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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 / 바람으로 형상화 한 자연

박영택

가평군 설악면에 위치한 설미재란 작은 미술관은 추경의 작업실이기도 하다. 작업실 창가로 밖을 보니 커다란 산이 한 눈에 가득 막아선다. 사방이 산으로 채워지고 그 중후한 물성으로 둘러쌓인 주변은 마냥 고요하고 적막한데 그 사이로 서늘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몸을 섞고 있다. 바람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맑은 공기와 청량한 바람은 이런 깊은 자연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축복 같은 것이다. 추경이 이곳으로 온지 약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동안 그녀는 이곳의 바람과 햇살을 식물처럼 받아들여 살았으며 주변 풍경을 몸으로 기억해왔다. 마치 식물이 광합성을 하듯 그녀 역시 바람과 공기, 햇살과 눈(설악이란 지명에 어울리게 이곳은 겨울에 눈이 무척 많이 내리는 곳이다), 나무와 풀, 꽃을 빨아들이고 호흡해 자기 몸 안으로 비축해두었다. 이 자연의 모든 것으로 인해 삶이 가능했고 그림 역시 그로부터 발원했을 것이다.

추경의 그림은 캔버스 표면위로 자연을 불러들인다. 납작한 피부위로 바람과 햇살이 아롱지고 뒤섞이는 것 같다. 물감의 질료성이 기화되거나 물결처럼 흐르고 유동한다. 물감으로 이룬 그 같은 효과는 묽은 아크릴물감과 물이 만나 화면위에서 흘러 다니고 바람/압력에 의해 밀려나간 자취가 응고되어 이룬 것이다. 물리적인 육체의 관여가 아니라 자연법칙과 우연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형성되어진 것이다. 아크릴에 안료를 섞어 자신만의 색채, 미묘한 질감을 지닌 물감을 만들어 사용하고 이를 가능한 묽은 상태로 다루며 칠하다기보다는 캔버스 천 사이로 스며들게 하거나 층층이 겹쳐서 배어나오게 하는 편이다. 아울러 그 바탕면 위로 안료와 함께 돌가루가 얹혀져서 얇은 질감을 이루며 빛에 의해 반짝이는 표면효과를 연출하기도 하다. 그로인해 화면은 몇 겹의 막이 형성된다. 하늘이자 대지, 물이고 바람이고 공기의 흐름이자 구름의 자취, 비와 눈, 안개가 자욱한 대기감을 연상시키는 겹들이다. 그 사이로 문득 풍경이 다가오고 사라지기를 거듭하는 것도 같다. 블루와 핑크가 주조색으로 깔린 화면은 각각 하늘, 공기의 막 등을 떠올려주고 그 위로 흩어지는 물감의 자취들은 나뭇잎이나 꽃 등을 연상시킨다. 마치 풀밭에 누워 하늘을 보면 나뭇가지 사이로,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파고들고 부서지는 장면이 떠오르는 구도다. 그것은 밑에서 위를 쳐다본 앙시의 시점이고 작가가 즐겨 자연을 관찰하는 시선이기도 하단다. 아마도 작가는 그런 시점에서 바라 본 하늘과 햇살, 바람과 풀, 꽃들의 활력적이고 생생한 생명체의 순간적인 모습을 화면위로 옮기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자연의 총체적인 분위기와 기운, 이른바 아우라라고 부를 만한 것들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간의 작업의 화두였던 셈이다.

자연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이른바 동양화에서 흔히 말하는 기운생동에 해당하는 것, 이른바 생명체가 발산하는 호흡, 혼과 같은 것을 시각화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결국 자연에서 자신의 몸으로 체득한, 경험한 것의 시각화에 해당한다. 추경 그림의 기원과 원형은 주어진 자연환경에 있는 것 같다. 다만 작가는 시각상에 포착되는 자연의 외관을 그리는 대신에 그 내부에 자리한, 비가시적인 그러나 몸으로 받아들이고 경험한 기운의 이미지화를 추구한 것이다. 사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관찰과 반응의 그리기다. 자연은 단지 눈에 보이는 현재의 물리적 상태만이 본질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풍경을 형성한다. 자연은 생생불식하며 단 한 번도 고정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것은 매순간 변화를 거듭하고 뒤척이며 숨 쉬는 거대한 유기체다. 추경은 자신의 몸, 오관으로 체득하고 받아들인 자연의 총체적인 기운, 혼을 그림 안으로 호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결국 생명체를 가능하게 하는 비가시적 대상에 대한 시각화다.

작가는 손과 붓이란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불러일으킨 바람, 힘에 의해 물감을 몰고 다니고 흔들고 펴냈다. 화면의 피막위로 마치 바람이 불고 비나 눈이 내리거나 모종의 기운이 흘러 다니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화면은 미묘한 기운에 의해 떨어대고 흘러다니는 모종의 상황을 보여준다. 훈련되고 길들여진 손을 배제하고, 아울러 인위적인 표현을 피하기 위한 전략은 작가로 하여금 붓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화면에 흔적을 남기는 방안을 고려하게 하였다. 바람과 속도, 시간과 중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그림, 스스로 만들어지고 생성되어간 그림, 이른바 자연처럼, 생명체처럼 자기 충족적이고 완결적인 그림에 대한 갈망이기도 하다. 좋은 그림은 인위와 무위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룬 것들이다. 작가는 자연을 닮은 자연스러운 그림을 시도한다. 지연에서 받은 감동의 순간을 자연스럽게 올려놓고자 한다. 이 그리기의 막막함은 분명하게 감지하고 느낀 것들, 자연이 발산하는 아우라라는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러나 너무도 선명하고 강하게 자신을 찔렀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자 그 순간을 되살리고자 하는 안타까운 그리기이며 그 벅찬 감동의 편린을 전달하고자 하는 지난한 흔적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연에 대한 회화적 오마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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