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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續) 아시아는 불타고 있는가?

윤진섭

전시기획자가 저에게 요청한 주제는 ‘아시아 미술의 현황’에 관한 것입니다만, 이처럼 짧은 시간에 방대한 아시아 미술의 현황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적절치 않게 생각되고 또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그보다는 오히려 오늘날 유독 왜 아시아의 문제가 아시아에 속해 있는 국가들에게서 제기되고 있으며, 그러한 문제의 저변에는 어떤 근원적인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이 기회를 빌어 간략히 살펴볼까 합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아시아의 미술이 세계 미술계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게 된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중국의 약진입니다. 북경 올림픽을 불과 한 달 앞둔 지금 북경의 타산즈(大山子)798을 비롯한 예술특구에는 많은 서양인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이는 중국 현대미술의 강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현대미술에 관한 한, 후발주자로 출범한 중국이 비엔날레를 비롯한 국제전이나 각종 아트 페어와 경매에서 주빈 대접을 받는 까닭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중국의 경제적 잠재력을 바탕으로 한 ‘국가의 힘(power of nation)’ 때문입니다. 나라가 힘이 있으니까 세계의 이목이 집중하게 되고 그것은 곧 그 나라의 브랜드 가치로 이어져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후광을 갖게 된 것이지요. 가령, 얼마 전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연 적이 있는 중국의 쩡판즈(Zeng Fanzhi)는 최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유화작품 한 점이 101억 원에 낙찰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중국의 저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1964년생이니까 아직 40대 중반에 불과한 한 중견작가의 작품이 이처럼 고가로 거래가 된다는 사실은 중국이라는 후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시회에 대한 리뷰를 쓰고 또 그와 친분이 있는 저로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습니다만, 그와 비슷한 연배의 한국 작가 중에서 그의 회화적 역량과 동열의 작가를 찾으라면 왜 없겠습니까? 한국에도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있고, 또 그 중에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여럿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미술행사에서 유독 중국과 일본이 특별한 대접을 받는 이유는 바로 국가의 힘, 다시 말해서 ‘브랜드 파워로서의 국가적 이미지’가 갖는 특권 때문인 것입니다.
중국이 국제무대에서 각광을 받았던 사례는 또 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세계적인 전시기획자 하랄드 제만(1993-2003)이 1999년에 열린 제48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왕두를 비롯한 무려 20여 명에 달하는 중국 작가들을 초대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그 일을 가리켜 ‘사건’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서양인들이 아시아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전언에 의하면, 제만은 “중국이 바이블이라면 한국과 일본은 보통의 책”이라고 했다는데,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보편적 가치를 지닌 예술에 절대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예술에 서열(hierarchy)을 만든 비지성적 행위를 한 셈이 됩니다. 중국이 이 사태를 맞이하여 행복한 미소를 지었는지는 확인한 바가 없습니다만, 적어도 유럽을 비롯한 서구와 아시아라는 두 문명권의 위상관계를 따져볼 때 굴욕적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를 비롯한 국제회의에 자주 참가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머리 수’가 지닌 불균형의 한계입니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서양인들의 틈바구니에 어쩌다 껴있는 동양인이나 아프리카인들을 보면서 동양인의 입장에서 볼 때 국제협의체의 미래가 암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안건이 의결될 때 그것을 가리켜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한 것이라고 자위해 보지만, 다수의 그늘에 가린 소수의 목소리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한 미술잡지에 기고한 다음의 글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져 소개해 볼까 합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주제의 번드르르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 무력화하는 블랙홀이다. 주제의 허장성세, 가령 ‘인류의 고원(Plateau of Humankind)’이 표방하는 보편성의 이면에는 얼마나 거대한 유럽 중심적 사고가 똬리를 틀고 있던가. 90퍼센트의 술에 10퍼센트의 물을 탄다고 해서 술이 물이 되는가. 중국 작가들을 대거 초대한다고 해서 인류의 보편적 지평이 열리는가. 아니다. 그들은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 역시 자신만의 돋보기로 세계를 읽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광주비엔날레는? 역시 정반대의 의미에서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
머릿수가 비슷해야 힘도 나고 용기도 생긴다는 것을 나는 유럽중심적인 국제회의나 비엔날레와 같은 미술 현장에 갈 때마다 실감한다. 머릿수가 곧 힘이라-이 말은 얼핏 마키아벨리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란 말처럼 들릴런지도 모른다-는 말은 민주주의가 파놓은 교묘한 함정에 불과하다. 다수의 그늘에 가린 소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의 보편적 지평은 열리지 않는다.”
Art in Culture | 2003년 12월호


