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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무 / 어디에도 없는 풍경

박영택

 작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조용히 응시하고 관찰하며 이를 통해 일련의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곱씹는 자들이다. 그래서 미술은 우선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본다는 것은 세상을 만나고 기억하고 그것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일이자 그것과 나와의 관계를 유추해 보는 일이고 이런 식의 삶에 대해 반성하고 모든 존재와 현상의 심부에 도달하고자 애쓰는 일이다. 작가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밝은 눈, 깊은 눈을 갖고 싶어 할 것이다. 심연을 바라 본 고래의 충혈된 눈 같은 것 말이다. 그림은 궁극적으로 그런 눈의 깊이와 폭, 성찰의 아득함 속에 비로소 몸을 내민다. 한편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계를 바라보는 행위는 결국 이미지를 만나는 일이다. 작가란 존재는 특정한 이미지를 통해 사유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이미지를 수집하고 재현하고 그것을 통해 발언하고자 한다. 그러니 작가는 이미지를 찾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미지를 그리는 이가 작가지만 동시에 그들은 매혹적인 이미지를 수집하는 이들이다. 생각해보면 세계, 특히 현대인들의 주된 삶의 거처인 도시공간은 무수한 이미지로 둘러 쌓여 있다. 상당수는 체제와 권력, 그리고 자본과 소비사회가 강제하는 욕망의 기호들이자 온갖 상품미학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기호들 속에서 현대인의 삶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도 하다. 작가란 존재는 그런 이미지들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시각이미지를 생산하는 이들은 동시에 시각이미지가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인 것이다. 아울러 이미지 생산을 주업으로 하는 이들에게 동시대의 대량생산되는 기계적 이미지, 상품이미지는 엄청난 이미지의 보고이기에 그 이미지를 채집하고 이에 기생해나가는 다양한 작업들이 산출된다. 그러니까 스스로 무엇인가를 창조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이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조작하는 일이 창조적인 작업을 대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기존 이미지를 번안하고 각색하는 일이자 이를 재편집, 재맥락화 하는 일이다. 이미 뒤샹으로부터 초현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현대 미술 자체가 그러한 재맥락화의 시도로부터 출현해왔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자리바꾸기, 전도, 낯설게 하기 등의 전략이 현대미술의 주된 방법론이 되었다. 

 김형무는 어느 날 우연히 창밖으로 현실풍경을 접했다. 늘 보는 풍경이지만 그날 그가 본 풍경은 무척 낯설게 다가왔고 많은 상념과 반성을 거느렸던 것 같다. 창 밖으로는 온갖 군상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순간 창 안쪽과 창 바깥 쪽의 경계가 무너지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그는 실내에서 창 너머의 풍경을 은밀히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던 것 같다. 도시공간에서 제각기 바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어딘지 공허하고 그림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도시공간이 무엇인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누군인지 말이다. 그는 자신이 바로 본 그 풍경에 덧붙여 그로인해 연상되고 느낀 장면을 오버랩했다. 그렇게 해서 현실적이면서도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공간, 풍경화가 탄생했다. 선과 색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공간, 풍경을 설정한 후 그 사이에 무척 작은 인물과 숲(나무), 기둥, 도로표지판 등을 암시적으로 배치했다. 초기에는 그러한 이미지를 잡지에서 추출해 콜라주했다면 근작은 이를 직접 손으로 그리고 있다. 오랫동안 작가는 잡지나 인쇄매체를 통해서 흥미로운 이미지를 찾았다. 이는 틈틈이 창밖을 관찰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는 끊임없이 이미지를 찾는 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다. 작가는 잡지나 인쇄매체에서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채집한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 이미지들을 불러 화면에 안치시킨 후 이를 다시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손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궁극적으로 콜라주작업, 레디메이드작업이란 점에서는 이전 작업과 별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무척이나 작은 인물이 배치되는 공간은 색의 층차를 은연중 만들거나 표현성이 짙은 붓질을 남겨두면서 회화적인 맛을 고려하고 있어서 그것이 날카로운 선과 단호한 색 면을 슬쩍 흔들고 있다.  

 그가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이미지는 대부분 사람들이다. 여러 크기의 다채로운 인간상들이 선택되었다. 특정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이들은 보편적인 현대인을 상징하는 기호로 작동한다. 그렇게 선택된 사진을 캔버스 표면에 그림으로 옮긴다. 결국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간은 구체적인 누군가가 아니라 잡지에 실린 익명의 존재들이고 선택된 오브제인 셈이다. 그는 그렇게 선택한 오브제를 화면에 매우 작게 배치한다. 바탕 화면에는 풍경이 설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실제하는 구체적인 풍경, 특정 장소가 아니다. 그것 역시 익명의 공간이요 작가에 의해 상상되어진 풍경이다. 날카롭고 건조한 수직과 수평의 선으로 구획된 도시구조물 내지 실내풍경을 연상시켜주는 편인데 이 기하학적인 공간의 구획은 색 면으로 단호하게 발려져있다. 특정 공간을 연상시켜주지만 동시에 그것은 물감으로 발려진 색 층, 색의 피부이기도 하다. 화면을 다시 몇 개의 면으로 분절하고 주어진 공간에 또 다른 공간을 가설하는 순간 주어진 캔버스 표면은 기이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공간이자 추상화된 공간이고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공간, 이른바 심리적인 공간이다. 그 심리적 공간은 아마도 작가가 현실을 관조한 결과로서의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공간 연출은 다소 관념적이거나 상투형으로 빠질 수 있다. 공간에 위치한 작은 인간들은 무력해보이기도 하고 소외나 상실, 혹은 다분히 공허하고 덧없는 존재성을 부감시키는 편이다. 그러나 이 개미처럼 작은 인간 군상들은 그 차갑고 단호하게 구획된 공간 안에서 제각기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고 걸어가고 있다. 화면 속에는 어떠한 길이나 출구도 부재하다.   

 작가는 말하기를  “이 고요하고 차가운 지평선과 함께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문명의 흔적이나 파편들, 세트처럼 구성된 정치화한 콘크리트처럼 보이는 실내풍경, 그 안에 갇힌 현실적인 인간 군상들, 그것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작가 또는 관객들의 시각이 어우러져 존재한다....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낯선 풍경이면서도 이질적이지 않은 리얼리티한(콜라주 장치) 풍경, 불편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치유의 공간으로서의 풍경”(작가노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작가가 만들어낸 풍경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번잡한 사물들을 죄다 지우고 벽과 프레임만이 있는 건축물과 남겨진, 고립되고 축출된 인간의 작은 몸을 안겨줄 뿐이다. 모든 것이 죄다 사라진 후에 겨우 남겨진 이 앙상한 풍경, 세기말적이고 묵시론적인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이 풍경은 ‘마지막 풍경’과도 같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하고 삭제시키는 이유는 도시공간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삶과 의식을 조정하고 강제하는 모든 이미지, 욕망의 기호를 불식시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울러 저 멀리 겨우 자리한 숲/나무 한 그루는 자연으로부터 이탈된, 혹은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도시인의 삶을 은유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작가는 “도시의 통제를 벗어나는, 벗어나려는 풍경 그러나 결코 자연으로 회귀하지 못하는 그런 풍경”을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작가 의식의 풍경이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풍경일텐데 그래서 그는 이 풍경을 ‘사이풍경’ 또는 ‘헤테로피아’라고 부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그런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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