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에 있는 나의 기억
이배 작가와의 인터뷰
외부에 서기
심은록. 선생님께서1989년 도불을 하신 동기는 무엇이셨는지요? 당시만해도 이미 뉴욕이 예술을 비롯한 모든 분야의 중심이었는데, 파리 행을 결정하신 이유는요?
이배. 밖으로 나가 작가로서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었습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곳을 떠난다는 것은 나를 객관적으로 되돌아 보고 싶다는 인간의 원초적 의지가 있는 행위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뉴욕에 정착가능성을 두고 여러 번 방문했었습니다. 확실히 미국은 여러 분야에서 활발해 보이고 힘도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예술 자체보다는 상업적인 면으로 너무 활발하다고나 할까요. 거기 있다 보니까, 작가가 시장 터에서 어슬렁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뉴욕이 미술을 포함한 많은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곳임은 틀림 없지만, 과연 시장 같은 곳에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세우는 것이 가능할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작가로서 내 세계를 구축하고 숙성시킬 수 있는 적합한 장소가 어디인지 고민했습니다. 파리에서는 이러한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착했고, 어느새 세월이 흘러서 이렇게 머물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역시 나를 성숙시키는 데는 파리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심은록. 한국에서 작업하실 때는 물감을 많이 써서 색이 화려한 추상작품을 하셨는데, 도불 후부터는 숯을 사용한 모노톤 작품을 하고 계십니다. 이 같은 변화가 발생한 계기는요?
이배. 파리에 와서 데생을 하는데, 가느다란 목탄으로는 제 성에 안차서 아예 숯을 봉지째 사서 했습니다. 숯으로 데생을 하다 보니, 숯이 가지고 있는 재질에 대한 특성도 재미있고, 그림을 처음 시작할 때 데생 했던 기분도 들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숯을 짓이겨서 데생처럼 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숯과 같이 흔하고 빈약한 의미를 지닌 마티에르 일지라도, 작가와 잘 만나고 작가의 감성과 잘 연결되면, 그 의미가 아주 풍성해 집니다. 작가 자신과 맞는 재료를 찾아서 이를 오랫동안 다루게 되면, 그 재료가 작가의 이미지로 부각되기도 합니다. 숯을 사용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도불 초창기에 재정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물감은 상당히 비쌌는데, 그에 비하면 숯은 아주 저렴해서 한 봉지를 사면 한참동안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요.
심은록. 프랑스는 마티에르가 워낙 비싸니까, 새로운 마티에르를 찾아 개발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 많이 나옵니다. 역경이 기회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배. 이처럼 단순한 이유로 시작된 숯과의 만남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아시아인이라면 누구나 바탕에 자연스레 젖어있는 아시아라는 거대한 문명과 검은 색에 대한 개념을 접목시키게 되었습니다. 저의 문화적인 냄새를 흘렸다고나 할까요. 예를 들어, 동양화에서의 검정은 모든 색을 다 포함하기에, 빨간 매화도, 하얀 난도, 노란 국화도, 초록 대나무도 모두 검정으로 표현될 수 있잖아요.
심은록. 그러고 보니, 숯은 알타미라, 라스코, 쇼배 동굴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류 최초의 감성을 표현할 수 있게 한 가장 근원적인 예술적 마티에르이기도 하네요. 또 광학적으로 볼 때, 모든 색깔을 다 흡수해야 검은 색이 되니까, ‘먹’이 모든 색깔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다른 색으로는 그런 뉘앙스를 낼 수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숯은 인류의 오랜 미적 기억[여기서는 숯이나 먹으로 재현된 그림을 의미]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배. 그래요. 그리고 저는 그런 오래된 기억을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제 속에서 다시 끄집어 냅니다. 예를 들어,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서 하신 음식을 보면, 내가 이걸 먹고 자랐던가 할 정도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그런데, 막상 먹어보면, 혀에서 옛날의 그 맛이 느껴지면서 그와 관련된 감각이나 감성도 소록소록 되솟아납니다. 정작 내 의식은 기억을 못하고 있는데, 신체는 기억을 하고 있는 거에요. 이처럼 오래 전에 잊어버린 맛을 되찾아낸 혀의 미각처럼, 감각을 통한 신체의 경험은 외부의 자극들에 의해 어떤 오래된 흔적,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의 파편들을 끄집어냅니다. 마찬가지로 저의 몸은 무의식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그려놓은 결과들은 저의 신체가 가지는 일종의 기억의 파편들입니다. 이를 지속적으로 정제시켜가는 과정이 지금 작업의 형태입니다.