위의 글을 읽어보면 중국이 더 이상 행복한 미소를 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48회 베니스비엔날레 <아페르튀토> 전에서 하랄드 제만이 중국 작가들을 대거 초대한 것 역시 다분히 전략적 사고의 결과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다시 ‘바이블’ 운운했던 제만의 발언을 상기해 본다면, 그의 발언에서 해묵은 유럽중심적 사고(Eurocentricism)의 잔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 다음의 49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전시총감독으로서 ‘인류의 고원’을 주제로 내건 제만의 입장이라면, 베니스 비엔날레가 문자 그대로 인류의 축제가 되기 위하여 서구의 작가들과 함께 아시아 작가들을 고르게 포진시켰어야 온당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이 곧 아시아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간의 이처럼 심한 불균형은 동양에 대한 기획자의 무지나 편견에 기인할 수도 있고, 또 앞서 말한 것처럼 전략적 사고의 소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진의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물어보려고 해도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제만과 같은 세계적인 전시기획자가 되어 전시를 기획할 차례입니다. 어느 날 작가선정에 골치가 아파진 여러분이 머리도 식힐 겸 푹신한 사무실 소파에 앉아 동료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 손에는 커피 잔이, 다른 손에는 담배가 쥐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옆에 앉은 동료 큐레이터에게 가볍게 말을 겁니다.

“이 친구 어떻게 생각해? 작품도 탄탄하고 괜찮은데......”
“그래? 근데 누렁이(Yelli)가 너무 많잖아. 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Yelli’라는 단어가 당파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명한 언어학자인 하야까와는 단어를 ‘으르렁’ 말(敵意語:snarl words)과 ‘가르릉 말(好意語:purr words)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으르렁’ 말은 적의를 함축한 말로서 가령 ‘공산주의’나 ‘파시스트’와 같은 단어가 이에 해당하고, ‘가르릉’ 말은 ‘민주적’과 같은 단어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 중에서 특히 ‘으르렁’ 말은 분위기에 따라 상대방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다음의 예를 생각해 봅시다.

“유명한 흑인 사회학자 한 사람이 자기 사춘기 때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고향을 멀리 떠나 흑인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지역에 차를 편승하여 여행하였는데, 아주 친절한 백인 부부와 친하게 되어, 이 부부는 먹여 주고 자기 집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이 백인 부부는 줄곧 그를 ‘작은 검둥이(little nigger)’라고 불렀다. 그는 부부의 친절에 감사하면서도 참을 수 없이 감정이 상했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백인 남자에게 자기를 그 ‘모욕적인 말’로 부르지 말라고 말했다.
“누가 모욕을 해, 이 사람아” 백인의 말이었다.
“아저씨가요. 절 부를 때마다 쓰는 그 이름 말예요.”
“무슨 이름?”
“어......아시면서요.”
“아무 이름도 안 불렀는데”
“‘검둥이’라고 부르시는 것 말예요.”
“아니, 그게 어디가 모욕적인가? 자네 검둥이잖아?”
(하야까와, <사고와 행동 속의 언어>, 제프리 리이취(Geoffrey Leech), <언어의미의 기능과 사회>에서 재인용, 이정민 역, ‘언어과학이란 무엇인가’, 문학과 지성사 간)

