으로는 비대상회화, 추상화지만 단지 그것으로 귀결되지는 않아 보인다. 또한 작가의 의도적인 행위라고는 사인이 눈에 띄는 그림이다. 하단 중앙에 그려진/쓰여진 사인은 박성환이라는 본인의 이름인데 한문과 한글, 점을 섞어서 만들었다. 사실 그것을 지시하는 물감의 층도 물에 씻겨져서 부분적으로 응고된 자취만 붙어있는 형국이다.

이런 유형의 작업은 그가 시카고아트대학원에 유학하던 9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바닥에 놓인 캔버스위에 물바가지를 둘러엎어 우연히 이루어진 ‘이상한 그림’이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카오스이며 액체 상태인 물감은 그릇에 담아 찍어내 마블링이 된다. 즉 평면은 논리적으로 액체 상태의 물감을 잡아 둘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번지기, 흘리기, 뿌리기 등의 기법에 그쳤던 것이다. 내 그림의 독창성은 캔버스 천의 탄력성을 포착한 데 있다. 액체 상태의 물감양이 많아지면 무게 때문에 중력에 의해 캔버스 천이 일시적으로 움푹 들어가 둥근 그릇 역할을 한다. 이것이 건조되면 평면으로 회귀하는데 그 과정을 변화시켜 이미지를 만들어낸 원리에 모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작가노트)
당시 그 작품이 평면의 새로운 차원, 다시말해 실시공의 세계를 연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 이후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그 작품을 심화, 발전시켜 현재에 왔다.

박성환의 그림은 구체적인 대상, 또는 무엇을 전제로 해서 그려진 그림이 아니다. 그는 만들거나 그리는 일체의 행위를 배제한다. 그것들은 결구 인위적이기에게 그렇다. 그렇다면 인위성을 지우고 극도의 순결성, 실재성을 이루는 회화는 가능한가? 이 불가능해 보이는 회화를 박성환은 본인이 최초로 이루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는데 그 이유는 순결하고 거룩한 정신과 화면을 얻기 위해서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룩하기 보다는 자연/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의도 같다. 그는 무척이나 독실한 카톨릭신자다. 그는 강박적일 정도로 순결과 순수를 주장한다. 어떻게 그런 회화는 가능한 것인가?
우선 그는 철저하게 이미 주어진 것을 사용한다. 공장에서 생산된 캔버스와 물감을 그대로 이용한다. 여기에 자신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변형하거나 인위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 다음에 바닥에 눕혀놓은 주어진 캔버스의 표면을 단색으로 칠해서 바탕을 마감한다. 이 무심하게 칠하는 행위는 그리는 일이 아니라 관례적인 행위이기에 인공과 인위성에 따른 순결성의 침해를 벗어난다. 그의 이 직선으로만 이루어진(곡선은 인위적이기에) 바탕칠은 ‘자연을 발생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는 바탕면을 칠한 화면 위에 성수를 탄 물감을 떨어뜨린 후 선풍기 바람을 이용해 유동적인 상태로 몰고 간다. 더러 빨대와 주사기가 동원된다. 빨대를 불어 바람을 일으키는 행위도 자신의 숨쉬기(영혼)라는 자연스러운 호흡작용이 화면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그렇게 액체물감의 농도, 화면의 기울기, 선풍기 바람의 강도 등 자연적인 조건이 화면에 어떤 흔적을 만들어나간다. 선풍기는 액체의 물감에 바람의 힘을 이용해 압력을 가하고 그 자연적 조건에 반응해 물감의 입자는 퍼지고 번져나간 후 응고된다. 이는 마치 성령(바람)이 주관해 이룬 이미지가 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것은 자연이 만든 이미지이자 흔적이다. 주어진 사각형의 안에 자연, 우주를 끌어들여(작가에 의하면 신의 섭리)결코 인공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선풍기 바람과 함께 작가는 화면을 이리저리 기울이는가 하면 물에 씻기도 한다. 그로인해 화면에는 물감의 흐름, 갈라짐, 물감층의 뒤집어짐, 기포, 커다란 둥근 형태 등이 나타난다. 만들어진다. 작가의 손/행위가 아니라 자연이 그렇게 만든 우연적이면서도 신비스런 자취다. 그 자취는 행위가 배제되고 자연의 개입으로 이룬 것이고 바람의 개입, 공기 입자의 충돌과 속도와 시간, 중력의 작용 그리고 캔버스 천의 탄성과 물리적 요소 같은 것들이 총체적으로 상호작용을 일으켜 이룬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과학적인 법칙에 조응해 그려나간, 만들어나간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이 작업은 우주 전체로 한 것이기 때문에 “실시공 에너지 자체이며 순결 자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순결성이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이며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순결성은 “신성이 결합된 순결성”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자신의 그림이 영성적이라고 확신한다. 결과적으로 화면에는 시원한 여백을 배경으로 기이한 원형의 이미지가 남았다. 자연법칙이 개입해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이 이미지는 물감의 층이 물에 씻겨서(이 역시 중력의 작용이다) 지워지고 바닥에 남은 흔적들이다. 결국 물감이 지워진, 사라진 자리에 가장자리가 원형인 이미지가 문득 남은 것이다. 이 저절로 생겨난 둥근 흔적(물감의 입자)은 씻어낸(회개나 세례, 空과 같은 의미가 부여됨) 결과물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지운 것, 씻어낸 것이 결과적으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로인해 마치 원형(태양 이미지)이 스스로 눈물을 줄줄 흘리는, 피를 흘리는 형국이 남아있다. 이 흔적은 그에 의하면 정신적이고 신비적인 차원의 표상이 된다. 그래서 그는 “신성을 회화가 되게 했다”고 말한다.
그의 이 ‘성령상태’의 작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는 철저한 자신의 신념과 논리로 이 같은 그림을 만들었고 그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해졌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시각화했다. 수많은 의미를 두른 이 무거운 ‘영성적’ 그림은 분명 유례가 없어 보이는 새로운 회화의 여러 흥미로운 요소들을 겹겹이 두르고 있는 매혹적인 그림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그가 이룬 현재의 회화는 한국현대회화의 역사 안에서 어떤 시사점을 마련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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