심은록.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신체는 엄청난 “기억의 파편들”을 담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찰나의 향기로 흘려버립니다. ‘아!’하는 짧은 탄성으로 끝내버리곤 합니다. 현시대는 ‘아!’ 뒤에 숨겨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느의 향기에 담긴 비자발적인 기억을 장장 일곱 권의 소설책으로 재현했습니다.
이배. 유럽의 문학가나 예술가들과 달리, 아시아사람인 제 경우는 솔직하게 말하면, 회화를 할 수 있는 그런 풍부한 자극이 있는 환경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어떤 문화적 충격도 없이 시골에서 마치 냉이 자라듯이 자랐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니, 제게 있어서 풍부한 상상력은 기대하기 어렵겠다고 자각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상상력이 궁핍한 것이 제 작업의 시발점이자, 예술세계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궁핍한 상상력을 내 안에서 끄집어내기 보다는 오히려 외부에 널려있는 수많은 상상력과 연결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연결을 시키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상상력’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달리 말하면,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는 환경’을 말할 수도 있겠고, 또 다른 이는 이를 일종의 ‘예술적 모티브’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심은록. 외부에 널려있는 수많은 상상력을 어떻게 연결을 시키시는지요?
이배. 기억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기억은 방금 언급한대로 감각을 통해서 바깥과 혹은 외부에 있는 상상력과 연결시키는 계기나 도구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말하는 기억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과거의 시간적인 것도 의미하지만, 환경적이고 공간적인 요소도 포함됩니다.
심은록. 숯 작업을 하시면서 또한 정교한 호치키스 데생작업도 하셨는데, 호치키스를 마티에르로 쓰시게 된 동기는요?
이배. 내가 파리에 도착하여 처음 6, 7년 동안은 이우환 선생님의 조수로 있으면서 캔버스 천을 팽팽히 당겨서 호치키스로 고정시키는 일을 도와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치키스가 연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당시 저는 숯 작업을 하면서 마티에르에 관심이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숯이 자연의 산물이라면, 호치키스는 산업사회의 소모품인 것이지요. 자연의 소산인 숯으로 데생을 하면서, 역으로 산업사회의 소모품으로 하는 데생이 가능할까 고민하다가 호치키스 작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작가의 작품은 자신의 삶의 조건, 주변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제작됩니다.
숯, “기억의 파편”
심은록.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이후, 작품에 많은 변화가 보입니다. 그런데 왜 숯을 포기하셨나요?
이배. 숯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숯을 대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숯 작업들을 선보이면서 작가로서의 예술적 이미지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제가 지나치게 재료의 물성에 의존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를 넘어서고자 고민했습니다. 물성이 덜 보이는 새로운 발상을 찾는 가운데, 메디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메디엄은 물성이면서도 비물성적인 애매한 요소가 있습니다. 최근 작품에서 흰 부분은 바로 이 메디엄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검은 부분은 숯가루를 메디엄에 섞어서 칠한 것으로 ‘숯의 기억의 파편’입니다. 숯이라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숯입니다.
심은록. 이전 작업에는 메디엄이 숯을 안료로 사용하기 위한 보조적인 재료였다면, 이제는 메디엄이 숯으로부터 독립해서 자신의 존재성을 인정받은 것이네요. 그런데 최근 작품에서는 메디엄만 물성과 비물성 간의 애매한 특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숯도 숯이면서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캔버스의 모티브의 위치도 뭔가 애매합니다. 가라앉은 것도 같고, 부유하는 것도 같습니다.
