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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우리가 사랑한 화가 장욱진 _무한한 고독을 걷다

윤지수

  

 

우리가 사랑한 화가 장욱진 _무한한 고독을 걷다

 

 

장욱진_자연스럽다, 군자답다
장욱진 화백에 대해 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나는 ‘자연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살아생전에 항상 해오던 말이 있었다. 첫째는, “나는 심플하다. 따라서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이다. 또한 둘째는, “나는 한평생 그림 그린 죄밖에는 없다1).”이다. 그는 정말 이 말처럼 살았다. 그는 자연의 순리대로 살았다. 그리고 평생 그림에 매진하며 작품에 이러한 삶의 방식이 묻어나게 했다. 정말이지 그는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또한 나는 그를 ‘군자를 닮은 화가’라고 말할 것이다. 공자는 군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이는 ‘군자는 다른 사람과 생각을 같게 하지는 않지만 다름을 존중하고 공존한다. 그러나 소인은 다른 사람과 생각이 같지만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공존하지도 않는다.’ 라는 뜻이다. 이 말에 빗대어 볼 때 장욱진 화백의 삶은 군자와 같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공존하며 우주의 조화를 이루는 자연 속 생명들처럼. 그 또한 자연을 벗 삼아 어긋남 없이 살았다. 그의 일생과 마찬가지로 그의 그림에도 이러한 군자적 태도가 묻어난다. 그의 작품 안에서 사람과 동·식물은 동등하게 다뤄진다. 생명체는 평등하다는 우주적 관점이 그의 그림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2). 그래서 그의 그림은 순수하고 동화적이다.

 

장욱진, 그의 생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에 대해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처럼. 필자는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에게 또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 장욱진 화백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그를 이해하는 눈을 기를 것이다. 그의 성장과정, 그가 했던 이야기,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까지. 이런 요소들을 면밀히 살필 때 비로소 우리는 그에 대해, 그리고 작품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여러 학자들이 조금씩 다르게 그의 작품세계를 구분하고 있다. 다른 구분법들 또한 물론 고려될만하지만 필자는 ‘장욱진 미술재단’의 구분법을 따르려고 한다. 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연구를 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그의 어린 시절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그의 어린 시절
1917년에 태어난 장욱진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비상함을 보였다. 그는 8살 때부터 그림에 열중하기 시작했고 10살 때 유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9살 때부터는 까치를 많이 그렸는데 그의 향토적 소재에 대한 관심이 이 때부터였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 삼학년 때(1926년)는 《전일본소학미전》에 유화로 그린 까치를 출품해 일등상을 탄다. 그의 미술적 재능은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 후 크게 성장한다. 그는 열네 살이 되던 해인 1930년에 이 학교에 입학했고 미술반에 들어간다. 미술반에서 그는 동경미술학교출신 교사인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1897-1945)를 만나게 된다. 사토 구니오는 조선미의 아름다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관심이 대단했다. 학교 미술시간에 한국미술, 특히 우리 공예의 우수성을 늘상 강조했다고 한다. 또한 학생들에게 당시 유럽의 현대적 화풍이었던 피카소, 야수주의 등을 가르쳤다. 그의 영향을 받아 장욱진은 향토적인 주제를 문화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으며 진보적인 화풍을 그림에 도입하게 된다3).    
  장욱진은 삼학년 때 한 일본인 역사교사의 공정치 못한 처우에 항의하다 퇴학처분을 당한다. 그는 이후 집에서 쉬면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다. 그는 학교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쓸데없이 그림만 그리고 있다는 이유로 고모에게 크게 혼이 난다. 그리고 이 때문에 병을 얻게 되어 요양 차 수덕사修德寺로 보내진다. 그는 그곳에서 요양을 하며 대웅전의 아름다운 모습과 산수를 보며 감명을 받았고 나혜석羅蕙錫(1896~1949)을 만남으로써 미술적 발전을 하게 된다.     

 

초기(1937~1962)
반 년 간 수덕사에서 요양을 한 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1936년 봄, 양정고등보통학교 삼학년에 편입한다. 복학 후에도 그는 계속 그림에 매진했고 1938년,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 <공기놀이>를 출품해 최고상을 받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집안의 인정을 받아 마음 놓고 그림 공부를 하게 되었다.


