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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기운생동의 에너지, 신산옥의 수묵화 | 박선주

현대미술포럼



기운생동의 에너지, 신산옥의 수묵화



신산옥(1954~)은 1980년대 수묵화 운동의 주역 중 한 명으로, 호방한 필치와 대담한 구성에 기반한 수묵 작업을 선보여온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다소 거친 감각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화면을 채우는 그 역동적인 기세로 인해 예로부터 동아시아에서 회화의 첫째 덕목이라 여겼던 ‘기운생동(氣韻生動)’을 예시하는 듯하다. 신산옥은 임모(臨摸)의 방식 대신 도시, 마을 등 자신을 둘러싼 동시대의 삶의 터전이 내뿜는 생생한 호흡을 채집하여 화폭에 펼쳤다. 치열한 현실 인식으로 전통적인 산수화의 틀에서 벗어나 ‘오늘’의 수묵화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신산옥의 작품 세계를 시기별로 살펴봄으로써 그가 탐구했던 새로운 수묵의 정체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신산옥은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1981년 졸업했다. 당시 국내 화단에서는 1970년대 화랑이 주도한 미술시장의 호황으로 인해 상업화된 동양화를 향한 우려의 시선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교수였던 송수남을 주축으로 한 일련의 작가들이 ‘수묵’을 기조로 한국화의1)  현대성을 탐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송수남의 제자였던 신산옥은 《수묵화 4인전》(1981)을 시작으로, 《동양화 4인전》(1981), 《오늘의 수묵》(1982), 《수묵의 현상》(1983), 《한국현대수묵》(1984) 등 수묵화 운동의 주요 전시에 연이어 참여하며 그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색을 배제하고, 지필묵(紙筆墨)을 근간으로 하는 수묵화는 동양화의 정수로 꼽힌다. 그러나 그 재료적 한계 또한 분명하여 유구한 전통으로부터 쉬이 자유로울 수 없는 형식이기도 하다. 수묵화 운동을 주도한 작가들은 수묵의 현대적 계승을 위한 방법으로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의 실경 정신에 주목했다. 이들은 두 눈으로 목격한 동시대의 현실 풍경을 작품의 소재로 택했다. 신산옥도 산업화로 인해 급변한 도시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러나 그는 사실적인 재현을 넘어 거칠게 쌓아 올린 먹과 과감한 운필로 화면 위에 생(生)의 감각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만의 차별점을 만들어냈다. 1981년에서 1982년 사이 발표한 <도심의 열기>, <역동> 등은 그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도시의 이미지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1981년 《수묵화 4인전》에 출품한 <변모>는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로 솟아오른 송전탑과 전신주, 전선들이 어지러이 뒤섞인 풍경을 보여준다. 산수화의 나무와 암산(巖山)을 대체한 화면의 도시 구조물들은 ‘변모한’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명확한 형태 묘사보다는 농묵을 쓴 거친 선들을 중첩하여 강렬한 기운을 전달하고자 했다. 앞선 작품과 같이 신산옥은 소재뿐만 아니라 먹의 운용에도 몰두하였다. <수묵 Ⅰ>(1983)에서는 대담한 구도, 화면 바깥으로 뻗쳐나가는 속도감 있는 붓질로 분출하는 에너지를 드러내고 있다. 신산옥은 준법을 모방하지 않는 개성적 필법으로 “펄펄 열기가 솟아나는” 주변의 정경을 포착함으로써 전통 수묵화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 것이다.    

신산옥은 “여류답지 않은 힘찬 조형 의지와 파격적인 필치” “현장성 있는 작품” 등의 수식으로 언급되며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중앙미술대전 장려상과 특상(1982, 1984), 제2회 석남미술상(1983)을 연이어 수상하고, 1986년까지 개인전을 네 차례 개최하는 등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한편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자 수묵화 운동은 차츰 화단의 관심에서 멀어지며 그 열기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에 1988년 신산옥, 이철량, 김호석 등의 작가들이 모여 ‘현대수묵회’를 창립하고, 회원전을 개최하면서 먹을 매체로 한 탐구와 논의를 지속해나갔다. 이들은 기존의 방식들을 되짚어보며 ‘현대 수묵’이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현대수묵회 활동과 더불어 이 시기부터 신산옥의 작품에는 소재와 형식 면에서 변화의 양상이 발견된다. 

