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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1900,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김달진



비엔나 1900,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2024.11.30-2025.3.3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과 오스트리아 레오폴트미술관이 협력하여 19세기 말 비엔나에서 변화를 꿈꿨던 예술가의 활동과 모더니즘으로의 전환 과정을 레오폴트미술관 소장품 총 191점을 통해 선보인다. 세기말 새로운 시대, 예술의 자유를 찾고자 구스타프 클림트가 창립한 비엔나 분리파의 역할과 동시대 예술가들의 활동을 미술, 음악, 건축, 디자인 등 다양한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비엔나를 유럽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도시 확장 계획을 단행하며 오늘날 비엔나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꼽히는 유명한 건축물들이 지어졌다. 이번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경제신문 주최로 11월29일 10시 언론공개회를 가졌다. 국립중앙박물관 김재홍관장, 오스트리아 레오폴트미술관 한스 페터 비플링어관장의 인사가 있있고 성인 입장료 18,500원. 특별히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작품과 주의를 요하는 19금(?) 2점을 전시한 방도 있다.






에곤 실레,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때 새로 지어진 건물에 벽화를 그리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예술의 길을 탐구했고,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특별한 예술 운동을 시작한다. 클림트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던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어 동료들과 비엔나 분리파의 활동을 시작했다. 보수적인 기득권과 맞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된 구스타프 클림트는 동료들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여 과거의 관습과 예술 양식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다. 회화뿐 아니라 공예, 삽화, 책 표지와 우표 디자인 등 일상의 여러 분야로 예술의 지평을 넓혔다. 그들의 예술 철학과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는 잡지인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도 발행하고 여러 예술 장르를 합쳐 하나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구현한다는 ‘총체예술’의 개념은 비엔나 분리파의 바탕이 되었다.




왼:올라간 치마를 입고 누워 있는 여성 / 오:올라간 속옷을 입고 누워 있는 여성의 누드

에곤 실레, 시인

                        왼:한스뵐러, 스페인 여인 / 가운데: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 여성의 초상 /                                           오: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스센, 푸른 옷을 입은 소녀


비엔나 분리파의 대다수 회원은 유럽으로, 일부는 아시아 지역까지 여행하며 새로운 예술을 접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를 그린 풍경화가 나타났다. 전통 양식을 따르던 보수적인 아카데미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탐탁치 않아 했고, 당시 유럽에 퍼져 나갔던 예술적 자극에 대한 수용을 거부했다. 하지만 비엔나 분리파는 새로운 시도와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방이 아닌 그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예술 철학과 도전은 이후 비엔나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반신 누드의 자화상
오스카 코코슈카, 왼: 목화 솜 따는 소녀 / 오: 소녀
오스카 코코슈카, 왼:양쪽에서 본 화가의 자화상 / 가운데:'얼굴 인식' 강연을 위한 포스터 / 오: 피에타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동료들은 공예도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며,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예술은 없다고 주장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에서는 회화, 공예, 조각, 포스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였고, 예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대중에게 알렸다. 1903년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의 물건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설립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초기 디자인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한 장식 미술과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 형태가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곧 기능성과 미학의 조화를 강조한 영국 *예술공예운동의 영향으로 기하학적 단순함을 중시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들의 철학은 이후 기능주의를 추구하며 설립된 예술학교 바우하우스를 비롯해 여러 방면의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에곤 실레는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난 뒤로 예술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했다.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를 주변에 소개하고 후원을 받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 실레는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신예술가그룹’을 결성했다. 개인의 감정을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 신예술가그룹 화가들은 비엔나 예술계를 모더니즘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며 비엔나 예술계에 세대교체의 바람을 일으켰다. 20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한 에곤 실레는 1900년 비엔나의 표현주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의 예술 인생은 짧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독창성은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특히 에곤 실레는 자아 정체성, 고독, 욕망 등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담아냈다. 죽음에 대한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과 고독감, 한없이 불안한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다. 



에곤 실레 / 깍지를 낀 에곤 실레 / 포즈를 취한 에곤 실레


전통의 벽을 넘어 새로운 양식에 도전하며 예술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 왔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가 오스트리아 예술에 심은 ‘도전과 실험’이라는 나무는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자유’라는 열매를 선물했다.그들의 도전과 실험은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끌었고, 자유를 꿈꿨던 예술가들은 ‘비엔나 1900년’의 선구자가 됐다. 전통의 틀을 깨고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했던 이들의 시대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한다. 



작품:오스카 코코슈카, 왼:빅토어 리터 폰 바우어 / 오:헤르만 슈바르츠발트Ⅱ


이원복 전 경기도립박물관장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역임, 김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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