 

 

  장욱진이 자신의 화풍을 확립하게 된 시기는 유학시절이었다고 추정된다. 유학을 떠난 시점은 그가 유화를 시작한지 이미 십 삼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화풍을 다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1939년 일본의 제국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제국미술학교에서 그는 나카야마 다카시中山巍(1893~1978),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1897~1981)와 같은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이들은 진보적인 회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는 모더니즘을 수용하는 교육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자연스럽게 모더니즘 형식을 띄게 된다. 더불어 그는 「세계미술전집」과 같은 화집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독자적 화풍을 성립할 수 있었다4).
  졸업 후, 조국으로 돌아온 그에겐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제 징용에 끌려갔고 해방 직후, 6·25전쟁이 터져 피난을 가게 되었다. 피난에서 돌아 온 후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박물관에 취업했으나 삼 년 만에 그만둔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활동은 계속 되었다. 김환기金煥基(1913~1974), 유영국劉永國(1916~2002), 이규상李揆祥(1918~1964)이 결성한 신사실파에 가입하여 1948년부터는 「신사실파전」에 작품을 출품한다. 이 때 그의 작품 중 <독>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전쟁 기에 제작된 그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자화상>이다. <자화상>은 전쟁의 상흔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작품이다. 오히려 밝은 화면이 눈에 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가 보리밭길을 걷고 있다. 이 신사는 다름 아닌 장욱진 자신이다. 주변 상황과 상관없이 고집  대로 제 갈 길을 가겠다는 화가의 신념이 드러난다.      
 
 

 

  휴전 이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그와 가족들은 서울로 귀환을 한다. 그의 아내가 조그마한 책방을 차렸고 1954년엔 그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우교수로 발령이 나면서 생활은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그는 7년 만에 교수직을 사퇴하고 만다. 그림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본인의 신념 때문이기도 했고 남을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가 창작활동을 하는 것에 더 뜻을 두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교수직을 관둔 후 명륜동에 양옥집을 마련한 그는 전업화가로서 살기 시작한다. 

 

덕소시대(1963~1975)
1963년 장화백은 덕소의 화실에 혼자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화실 주변은 인적이 드물었는데 오직 한 채의 집이 근처에 있을 뿐이었다. 덕소는 강과 산이 인접해있는 곳으로 보는 이에게 유배지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전기와 물이 들어오지 않아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그는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해 덕소로 왔지만 많은 작품을 남기진 못했다.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덕소 때는 그 과정이 하나에만 집중하지 않았어요. 이것저것 기법에 있어서나 풍부하다 그거죠. 발르고 부치고 깎고 그런 표현을 하는 데. 덕소서는 주로 부친 편이에요. 그러니까 덕소에서 제 마음대로 했었다, 결국 그렇게 되는 거죠. 또 덕소 때는 밤낮 내가 무엇이냐, 내가 무엇이냐 그러고, 캔버스 엎어놨다 제쳐놨다 하고5).”

 

1960년대는 한국에 모더니즘이 밀려온 시기였다. 그 또한 이런 모더니즘의 물결에 영향을 받아 그림에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그의 말처럼 초기에는 주로 바르고 부치는 작업을 통해 두꺼운 질감과 강한 붓 터치의 작품들이 제작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동안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에는 <진진묘眞眞妙> 가 있다. 이 작품은 그가 예불에 열중하는 아내를 보고 감명을 받아 그린 것으로 아주 단순한 선으로 간결하게 아내의 형체만이 표현되었다. 절제된 표현 안에는 육체를 걸러내 그 안의 정신세계를 조명하고자 한 장욱진의 의도가 드러나는 것 같다.
  1960년대 말 이후로 화가는 자기 정체성을 찾게 된다. 모더니즘의 물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6). 그리고 1970년 초 덕소를 떠나 명륜동으로 거처를 옮긴다.

