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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를 만드는 만남

박영택

 한국에서 ‘미술’(ART)이란 행위는 20세기에 들어와 시작되었다. 개화기의 서양문물의 수입과 더불어 미술이란 개념(19세기 유럽에서 정착된 역사적 개념)과 그 행위가 들어오고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동반하면서 수용되었다. 한국의 근대화는 이렇게 낯선 타자와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낯설음은 호기심과 두려움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동반한다. 지금도 한국인들에게 서양과 서양문화는 여전히 그렇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서구인들이 동양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이 다름 아닌 오리엔탈리즘이다. 매혹과 두려움이 양가적인 공존은 오리엔탈리즘의 핵심이다. 20세기에 강력하게 추진된 근대화는 서구문화가 일방적으로 동양문화를 점유해온 과정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것은 강제된 서구화였다. 따라서 비서구 문화와 예술은 망실되어가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이분법으로 경계를 나누고 갈라놓고자 시도했다. 서양과 동양, 중심과 주변, 남성과 여성, 현대와 전통, 밝음과 어둠, 이성과 광기 등으로 말이다. 바로 모더니티가 만들어놓은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이질적인 두 개의 문화는 끊임없는 교류와 만남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인식하고자 한다. 모더니티가 설정한 이분법이 폐기처분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그에 따라 더 이상 강력한 하나의 중심은 설정되지 않는다. 하나의 기준, 규범, 틀과 획일성은 도전받는다. 그 자리에 차이의 의미와 그에 대한 존중이 싹튼다. 생명체나 문화는 차이를 통해 생존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유사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차이를 통해 생존한다. 삶이란 그 차이를 보존하려는 활동의 구현이라 그 활동이 멎으면 죽는다. 차이가 없다는 것은 획일성이고 죽음이다. 인간은 죽으면 동일해진다. 따라서 강력한 획일성은 결국 죽음이기게 인간은 그 획일성에 저항한다. 생각해보라, 죽음이란 모든 개체성의 차이가 결국 동일화되는 현상 아닌가? 죽으면 결국 흙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야말로 엄정한 획일성이다. 산다는 것은 획일성에 저항하고 차이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생명체들의 결사적인 행위이다. 그러한 저항의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이 예술이다. 예술은 무수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획일성에 대들고 개별성과 고유함의 증거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의 현실과 대중문화는 획일성을 강요한다. 그것이 자본의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예술은 그 획일성과 규범, 통일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저 마다의 신체와 마음, 감각의 구현물이 미술이다. 그러니 미술은 단일성과 통일성을 목표로 하지 않고 개별성과 무수한 차이를 확인하는 장이다. 미술이란 자신의 몸이 구현하는 차이들을 조형언어로 표현하는 일이다. ‘문화나 예술은 사람의 신체만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는 모든 것들을 살아있도록 유지해주는 활동’을 일컫는다. 그러니 미술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소소하고 구체적인 활동들의 집합인 것이다. 따라서 미술이 획일적이 되면 차이들이 사라지는 것이고, 차이를 잃어버리면 미술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한 개인의 생애와 감각의 죽음을 일컫는다. 그러니 문화와 예술의 교류와 만남은 어느 하나로 동화되거나 일방적인 수용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름을 확인하고 그 차이를 통해 문화/미술이 차이의 집합임을 깨닫는 일이다. 따라서 그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신들이 지닌 문화를 반성해보고 나아가 그 다름의 의미도 헤아려 보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차이를 생성시켜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로 다른 문화권의 미술인들이 교류를 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다름을 확인하고 인정하며 공모하는 관계의 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어떤 단일성으로 묶이고자 하는 게 아니다. 획일적인 문화 속에서 편하게 살기를 거부하고 다소의 진통과 불편이 따르더라도 다양성의 세계를 인식하고 지켜보는 일이다. 

 독일의 베를린과 한국의 양평에 거주하는 작가들이 매년 교류전을 갖고 있다. 무엇을 교류하고자 하는 것일까? 교류란 가능한가? 내 생각으로는 서로 다른 문화와 현실 속에서 배태된 조형언어를 확인하고자 하는 자리일 것이다. 그 다름을 통해 자신들의 미술언어를 좀 더 풍성하게 가꾸고 나하고는 다른 이의 감각과 개성을 살펴보는 자리인 동시에 무수한 차이들로 그려진 미술지형도를 탐사해보는 일이기도 하다. 문화는 어쩌면 그 다름과 차이의 확인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반성하고 자신의 초상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자신들의 전통과 익숙한 미술언어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 일이다. 글로벌화 된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도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각자 문화의 고유성과 차이성이 무엇인지를 새삼 한 자리에서 비교해보고 많은 생각과 느낌이 교차하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리라. 