이배. 예전의 숯 작품은 숯이 화면에서 모두 튀어나온 상태라면, 최근 작품들은 역으로 화면 속에 회화의 현상을 침잠시켜, 표면에 마티에르가 전혀 올라와 있지 않기에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서양의 유화는 캔버스와 물감의 특성 때문에 캔버스 표면 위로 물감이 쌓입니다. 이와 반대로, 동양화의 경우에는 화선지와 먹의 특성 때문에, 화선지는 먹을 흡수합니다. 즉 서구의 화면은 캔버스 위에 쌓여 올려지고, 동양의 화면은 화선지 안으로 내려(흡수) 갑니다. 최근 제가 하는 작업의 발상이자 개념은 이 두 가지 방식이 절충되어, 안료가 캔버스 바닥에서 위로 올라오는 느낌과 동시에 안료가 캔버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을 주려는 것입니다. 먹이 화선지에 흡수되기 전에는 단순히 얇은 화선지일 뿐인데, 먹이 화선지에 흡수 되는 순간, 화선지의 무수한 층이 드러나듯이, 어떻게 하면 이러한 흡수의 과정이 재현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심은록. 아시아 출신 서양화 작가들은 엄청난 원동력이 될 수도 있는 동양적인 냄새를 그들의 작품에서 제거하고 싶어하는 것을 자주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동양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시네요.
이배.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자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오랫동안 우리 신체의 기억이 담고 있는 환경을 외부와의 교류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이고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외부와의 매개체인 우리의 신체는 외부와 관련된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외부가 서양인에게는 서양이듯이, 동양인에게는 동양이기 때문에, 우리의 환경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면서 서구식(서양화식)으로 부딪혀 재현할 때 강한 원동력과 힘이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원동력이 고양되는 경우에는 어떤 특별한 환경에서 기인되었던 상관없이, 시공간적 경계를 넘어서는 공감각적 작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심은록. 예. 저도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자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비교를 통하여 서로의 차이를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화를 더욱더 용이하고 풍성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질문을 드리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동양화와 서양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배. 동양화, 특히 문인화의 경우는 시나 음악처럼 정신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예술을 하겠다고 덤벼들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닿으려는 정신세계나 고양된 인격을 드러내는 일종의 메타포가 동양의 예술이라고 봅니다. 반면에, 서양의 예술은 본격적으로 예술을 하려고 달려든 거에요. 이렇게 그 정신이나 방법에서 많은 차이가 있으니, 동양화가 서양사람들에게는 다가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한테는 조그마한 것부터 그리고 뭔가 간단한 것부터 관심을 끌어야 호감을 보이며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 저거? 내가 다 아는 거야”라고 생각되면 바로 호감을 잃습니다.
심은록. 하! 너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네요. 그래서 이우환 선생님께서 자주 인용하시는 말처럼 “진리는 스스로 감추기를 좋아한다”는 것 같아요. 진리의 영리한 면이죠.
이배.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술은 화면에서 바로 답을 주려고 하면 실패할 수 있습니다. “이게 뭘까?”하는 호기심으로 다가서게 해야 합니다. 이때부터 비로서 관람객은 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화면에 귀를 기울입니다.
심은록. ‘영상’에서 본 ‘달집 태우기’는 어떤 의식인가요?
이배. 한 해 가운데 달이 가장 밝은 정월 대보름 때 치러지는 행사입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심은록 씨가 영상에서 본 것은 제 고향 청도에서 ‘달집 태우기’를 찍은 것입니다. 솔잎과 짚단으로 인디안 천막처럼 만들어진 달 집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소원을 쪽지에 적어 달 집에 매답니다. 그리고 달이 뜨면 달 집을 태우면서 자신이 적은 소원이 이뤄지고 한 해 동안 무병무사하기를 비는 것입니다.
