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
禪으로부터의 그림
법관스님은 2007년 개인전의 타이틀을 『비산비수전(非山非水)』展이라 붙인 바 있다. 아마도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닌' 그 어떤 상태를 염두에 두었지 않았나 싶다. 도록의 글에서 스님은 또 쓰기를, '산을 그리고 싶은 마음을 따라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깊은 산이 되어 있네.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과 같이 보고 싶었네'라고 했다. '비산비수(非山非水)'를 더 풀어쓰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山非山, 水非水)'라고 의역할 수 있는데, 이는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유명한 법어와 대치된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든 물상의 진면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저 사물을 본떠 그린 그림은 이미지를 담고 있다. 사과, 나무, 산, 사람 등등,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본다. 그러나 그것이 캔버스에 바른 물감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지적한 사람이 서양에 있었다. 일찍이 모리스 드니는 '회화란 군마나 나부, 혹은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색채로 뒤덮인 하나의 평면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그림을 이미지나 사건으로 대하는 시각에서 물질, 혹은 평면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비롯되었다. 법관스님의 노트 중에서 흥미있는 대목은 마음의 행적이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그는 '산을 그리고 싶은 마음을 따라 들어가다 보니'라고 썼다. 이른바 자유연상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필시 산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였을 것이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줄곧 산의 이미지가 머리 속에 떠올랐을 것이다.
2007년의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이 발심(發心)의 결과물이다. 거기에는 산과 폭포, 숲이 자리를 잡고 있다. 타는 듯한 붉은 색채에 푸른 색채의 대비가 화려해 보이는 작품들이다. 얼핏 보기에 단청이나 탱화를 연상시킨다. 골짜기 여기저기서 삐죽 모습을 드러낸 숲들은 꼭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을 닮았다. 석채를 기조로 하여 아크릴과 동양화 물감을 혼합해서 그린 법관스님의 그림들은 발색이 잘 이루어져 높은 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을 대하면 청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그림이 단청이나 탱화에서 발원한 것 같다는 느낌은 첫째 생활환경에서 온 것이요, 둘째는 색의 연상작용에서 비롯된다. 특히 진황이나 진청 등 단청색에 가까운 색가(色價)와 연한 중간색들이 중간 중간에 삽입된 것이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아닌가 싶다.
풍경에 기반을 둔 것이로되, 법관스님의 그림들은 전체적으로 현실을 떠난 세계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상향과 같은 세계다. 기암괴석이 있고, 달이 있으며, 신령한 숲과 폭포가 있다. 스님은 '산을 그리고 싶은 마음을 따라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깊은 산이 되어 있네'라고 썼다. 붓끝에 마음을 실어 그림을 그리는 동안 깊은 몰입의 경지에 도달한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선(禪)의 경지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그림 수행이 곧 선수행인 까닭이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니, 달을 보는 순간 손가락을 잊어야 한다. 손가락은 달에 미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깊은 산을 만났으면 됐지 그린 과정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그래서 법관스님의 그림은 맑고 청아한지도 모른다. 도록에 일체 화력을 밝히지 않을 정도로 세속을 떠난 자세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일체의 다른 작업이나 노동을 하지 않는 것, 밤과 흐린 날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 등등 그가 세운 일련의 규칙은 선수행처럼 엄격하게 지켜진다. 이른바 청정한 마음으로 화폭을 대하는 것이다.
2007년의 개인전 도록에는 채색 산수화에서 구성적 경향의 작업으로 점차 이행해간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 발전된 모습이 이번 개인전에 출품하는 작품들이다. 물상의 이미지를 점차 버리고 화면의 내적 질서를 추구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진한 청색과 적색의 대비를 통한 화면구성이 특징이다. 화면을 구획하는 유연한 선들이 면을 이루고 거기에 청색과 적색, 그리고 미묘한 톤을 달리하는 중간색들이 더해져 일종의 만다라와도 같은 전체의 화면을 형성한다. 여기서 구체적인 사물을 연상시키는 형상은 소거된다. 오직 차분히 가라앉은 청색과 튀어나오려는 듯한 적색의 화면들이 연출하는 색채의 부딪힘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부딪힘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부딪힘이 아니다. 거기에는 조화가 있고 색채 간의 잡아당김 즉, 길항(拮抗)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은근히 소매를 잡아끄는 것은 인간사의 매력이 아닌가. 색채도 마찬가지 일 터, 은근한 잡아당김이 있기 때문에 화면은 일렁이지 않고 침잠돼 보이며, 정관적인 느낌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법관스님은 균형감각을 가지고 사물을 관찰한다고 말한다. 또 옛것을 보면서 오늘의 언어를 창출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근작들은 과연 고답적인 내음을 풍기지 않는다. 추상화풍의 근작들은 사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에서 비롯된다. 사물의 외형적 모습에서 비롯되는 이미지를 제거하고 본질에 육박해 들어가려고 하는 의지는 단순한 형태를 낳고 있다. 일련의 난 그림이 한 예이다. 그는 이 일련의 난 그림을 통해 '난도 아니고 선도 아닌' 어떤 애매한 형태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닌' 어떤 상태, 난처럼 보이기도 하나 독립적인 선들의 조합. 이는 이른바 형태심리학에서 말하는 얼룩과 얼굴 이미지의 연상관계를 상기시킨다. 이 난 그림은 대범한 화면 구성이 특징이다. 난색과 한색의 과감한 대비가 커다란 면적의 화면분할과 어울려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법관스님은 이번 개인전에 300호짜리 대형 작품을 출품한다. 붉은 색조의 다양한 뉘앙스를 지닌 작은 화면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 것이다. 비정형의 작은 면들은 서로 굴곡을 이루어 마치 하늘에서 바라다 본 대지를 연상시킨다. 작은 형태들은 적당한 크기의 구획을 이루며 마치 만다라와도 같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이 단색조의 화면은 순도높은 색가로 이루어져 밝고 청정해 보인다. 붉은 색이되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색의 순도에서 오는 것 같다. 지극한 것은 서로 통한다는 이치가 마음에 와 닿는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그 보다 작은 크기의 작품들을 실험하였다. 일련의 연작인 셈이다.
난색과 한색의 보색대비에 의한 구성적 경향의 추상화가 법관스님의 최근 경향인 바, 이는 난색 혹은 한색끼리의 서로 다른 색가에 의한 구성과 병행하면서 전체적으로 색과 형에 의한 실험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유연한 선이 덧붙여진다. 그의 작품은 면의 그림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선의 예술이기도 하다. 그것은 수행이라는 스님의 삶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윤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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