 피상적이지만 독일 작가들의 작업에 비해 양평이란 특정한 자연공간에서 작업을 위해 몰려든 한국작가들의 작업은 자연과의 친화성 아래 풀려나온다. 이는 한국 전통미술과의 깊은 영향관계를 여전히 반영하고 있다. 저마다 다른 한국 작가들의 작업을 자연과의 친화성이란 단일한 성격으로 규정한다는 게 무리임과 동시에 또 다른 획일성이 범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아쉬움도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이기도 하다. 36명의 한국 작가들의 작업은 대부분 자연 안에서 살고 느끼고 인식한 것들로 구현되어 있다. 이태경과 찰스장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자연과의 대화를 축으로 외부세계의 반영내지는 그로인해 형성된 내면의 세계를 부려놓고 있다는 인상이다. 아마도 그것이 한국 작가들의 공유성인 듯 하다. 그것은 한국인의 삶과 문화의 전통이자 전통미술의 성격이기도 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양평에 거주하는 한국작가들의 작업은 오랜 세월 전해오는 전통과의 연계성 위에서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지금 이곳의 자연풍경을 대상화해서 작품을 풀어내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탈속적인 정신세계를 체현할 수 있는 은일태도를 강조했는데 자신들의 그 같은 생활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자연이었고 산수화 속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선비는 자연을 관조하고 깨닫고 즐겼던 것이다. 당시 식자들은 무한정 넓은 자연을 보고 감탄하면서 위대한 자연 앞에 왜소한 자신을 돌이켜보았고, 좁은 식견과 천근(淺近)한 학문을 하염없이 탄식했다. 자연을 대면하면서 자연의 순환과 이치를 깨닫고 자연의 덕목을 내재화하고 있는 중이다. 자연은 선비들이 공부하고 깨닫는 곳이자 심신을 수양하는 장소였다. 은자적 삶의 근원성을 현실계에서 가능하게 충족시켜 준 것이 바로 산수화다. 자연을 즐기고 풍류와 은둔적 삶을 지향하는 선비들의 거주지는 그래서 항상 자연과 함께 하고 있으며 동시에 열려 있다. 동양에서 자연은 예술에 있어 최고의 경지라는 관념적 차원에서 논의되었으며, 동시에 예술가나 지식인이 선택해야 할 제일 이상적인 거처로서 인식되었다. 자연에 기거한다는 것은 인간사회에서의 역할, 즉 실용적 용도에서 해방되어 쓸모없는 무용(無用)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으로 사회의 속박을 받지 않고 정신적 자유를 얻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아울러 자연은 생성과 소멸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움직임을 반복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새싹이 돋고, 꽃이 피어나고 지는 순환, 일련의 움직임은 계속된다. 그 신비로운 움직임은 인간의 내적원리 와도 닮아 있기에, 자연과 인간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동일한 생명의 근원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자연 스스로 끊임없이 연기(緣起) 하는 움직임에 동참해야하는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은 관계에서 자연은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무의식을 자연으로 회기시킴과 동시에 자연과 융화되려는 내적인 욕망을 일깨운다. 인간은 자연 안에서 자연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은 예술가에게 신비로움과 자연에 내재된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 즉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근원적인 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의 무의식이 만나는 하나의 영혼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소통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술은 그와 같이 자연과 인간의 소통의 결과로 나타난다. 작가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자연의 이치를 삶의 이치와 연관시켜 생각했으며, 자연을 통해 생명의 본성과 삶의 이치를 깨닫는 한편 이를 형상화 해왔다. 또한, 자연을 통해  정신력을 높이는 내면화 작업, 예술 행위는 나아가 자연을 통해 내면을 성숙시키고 우주전체를 품는 존재로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인간이 자연을 통해 자아를 성찰하듯이, 본인의 심적 풍경을 작품에 표현하는데 있어서 만물의 존재원리와 상호작용이 스스로 존재하는 동양의 자연관은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된다.
 바로 그러한 전통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 양평에 거주하며 작업하는 한국 작가들의 공유성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이 한결같거나 단일하거나 획일적이지만은 않지만 개별 작가들의 작업세계의 저간에 작동하는 핵심적인 축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게 해서 양평에 거주하는 작가들의 작업이 베를린 작가들의 작업과 은연중 변별성을 보인다.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아 공유하는 조형어법도 간직하고 있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면 또 다른 전통의 무게가 차이를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그러한 차이를 통해 한국과 독일 작가들은 새삼 서로의 문화적 배경과 전통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차이를 존중하게 된다. 현재라는 동질적 삶속에서도 차이를 생성해내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통해 좀 더 서로를 다시 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류이자 만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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