심은록. 소원을 담은 연기를 하늘로 올리면서 소원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고대 로마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사 혹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제의를 연상시킵니다.
이배. 고대는 하늘로 무엇인가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연기였던 만큼, 연기를 사용한 것은 인류의 공통된 감성에서 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연이나 초월적인 존재와의 대화를 시도한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오르네요. 한 겨울에 친구 한 명과 불장난을 하다가 개울 옆에 있는 헛간을 태워먹은 적이 있어요. 물론 달집태우기를 한 것은 아니었고요.
심은록. 큰일 날 뻔 하셨네요. 헛간이 모두 탔겠네요?
이배. 불나자마자 무서워서 도망가 버려서 다 탔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벌로 우리를 감나무에 잠시 묶어 놓았어요.[웃음]
심은록. 왜 하필 감나무인가요?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선생님의 데생 연작에 나오는 감들이 연상이 되어서 그럽니다. 감들이 각각 독특한 표정을 지니고 있는데, 감의 표정이 상당히 다양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배. 감나무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을에 감나무가 많으니까 감나무랑 같이 자란 거에요. 탱탱했던 감, 조금 쪼그라 든 감, 많이 쪼그라 든 감, 그리고 어떤 것은 감이라고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변형된 감, 작은 바람에도 부서져 사라질 것 같은 감, 등 다양한 감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전시할 때는 이런 시간적 순서나 형태적인 순서로 작품을 배열하지는 않아요.
심은록. 저는 감나무와 함께 자라지 못해서[감나무가 마을에 없어서], 작품 중에서 온전한 형태의 감을 찾기 전까지는 감이 그런 형태로 변형될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마침내 감이라고 알아챈 후에는, 감이 왜 저렇게 변형되었는지, 어떤 순서로 그림들이 배열되었는지, 그리고 온전한 형태의 감에서 가장 많이 변형된 감까지의 순서를 퍼즐 하듯이 찾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적 혹은 형태적 순서로 배열하셨다면, 아마 이러한 즐거움을 못 느꼈을 것 같습니다.
이배. 마을에 소나무도 있었어요. 송진에서 뽑은 수지를 증류하여 만든 테레빈(turpentine) 유에는 솔잎 향이 은근하게 납니다. 내가 왜 유화를 좋아하나 했더니, 어렸을 때 솔잎을 뜯어 먹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내가 숯, 감, 달집, 솔잎 등을 재발견하게 된 것은 고향을 떠나 타국에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외부(외국)에서 보니 내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반복과 해석
심은록. 선생님의 회화에 칼리그래피적 요소가 느껴져서 인지, 라깡이 말했던 ‘기표는 기의에 영원히 부유한다’라는 말이 연상됩니다. 비물질적인 언어가 아니라, 물질이 바탕이 되는 미술이지만, 이 둘의 중요 과제는 결국 무엇인가를 표현 혹은 재현한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배. 문학, 미술이나 음악도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이지요.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도 서로 일치하지 않겠지만, 예술가가 표현한 결과물(예술, 작업)이 언어로 설명될 때 그 차이는 더욱 심합니다. 클래식 음악가, 문학가, 미술가들이 인터뷰 하는 것을 가끔 흥미롭게 경청합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예술에 관해서 설명할 때, 문학가들이 하는 말과 그들의 작업은 상당히 일치합니다. 반면에 음악가들 말은 그들의 예술과 뭔가 모르게 동떨어진 느낌을 가지게 되요. 미술가들은 문학가와 음악가들의 중간쯤 된다고나 할까요. 문학은 언어로 표현되지만, 클래식 음악의 경우에는 출발점에서부터 언어를 넘어서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음악을 들을 때는 작곡가가 어떤 의도로 이 음악을 작곡했을까라는 분석 없이 바로 감상하려는 자세가 되요. 그런데 그림, 특히 현대미술은 사람들이 보면서 바로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하기보다는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해요. 저는 미술도 음악처럼 느낌이나 감동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화가의 그림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서 관람객들과 교류하는 것이지요. 그냥 내 데생을 보고 ‘감’을 보았다, ‘곤충’을 보았다, 혹은 내 회화를 보고 ‘네모’ 혹은 ‘세모’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것은 ‘몸’과 ‘감성’을 다 빼고 개념만 말하는 거에요. 느낌이 있어야 하는 거에요.