“보다 투철한 현실 인식을 통해 삶의 주체인 인간의 근원적 모습을 수묵의 실체로 현실화, 구체화시키는 문제에도 접근해야 한다 (…) 수묵이 다양한 한국의 역사 속에서 사회적 역할을 얼마만큼 그리고 어떠한 모습으로 대변해왔는가에 대한 반성과 함께 (…) 사회와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 관념의 미학이 아닌 현실 속에서 펄펄 살아움직이는 역동적인 능동체로서의 힘의 미학이 절실히 필요하다” 2)

위 언급과 같이 신산옥의 수묵 작업은 자신을 둘러싼 풍경으로부터 인간 존재와 역사에 대한 사유로 나아간다. 삶과 죽음, 낮과 밤, 인간과 자연 등 대립되는 요소들이 충돌하며 표출하는 힘을 작품의 주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를 실체화하는 위해 그는 ‘선’의 표현에 보다 집중한 반추상 작업을 시도한다. 먹과 색의 혼용, 여백을 깨뜨리는 필선의 움직임을 통해 상반되는 개념들이 화면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기운생동’의 상태를 시각화하고자 하였다. <투시 Ⅰ>(1991)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필획의 구성 속에 인물의 형상을 암시하거나 해체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밤과 낮 Ⅱ>(1992)은 흑과 백이 대조를 이루는 화면 구성을 취하고, 목탄을 사용하여 짧게 그은 선에 먹과 채색을 더함으로써 독특한 조형 효과를 이끌어 낸 작품이다.   

2000년 개최된 개인전에서 신산옥은 “다시 이전의 순수한 수묵화 작업과 맥을 같이하는 그림들로 변화”를 보여주었다. ‘수묵화 운동의 주역’과 같은 타이틀에서 한결 자유로워진 듯한 그는 수묵의 본질인 지필묵의 요소들을 재점검해나갔다. <유보된 집착>(1998), <있음에 대한 소고>(1998), <경계없는 공간을 향하여>(1998) 등 작품의 제목에서도 추상적 사유가 드러난다. 이 작품들은 언뜻 전통적인 수묵 사군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초배지를 사용하거나 갈필을 강조하는 등 그의 시선이 전통을 넘어선 어딘가를 향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면 안에서 선들이 자유로이 서로를 밀고 당기는 힘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용필(用筆)에 몰두한 그는 선의 움직임을 실험할 수 있는 전각과 판화, 드로잉 작업에도 집중한다. 그의 전각에는 다양한 서체들이 본래의 형태를 잃고 흩어져 유기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여백과 선의 조화 속에서 조형미를 추구하는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수묵의 화면에서 기운생동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1980년대 수묵화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신산옥은 “과연 수묵의 양식이 이 세대와의 동질성을 어느 정도 회복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고민해왔다. 1980년대 신예 작가였던 그는 동시대의 현실 풍경을 화폭에 담았으며, 이후 인간 존재와 세계에 대한 사유를 통해 이를 구체화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종이와 먹이라는 한정된 재료로서 기운생동의 화면을 실현할 수 있었다. 결국 그가 추구했던 동시대, 현대의 수묵이란 우리의 살아 숨 쉬는 현실에의 인식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박선주(1985~ ),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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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화’라는 명칭이 공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로 ‘한국화’ ‘동양화’를 둘러싼 논의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신산옥이 활동 당시 사용했던 ‘한국화’라는 용어를 주로 하되, 필요한 경우 ‘동양화’도 함께 사용하였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김현숙, 「1980년대 한국 동양화의 탈동양화」, 『현대미술사연구 제24집』(2008.12), pp.203-224 참고. 

2)  신산옥, 「사회와 역사에 동참하는 적극적 자세」, 『가나아트』 8 (1989, 7-8), p.115.




신산옥, <변모>, 1981, 종이에 먹, 90x180cm




신산옥, <투시Ⅰ>, 1991, 한지에 채색, 175×120cm




신산옥, <유보된 집착>, 1998, 초배지에 먹, 91x4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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