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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계화 그리고 왕희지 난정서

윤철규

사람, 물건 그리고 돈이 무시로 국경을 넘나드는 것. 흔히들 오늘날 우리들이 겪는 세계화라는 현상을 이런 말로 설명한다. 세계화라는 거창하고 복잡무쌍한 시스템이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 같은 개인에게 세계화는 나라밖 세상을 구경할 기회가 더 많아 졌다는 사실로도 다가온다. 또 꿈도 꿀 수 없었던 것들을 눈앞에서 목도(?)할 수 있게끔 해주기도 한다. 세계화의 은택을 입어 세계적 명작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 한 세대 전만해도 선택받은 극소수만이 이 그림 앞에 설 수 있었다. 요즘 모나리자 관광객 속에는 중국인들도 다수 포함돼있다고 한다. 


서양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동양에서는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아시아에는 이렇다할 대표선수가 정해져 있는 것 같지 않다. 개인적 견해를 말해보자면 서화(書畵)를 둘로 나눠 그림에는 곽희(郭熙)의 <조춘도(早春圖)> 그리고 글씨 쪽은 뭐라고 해도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가 꼽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계화라고 해서 기회가 마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곽희의 조춘도는 작년 초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의 중요성을 간과하였기 때문에 놓쳤다. 왕희지의 난정서는 최근 직접 그 앞에 설 기회를 얻었다. 좀 민망한데 허겁지겁 슬라이딩하듯 전시 종료 이틀을 앞두고 일본에 건너가 실견했다. 영화구년 세재계축 모춘지초(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로 시작되는 <난정서(蘭亭序)>는 왕희지가 회계(현재의 절강성 소흥)의 명승지인 난정에 42명의 시인, 묵객들을 불러모아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를 열고 시를 묶어 문집을 내면서 거기에 붙인 서문을 말한다. 문장 내용이 탁월한 점도 있지만 서성 왕희지의 글씨라 당나라 이전부터 이미 천하의 보물 대접을 받았다. 흔히 세상에 왕희지의 진적 글씨는 단 한 점도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난정서 역시 그를 혹애(惑愛)해 마지않던 당 태종이 죽으면서 무덤 속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세상에 없다. 일본 전시의 난정서는 영화구년(永和九年)의 영자 옆에 신룡(神龍)이란 연호의 신자 도장만 보인다고 해서 신룡 반인본(半印本)이란 근사한 별호가 붙어 있다. 이는 당 태종이 모사 전문가인 풍승소(馮承素)를 시켜 쌍구전묵(雙鉤塡墨) 방식으로 원작을 베끼게한 것이다. 


쌍구전묵법이란 종이를 원본 위에 펼쳐놓고 밝은 창문 같은데 대고 광선을 비치게 하면서 윤곽을 베끼고 그 속에 먹을 채워 넣은 것을 말한다. 일견 거칠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지만 그렇지않다. 가는 붓을 사용해 머리카락 같은 선을 무수히 그어서 내부를 채운 것이다. 눈으로 봐서는 절대 구분할 수 없다. 풍승소는 탁월한 기량의 소유자로 태종은 그를 시켜 왕희지 편지글 등을 여럿 모사케 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일본이 자랑하는 왕희지의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매지첩(妹至帖)같은 편지글은 이런 방식으로 모사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번 난정서의 일본 전시에는 약간의 흥미로운 뒷배경이 있다. 꿈이랄까 소망이라까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 경쟁 상대와의 한판 힘겨루기와 같은 다분히 과시적 요소까지 들어있다. 