심은록. 그렇지요. 마치 조셉 코수스의 ‘세 개의 의자’, 조셉 보이스의 ‘의자’, 빈센트 반 고흐의 ‘(고호 혹은 폴 고갱의)의자’를 보고 나서 단지 “의자를 보았다”고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이배. 사실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느낌이 머리 속으로 명료하지 않아도 손으로 이어진 가슴으로 느낌을 표현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림을 보면서 저건 삼각형 구조로 되어있고, 사과는 점묘법으로 그려졌다고 분석이 앞서는 것은, 마치 음악을 들으면서 제2 주제가 현재 다섯 번째 반복되고 있다며 세고 있는 것과 비슷해요. 우선은 느낌을 가지려고 하고, 그 느낌을 반복해서 보거나 들으면서 심화시키고, 그리고 나서 분석에 들어가도 늦지 않습니다.
심은록. 지금까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과 관련하여 현재성과 영원성(초월성)의 문제에 늘 부딪힌다고 봅니다. 그런데, 요즈음 현대미술은 현재성에 너무 민감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현재성이란 사회적 관계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이배. 문학, 미술, 건축 등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사회적인 관계성에 놓여있어요. 그런데, 음악은 이러한 관계성이 훨씬 약해요. 그래서 나는 음악이 감성을 직접 다루는 예술인데, 왜 반대로 사회적인 관계성이 다른 예술에 비하면 약한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봤어요.
심은록. 우리의 말초감각은 계속 새로운 자극을 원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고양된 감성은 잘 변화하지 않아서 그런걸까요?
이배. 현대미술인들이 키네틱을 사용하고, 영상과 음향을 넣고, 사회정치적 사건, 철학적 사상 등을 포함시키거나 받아들이며 현대 사회에 반응하는 미술을 만든거에요. 그런데, 음악에는 사회적 현상이나 인간의 사회와 연관성을 지을 마티에르 측면의 가능성이 없어요. 그리고 절대성, 초월성이나 숭고성을 자체 함유하고 있어서, 이 덕분에 시대와 상관없이 청중들의 영혼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굳이 일시적인 사회적 현상이나 인간적 조건에 얽매일 이유가 없지요.
심은록. 음악은 사회적 현상이나 인간적 조건에 민감한 문학이나 미술처럼 직접적이거나 구체적이지는 않는데도, 조금 전에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대로 감성에 직접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면서도 신기합니다. 그래도 발을 땅에 디디고 있으려는 작곡가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배. 존 케이지(1912-1992)는 변혁의 시대에 적극적인 참여를 한 혁명가인데, 외부를 받아들이는데 용감했던 혁명가로 봅니다. 그는 동양, 특히 일본 선불교 학자인 스즈키 디아세쓰 (1870-1966, 일본의 zen (선禪)불교를 서구에 널리 알리며, 동서의 철학과 종교의 가교가 된 학자)에 매료되었고, 이를 음악으로 잘 재현했다고 봅니다. 당시 미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는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아, 동서양의 개념적 접근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접목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동양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동양적 관점에서 본 동양화가 아니라, 서양적 관점에서 본 동양화처럼 지극히 한정된 개념으로 검증되었고, 중국의 공자라던가, 혹은 일본의 절제, 미니멀리즘적인 것을 동양 정신의 모든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즉 자신의 관점에서 타자를 규정하려고 했던 것인데, 존 케이지는 타자의 관점에서 타자를 보고, 타자의 눈을 통해 자아를 보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코페르니쿠스적인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 것이지요.
