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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곤 / 깊은 피부

박영택

 풍경은 그것을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살아난다. 사실 사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 방식에 따라 그 외연이 달리 보일 뿐이다. 세계/풍경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마음결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풍경은 역사적이고 경험적이며 인문적이다. ‘순수한 자연풍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풍경이란 개념 속에는 주어진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 내지는 모종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서양의 풍경화란 장르와 동양의 산수화는 자연을 보는 관점의 차이, 세계관이나 존재론의 편차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자연 속에 자리한 정상곤의 작업실에는 창문 밖의 풍경이 화면에 질펀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젤이 아닌 테이블에 캔버스를 올려놓고(눕혀놓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방향을 바꿔가며 연필 선으로 그려놓은 스케치를 따라가고 있다. 이 전일적 시선 아래 다루어지는 화면은 일시점이나 원근법이 개입할 수 없다. 몸 전체가 주어진 화면, 그 표면에 순응하면서 붙어나가고 있다. 주어진 캔버스의 피부에 달라붙어 그 살을 애무하고 풍경의 표피, 껍데기를 형상화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몸, 감각이 화면 안에서 그림을 이루는 질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같은 그림그리기는 동양의 전통회화에서 가능했던 체험이다. 하늘의 시선에서 내려다보고 대지에 뭇생명체들이 발아하듯 그렇게 이미지를 가설하고 주어진 재료와 순응하는,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그림 속에서 실현되는 것 말이다. 또한 그 같은 시선은 주체의 독점적인 눈으로 세계를 조망하고 관찰하는 일방적 인 망막중심주의와는 달리 세계에 대한 개념이나 정서, 태도를 수행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몸으로 체험하고 경험하는 삶이고 그리기이다. 
 옛사람들은 삶이나 학문, 그림 그리는 일을 모두 동일한 수행의 차원에서 다루었다. 여기서 수행이란 이른바 세상의 이치 ‘도’를 깨닫고 이를 추구하는 삶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정상곤이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작업 태도, 방법을 ‘수행적 태도’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그림의 방법들, 스타일과 매너란 단지 기술적인 측면에 머물지 않고 작가의 필연적 의지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자 현실에 대한 반응, 가치와 경험에 대한 언급과 맞물려있다. 그러니 그에게 회화의 방법론, 스타일은 결국 세계에 대한 몸의  반응이고 감각의 구현이며 모종의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그 무엇이 된다. 

 그래서일까 무척 드라마틱하고 멋들어진 풍경의 전형성을 과잉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의 프레임으로 들어온 풍경들은 기존 풍경화와는 무척 다르다. 그는 깊은 산 속이나 원시림의 느낌을 주는 자연풍경을 다룬다. 자신이 직접 여행을 통해 접한 자연과 작업실 주변의 자연이 한 공간에 콜라주 되었다. 실제 하는 풍경이자 하구적인 풍경인 셈이다. 나로서는  화면 하단에 그려 넣은(더러 화면 가득 클로즈업을 해서 부각시킨) 작은 풀이나 나무가 주목된다. 아마도 그는 그 비근하고 보잘것없지만 강인한 생명력(에너지)을 지닌 존재의 소중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항상 사물/생명체가 내지르는 힘과 발산, 기운 등에 주목해왔다. 한편 기존 풍경화의 상투형 틀을 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풍경화는 상상력으로 조합된 허구의 장면이면서도 어딘지 익숙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보여준다. 사실 그것이 어떤 장소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을 보는 자신의 감정, 감각과 경험이다. 자연에서 얻은 그만의 감흥, ‘감성의 진실성’을 어떻게 화면에 그림으로 구현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그것이 그림으로 그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효과적인 회화의 방법론, 스타일이 요구된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이미 정해진 고정적이고 관습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회화는 기존의 상투형 틀에서 부단히 자기만의 감각적인 회화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다시말해 그림이란 감각의 구현이다. 한 작가의 몸, 감각이 세계와 반응해서 얻어진 결과물이 침전되어 있는 장소가 회화의 공간이다. 