 

명륜동시대(1975-1979)
1975년 화가는 명륜동으로 돌아온다. 명륜동 양옥 근처가 지하철 공사로 개발이 되면서 근처가 더 도시화 되어갔고 그는 마음의 안식을 위해 시골로, 또 절로 돌아다니곤 했다. 특히 불교신자였던 아내와 어렸을 때 수덕사에서 요양을 했던 추억이 있는 그에겐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막내아들이 죽는 불행은 그를 불교에 더욱 의지하게 만든다.
  그는 이 시기에 다양한 조형작업을 시도한다. 첫째로, 매직 마커 그림이 있다. 낱장의 갱지에 매직 마커를 이용한 그림을 자주 그리곤 했는데 그가 지방 여행을 갈 때도 동행하였다. 마커 그림은 자칫 가볍게 치부될 수도 있으나 지인들은 유화와 같은 무게로 생각했다. 둘째로, 판화가 있다. 젊은 판화가 전후연全厚淵(1951~)은 화가에게 판화제작을 권한다. 이는 손상이 우려되는 마커의 재질적 특성 때문이었다. 장화백은 서서히 판화를 조형방식의 표현법으로 수긍한다. 그리고 1975년에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제자 윤명로尹明老(1936~)의 작업실을 찾아 판화를 세 점 찍는다. 셋째로, 먹그림이 있다. 1978년부터 화가는 동양화 붓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동양화 붓으로 그린 그림을 그는 ‘먹그림’이라고 불렀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와 신사임당申師任堂(1512~1559)의 필법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넷째로, 도화陶畵가 있다. 1970년대 중반, 예술자기의 활성화를 위해서 도공들은 도자기에 예술가의 그림을 담으려 했고 장욱진 또한 도화 작업에 참여하였다.
  불교에 대한 의존과 수묵화의 시도, 그리고 다양한 조형적 시도로 인해 이 시기 화가의 그림에는 전통 회화적 면모가 강하게 드러난다.

 




 

수안보시대(1980-1985)
1980년에 장화백은 수안보 탑동 마을에 자리를 잡는다. 담배농사를 짓던 두 칸짜리 집을 간단히 고쳐 아내와 간소한 살림살이를 꾸리며 살아간다. 이 시기는 화가의 삶 중 가장 안락한 시기에 속한다. 이는 아내와 함께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집을 둘러싸는 자연환경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장화백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조용한 분위기 덕분에 많은 먹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유화작품에는 수묵화의 영향이 많이 드러난다. 유화 중에는 먹그림의 분위기가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 있었고 유화 작품에 먹이 직접 발리기도 했다. 또한 동양화물감의 특성이 들어간 유채물감인 ‘앤티크 컬러’를 주로 사용했기에 화가의 작품은 수묵화적인 경향이 도드라진다.

 

'수안보에선, 그림 과정을 얘기하면 덕소 때하곤 정반대야. 자꾸 마이너스 일을 했어. 깎아내고, 묽게 바르고, 맥이기도 하고, 물감 비벼서. 그러니까 덕소하고 그만큼 과정이 달랐지7).”

 

예순을 넘긴 화가는 안정된 생활 속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바깥에 눈 돌리지 않고 자신의 조형 세계를 추구하는데 이는 보통 덜어내는 작업이었다. 판화가 전후연의 권유로 목판화 작업도 시작했는데 양각보다는 음각작업을 즐겨했다.

 

신갈시대(1986-1990)
수안보가 휴양도시로 변모하며 화가는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한다. 그리고 이듬해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세 칸짜리 집을 구해 리모델링을 한다. 화가는 이 ‘신갈한옥’에서 거주하며 <도인>, <감나무>, <강변 풍경> 등을 그린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모두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면모를 보인다. 특히 <강변 풍경>은 도가풍의 색채가 매우 강하다. 화가는 이 작품이 명나라 때 심주沈周(1427~1509)가 그린 <파주문월도把酒問月圖>와 그 속뜻이 비슷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밤과 노인>은 화가가 죽음을 예견하고 그렸다고 전해지는 작품이다. 반달이 하늘에 떠있는 밤, 동산이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동산 사이로 나있는 오솔길을 한 아이가 걷고 있다. 그리고 오솔길의 반대방향으로 도인이 하늘에 떠있다. 까치는 노인과 같은 방향에 앉아있는데 노인이 가는 길을 배웅해주는 것 같다. 뿐 만 아니라 하얀 달을 역광으로 드리워진 검은 색의 산과 달무리, 노인을 둘러싼 무채색의 배경은 허망한 삶을 회환하는 노인의 심경을 강조하고 있다. 1951년 작 <자화상>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그는 1990년 12월 27일 이 작품 속 노인처럼 이승을 떠나 훨훨 날아갔다.          
 