심은록.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는 특히 동양사상의 어떤 부분이 서구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는지요?
이배. 우선 첫 번째는 ‘무’(無)에 대한 차이라고 봅니다. 허무적 개념적 철학적 의미의 서구적인 무가 아니라, 자신을 비운다라는 실생활적 차원의 ‘무’라던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실천적 측면에서 ‘무’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동양의 ‘무’는 서구와 비교하여 실천양식이나 적용방법에서 다르다고 봅니다. 서구인들은 지식이나 교양으로 머리를 채울 것을 강조한다면, 동양은 마음이나 자신을 비우는 것을 더 중요시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존 케이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4분 33초>는 중요하면서도 상당히 흥미롭게도 ‘무위자연’이라는 말과 잘 어울려요. 존 케이지는 최대한 아무 것도 연주하지 않음으로 최고의 연주를 한 것이니까요.
두 번째로는 ‘반복’ (tautology 同語反覆)이라는 것,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라는 성구처럼, 서구에서는 계속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더 나아가 허무한 것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의미 없는 것을 반복 함으로서, 즉, 무의미의 반복에서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심은록. 동서양에서 반복의 의미가 달랐던 것은, 서구는 일찍부터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지게 되었고, 농업이 중요했던 동양은 순환적인 시간관이 그런 차이의 중요한 배경이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배. 그래요. 하지만, 이제 동서양이 활발히 교류하면서 많은 부분을 서로 공유하고 있어요.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수없는 반복 가운데 발생되는 차이에 대한 중요성을 철학적으로 잘 정립을 했어요. 사실 아주 조금의 차이를 위해서 스포츠맨들, 연주가들 그리고 미술가들도 무한한 반복을 하고 있어요.
심은록. 최근 인터뷰에서 사르키스(Sarkis)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반복은 또 다른 해석이다”라고요. 불어의 «interpréter » [연주하다, 해석하다] 라는 말이 아주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interprète»(연주자)는 작곡가의 의도를 최대한 존중하며 곡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해석을 하니까요. 미술에서도 또다른 형태의 반복 및 해석이 고대부터 이뤄져 왔고[특히 로마의 조각은 그리스의 조각을 그대로 모방함], 특히 현대의 일명 ‘도용미술’파인 리차드 프린스나 셰리 레빈, 신디 셔먼, 바버라 크루거 등의 일부 작품들은 음악적인 의미에서 «interprète »였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최근 회화 작업은 이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반복과 차이를 잘 재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 번 모두 거의 같은 모티브의 반복이지만, 이 세 번의 같은 반복을 위해 차이가 축적됩니다. 세 번의 반복에서 축적된 차이는 흐릿한 (flou) 효과를 내며, 도형 혹은 기호적인 모티브와 여백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합니다.
예술가의 조건, 미지의 두려움
심은록. 선생님의 전시회 때, <Issue of fire>(2000)를 보던 한 관람객이 ‘술라쥬의 <Outrenoir>가 아닌가?’하고 놀라서 가까이 가 보더니, 마티에르나 방식이 너무 다르니까 더 놀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 술라쥬와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지는 않으셨나요?
이배. 술라쥬가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내가 하려고 하는 작업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을 하려는 것이다. 내가 잘 모르는 그 무엇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참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아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을 한다는 말이지요. 사실 인간 조건의 보편적인 상황은 시간, 환경, 미지의 타자 등 알 수 없는 것들과 자신과의 끊임없는 만남 속에 뒤섞여 사는 것이거든요. 스스로 의식을 하지 못해도 자신이 모르는 것과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때로는 받아 들이면서 사는 거에요. 불어에서 아는 것에 관한 두려움은 ‘겁’(peur)이라고 하고,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두려움’ (craint)이라고 하는데, 바로 미지에 대한 ‘두려움’ (craint)을 받아들이는 거에요. 우리는 그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본질적으로 있는 거에요.