 정상곤의 화면은 들끓는 질료들의 혼돈 상태를 드러낸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유동적이고 걷잡을 수 없는 속도감이나 흔들림, 눅눅한 습기와 끈적임, 떨림의 상태로 자욱하다. 격렬한 운동감이 느껴지고 시간의 흐름과 그 풍경을 대면했을 때 파생되는 감각의 멀미들이 밀어닥치는 듯 하다. 흡사 영상적으로 진동하는 화면이자 디지털적 감성이 아날로그적 그리기와 충돌하고 있는 형국이다. 유화물감을 녹이는 용매제의 과잉은 화면 전체를 습하게 만들어놓아 화면 안에 놓인 물성들은 고정되지 못하고 부유한다. 물감을 묽게 흘리고 번지고 빠르고 격렬하게 붓으로 긋고 칠하고 문질러댄 자취들만이 가득하다. 필연과 우연이 공존하고 이미지와 질료가 넘나들고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혼재하고 표면(껍질)과 깊이가 뒤섞이는,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회화다. 몇 겹의 층을 이루는 표면의 흔적이 얼핏 산과 바위, 폭포와 나무, 풀들을 떠올려준다. 그것들은 대기감 속에 아득하게 펼쳐져있고 습기와 바람, 훅 하고 덤벼드는 숲의 눅눅한 내음, 물소리 등을 환각적으로 안겨주는 편이다. 그림을 이루는 존재론적 조건인 물질과 용매재, 그리고 물리적인 법칙의 순응과 함께 몸놀림, 그림 그리는 매 순간 개입하고 반응하는 몸의 감정, 감각의 층차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흔적으로 가득하다. 경험했던 자연풍경을 기억하고 그림 그리는 순간 창문밖에 자리한 자연풍경을 바라보면서 파생되는 감정들을 수렴해서 매순간 펼쳐지는 물감의 물질적 기호들로 그려내고 있다. 나는 오래전에 그가 제작했던 일련의 석판화가 떠올랐다. 그 회화적 자취로 홍건했던 석판화 스타일의 현재의 풍경화에 오롯이 환생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예술은 모종의 깊음을 갈망하는 일이다. 그러나 깊음은 납작하고 평평한 화면/표피와는 상충되는 수직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은 수평에 수직을 세우고 깊이를 파고 무한히 횡단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림은 그 얇은 표면에 엄청난 깊이를 파는 일이고 날카로운 감각을 새기는 일이다. 그래서 회화는 ‘깊은 피부’를 만드는 일이다. 평면은 분명 그림의 실존적 조건이자 제한된 공간이다. 그 평면에 감각의 줄을 긋는 일, 깊이를 만드는 일이 바로 그림그리기다. 그림을 그려나가는 수행적인 시간은 물감과 붓질/몸짓을 통해 깔린다. 여기서 색과 붓질(몸짓)은 감각적인 회화에 관여한다. 윤곽을 지닌 확고한 외곽선에 의해 지탱되는 그림은 기하학이나 이성에 관여한다면 아울러 이미 선험적인 코드에 의해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라면 정상곤이 보여주는 유동적인 붓질, 떨리는 몸짓, 흔들리는 시간, 꿈틀대고 녹고 번지는 색채는 감정과 감각을 우선하면서 세계를 몸으로 반응해 받아들이고 내뱉기를 거듭한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자연처럼! 

 그는 캔버스에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그가 경험한 날것의 풍경, 그 풍경의 살과 내음을 표현하는 그만의 회화를 만들고자 한다. 그것은 있는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으로 세계를 세우는 일이다. 기존 풍경화/회화라는 코드를 부단히 벗어나거나 갱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상곤은 여전히 전통적인 매체인 캔버스와 유화, 붓을 통해 그리고 아날로그적인 그리기를 수행 하면서, 저 역사적인 풍경화를 다시 그린다. 그러나 그는 풍경을 다시 읽고 스타일을 문제 삼는다. 납작한 캔버스 표면에 감각의 줄질을 한다. 그래서 화면위로는 감각의 묘선들, 혼잡한 감각들이 이룬 붓질, 색채, 질료덩어리, 몸의 놀림들이 지나가고 얹힌다. 그가 칠한 색과 질료덩어리는 단지 윤곽선으로 이루어진 내부를 채우거나 장식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순수 상태의 회화적 사실을 구현해낸다. 자기 몸의 감각으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 세계/풍경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토록 얇은 표피위에 무한한 깊음을 갈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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