 

장욱진 화백이 사랑받는 이유
장욱진 화백은 우리나라 근·현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미술계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의 측면에서 그리고 작품적 측면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작가적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작가로서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해온 것이 그가 사랑받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자기만족이 있을 수 없으며 자기만족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자신의 종식이라 생각하고 달게 감내하고 있다. 일상 나는 내 자신의 저항 속에서 살며 이 저항이야말로 자기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예술작품은 인간의 생명처럼 무한한 고독이다. 아니 그것은 무한히 고독한 작업의 산물인 것이다. 이 대규모적 고독의 물결이 예술가도 채 못 되는 나에게 덮쳐와 잃어버리는 망각 속에서 버둥대는 자신을 보는 것이다8).” 이는 그가 살아생전에 했던 말들이다. 자신과 불화하고, 세상과 불화하고 오직 시詩하고만 화해할 때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을 안을 수 있다9)고 말한 이성복의 시처럼 그는 부단히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불화했다. 오로지 고독 가운데 서서 아름다움만을 위한 작업을 계속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이러한 그의 평생에 걸친 노력은 그를 작가로서 떳떳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의 작품을 진실 되게 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본 많은 이들은 감화하고 더 나아가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작품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로, 그의 그림에 녹아있는 상반된 두 욕망이 매력을 끌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친근하다는 인상을 준다. 더불어 동화적이고 꿈같은 분위기도 풍긴다. 그의 오랜 친구였던 김형국金炯國(1942~)은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에서 이러한 상반된 요소의 공존이 그의 그림을 사랑받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일상성과 초월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겐 상반된 욕망이 있다. 그것은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자아실현의 바램이다. 이 두 가지 욕망은 거부감 없이 작품에 어우러져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끈다10).
  두 번째로, 문인화적 기질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유화물감을 동양화의 먹처럼 이용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무위자연’의 동양적 정신성을 그의 회화관에 구현했다. 이러한 요소는 감상자가 그의 그림으로부터 산수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감상자에겐 정신적 안식처가 되어준다. 선조들이 산수화를 이상향이자 마음의 안식처처럼 여긴 것처럼 말이다.  
 
매 순간 ‘장욱진답다’
삶 속에서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사람을 만나곤 한다. 그러나 장욱진 화백은 아니었다. 매 순간 순간, 그는 장욱진다웠다. 또한 그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장욱진 다움을 잃은 순간은 없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다. “매 순간을 가장 자신답게 살라.” 모든 시간을 가장 그답게 살았던 화가를 떠올리며 이 글을 마무리 짓는다.

 

jisu(yoonsart21@hanmail.net)

 

 

 

 

 

주석)

1) 장욱진, 「강가의 아틀리에」, pp.66-67, 158-160, 2013년, 민음사
2) 박희병, 「한국 고전문학의 전통과 생태적 관점」, 『창작과 비평』, 제23권 제4호, p.96, 1995년
3) 강병직, 「장욱진에게 있어서 ‘신사실파’의 의미-동인활동과 영향관계를 중심으로」,『유영국저널. 제5집 (2008년) pp.111-130』 p.115, 유영국미술문화재단, 2008년
4) 각주 3) pp.119-125참조
5) 각주1) pp.116-120참조
6) 김형국,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 p.71참조, 열화당, 2004년
7) 각주1) pp.116-120참조
8) 각주1) pp.20-21참조
9) 이성복, 「불화하는 말들」, 문학과 지성사, 2015년
10) 각주6) pp.10-1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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