심은록. 어찌 보면 외부나 타자에 대해서도 ‘아는 것에 대한 겁’(peur)이 아니라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craint)인데, 지금까지 착각을 해 온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림을 그리면서 미지에 대한 어떤 두려움을 느끼시나요?
이배.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확신이 있어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내가 오랫동안 늘 해왔던 습관이나 반복을 통해 내 삶에 일종의 프로세스 혹은 방식이 생기고, 그렇게 작업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또 오랜 시간 축적되고 구축되는 것을 통해 ‘나’를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릴 때마다 ‘아, 끝없이 불안 할 수 밖에 없는 일을 내가 하고 있구나.’라는 자각이 듭니다. 반면에 내게 이런 미지의 불확실성이 없었다면, 즉 내가 무엇을 할지 다 알았다면, 흥미가 없어서 이거[그림] 안 했을 거에요. 또한 두려움이라는 것은 그것이 크던 적던 간에 ‘이게 무엇인가’라는 끝없는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질문의 과정이 결국은 내가 작가로서 살아가는 길인지도 모르죠.
심은록. 술라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안다. 모른다’라는 의미가 지식이나 인식의 영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배. 술라쥬가 이야기 한 ‘내가 하는걸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영감이라 그럴까 외부에 오픈해 놓는다는 것으로 생각해요. 나도 막연하게 이러한 종류의 영감에 의지하고 있다고 봐요. 그러나 내 머리 속에서 나오는 영감이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영감을 말하는 거에요.
심은록. 그래서 불어나 고대그리스 원어로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 온 것을 영감(inspiration < in-spirare)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내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요. 흥미로운 것은 내부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숨을 내쉬는 것(expiration < ex-spirare)이고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예술과 현실적인 일상성과의 괴리는 없으신가요?
이배. 예술과 삶이 함께 조화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나와 같지 않을까 싶어요. 나는 내 삶에 맞추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맞추어 내 삶을 삽니다. 즉, 내 초점은 현실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맞춰져 있고, 이 그림에 맞추어 현실을 살고 있는데, 이 초점과 현실적 삶의 초점이 일치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내가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될 때, 혹은 내가 현실과의 관계에서 내 시점이 필요할 때, 그 결정은 그림에서 와요. 명예나 지식이나 가문 등에 초점을 두는 사람도 있지만, 화가는 그림이에요. 그림이 내 현실의 기준이 되고 이를 통해 현실세계에서 산다고 볼 수 있어요. 세상과 다른 이러한 초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면 굉장히 애매모호할 수 있습니다.
심은록 (SIM Eunlog, 미술비평가)
2008년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오감과 유용한 진리Cinq sens et vérité utile」로 철학인문과학 박사 학위 취득, 2008~2009년 동 대학원에서 박사후 과정. 2008~2011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초청연구원(CNRS-CEIFR[UMR CNRS 8034]). 현재 미술비평가 및 예술부 기자로 프랑스에서 활동 중.
저서로 『나비왕자의 새벽작전―오토니엘의 예술세계』(ACC프로젝트, 2011), 『내 머리 속의 섬』(그림 장 미셀 오토니엘. 재미마주, 2012),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10―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특별하게 만드는가?』(아트북스, 2013), Daniel Buren, Marc Sanchez, Sim Eunlog, et al. Daniel Buren Les Écrits 1965-2012 (participation/ Volume 2: 1996-2012. Paris: Flammarion, Centre national des arts plastiques 2013). 『양의의 예술, 이우환과의 대화 그리고 산책』(현대문학, 2014).
그 외, 「마르틴 키펜베르거론」, 「피터 도이그론」, 「다니엘 뷔렌론」, 「쩡판즈론」, 등 다수의 평론과 「베네치아 비엔날레」, 「그랑파리 건축 프로젝트」 등 다수의 분석론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