제프리 리이치는 인용을 마치면서 이처럼 “만지면 아픈 데에서 이해가 무너지는 원인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저는 서양에 대한 동양이 이러한 근원적인 아픔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근대의 서세동점 이후 멀게는 인도에서부터 가깝게는 일본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 제국이 다같이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흔(trauma)에 기인합니다. ‘지배와 복속’이라는 관계에서 파생된 회복하기 힘든 역사적 트라우마가 아시아인들에게는 화인(火印)처럼 남아있습니다. 오늘날 흔히 논의되는 ‘글로컬리즘(glocalism)’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지역적 특수성이 곧 세계적 보편성으로 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또한 맞는 말 같지만 이처럼 문화적 불균형이 심한 상태에서는 그 실현이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문화예술의 교류는 무엇보다 균등한 호혜주의의 입장에서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한편이 역조현상을 맞이하여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됩니다. 가령, 동서양간의 문화교류에 있어서 한쪽은 비용을 부담하여 초청을 하는데, 다른 쪽은 자비 부담을 해야 한다면 이는 균등한 호혜주의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엔날레와 같은 행사에서 이러한 불균형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외국, 특히 서구의 작가나 비평가, 전시기획자, 저널리스트, 미술관장 등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호의는 때로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비엔날레 현장에서 오픈행사가 끝나면 서양의 미술관계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후에는 집안 잔치가 되고 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피 같은 혈세를 낭비하면서 이런 행사를 과연 언제까지 지속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누군가는 ‘동양은 서양의 거울’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기들이 뿌린 씨앗이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고 간다는 말이지요. 그것도 융숭한 대접을 받아가면서 말입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이는 마치 일제시대의 소작농을 연상시킵니다. 우리의 경우 서양의 유력한 미술평론가나 전시기획자, 미술관장을 초청하여 칙사 대접을 했던 관행이 일부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게 먼 옛날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얻은 것은 고작
입에 발린 찬사 몇 마디와 함께 “서양의 작가 아무개의 작품을 연상시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단언하건대, 이처럼 주체성이 없는 작가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 미술은 결코 세계적이 될 수 없습니다.
빨리 부국(富國)을 해야겠습니다. 아시아가 세계 속에 우뚝 서기위해서는 빨리 부자가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역사적 내지는 심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이는 유럽에 대한 심리적 트라우마를 지닌 미국이 국부를 이룩하고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여 세계의 경제와 정치, 문화, 예술을 한 손에 쥐락펴락하는 위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미술에 관해서 말하자면 거의 민화 수준의 보잘 것 없이 빈약한 유산을 지닌 미국이 오늘날 세계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강력한 중심 국가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줍니다. 그 이면에서 기업인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애정, 베니스 비엔날레와 같은 유명한 국제전에 임하여 자국의 작가들을 세계적인 작가로 육성한 한 미국인들의 치밀한 전략적 사고가 숨겨져 있습니다.
뒤 늦게 근대화를 이룩하고 무한 경쟁에 뛰어든 아시아 제국은 구미의 선진국들처럼 번 돈을 품위있게 사회에 환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전통이 확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화예술의 인프라가 아직은 튼실한 편이 못됩니다.
오늘날 미술에 대한 각종 지표에서 아시아작가들이 구미작가들보다 뒤처지는 이유가 아시아의 작가들이 구미 선진국의 작가들보다 재능이 부족해서 그렇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세계 미술계의 거의 모든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시각이 그들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관점과 제도를 통해 세계의 미술이 진행될 때 이미 고착화되다시피 한 세계미술의 판도는 재편의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전시기획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우수한 전시기획자를 발굴, 육성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우수한 문화유산과 재능있는 작가들을 외국에 소개해야 할 때입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국제적 현실에 맞는 문화전략의 강력한 드라이브 정책의 개발입니다. 필요하다면 아시아 제국의 큐레이터, 비평가, 미술관 관계자들이 모여 이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항구적 협의체의 구성이 시도돼야 하겠습니다.
‘아시아비평포럼’을 창설한 저의 입장에서 이에 대한 복안이 왜 없겠습니까? 시간 관계상 이 점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merging Asia> 세미나 기조강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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