거슬러 올라가 2003년 여름. 상해박물관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북송 태종때 제작한 순화각첩(淳化閣帖) 초각본 4권을 미국인 컬렉터에게 4백 50만불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순화각첩은 법첩중의 제왕이라고 손꼽히는 작품이다. 이는 당시 북송 궁정에 소장돼있던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의 글씨를 비롯해 역대 제왕, 명신 그리고 여타 유명 법첩 등을 편집해 10권 세트로 만든 것이다. 이 첩은 청나라 말기 북경 원명원(圓明院)이 영불 연합군에 의해 방화, 약탈될 때 유럽으로 건너갔다. 말하자면 근대 중국의 불행을 직접 겪은 장본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첩의 회수를 주관한 사람이 당시 상해박물관 관장 왕경정(王慶正)씨였다. 왕 관장의 전공은 서예사. 그중에서도 법첩이 전문이었다. 그는 50년대 초 스승인 서삼옥(徐森玉)에게 지도를 받으며 서예사 가운데 이렇다할 전공자가 없는 법첩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해볼 것을 권유받았다. 공부를 하면서 그는 놀라기도 하고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있었다. 중요한 중국고대 탁본의 상당수가 일본에 있었다. 그리고 중국 서예사의 근간에 자리하면서 끊임없이 추종과 이탈의 대상이 되어온 왕희지 글씨, 그 글씨의 당나라때의 모본(摹本)이 일본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왕관장은 연구 목적으로 20여 차례 이상 일본을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송탁 석고문, 송탁 태산각석은 물론 당 태종때 제작된 왕희지 간찰의 쌍구전묵본을 접하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소망 하나를 품었다. 이들을 중국 인민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꿈이 었다. 



2002년 상해박물관 개관 50주년 기념전시인 '진당송원화(晋唐宋元畵) 국보전'을 계기로 왕관장은 꿈의 현실화를 타진했다. 당시 초청한 도쿄국립박물관 관장에게 교환 전시를 제의한 것이다. 그리고 때 맞추어 이듬해 여름 순화각첩을 손에 넣으면서 서로 빌려주고 빌려올 기본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2006년 1월 도쿄국립박물관에서 드디어 '書의 至寶전-일본과 중국'이 열렸다. 일본에서는 석고문, 태산각석, 왕희지의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십칠첩(十七帖), 정무난정서 탁본 등을 내놓았고 상해박물관은 순화각첩과 명청대 서예작품을 내놓았다. 도쿄 전시를 마치고 이 전시는 상해로 건너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왕관장은 일본 전시를 두달 반쯤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날 자신이 꿈꾸어온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는 지켜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전시에는 아사히신문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정작 일본내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적지 않았다. 일본은 국보급이랄 수 있는 왕희지 작품이 총출동했는데 그 쪽에서는 순화각첩 뿐이라는 것이다. 5대 1정도의 밑지는 교류라는 지적이었다. 이런 세평 속에 경쟁상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직였다. 도쿄도, 마이니치 신문사가 에도도쿄박물관과 스크럼을 짜고 베이징과 베이징 고궁박물원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명분은 올림픽이었다. ‘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이 문화 대국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충실한 컨텐츠를 널리 알려야’이런 설득을 통해 국보 16점을 포함해 65점의 고궁박물원 소장의 역대 서예 명품이 사상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일본에 소개된 것이 '북경고궁, 書의 名寶전'이다. 북경 올림픽을 사이에 두고 지난 7월 15일 부터 9월 15일까지 에도도쿄박물관에서 열린 이 전시에는 무려 10만 명 넘는 관람객이 몰렸다. 이들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한결같았다.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바로 왕희지 <난정서(蘭亭書)> 모본 앞이었다. 


사실 이 전시에서 <난정서>가 일반의 큰 주목을 받았지만 왕희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로 북송 황산곡의 글씨가 있다. 산곡은 왕희지를 결단코 버리고 떠나야만 글씨가 산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길이 7미터가 넘는 초서 <제상좌첩(諸上座帖)>은 그런 주장이 담긴 산곡 만년의 걸작이다. 왕희지가 대세인 가운데 왕희지를 떠나지 않고서는 개성적인 인격이 담긴 글씨를 쓸 수 없다고 한 황산곡. 세계화 은택으로 왕희지 난정서까지 배관한 주제에 대세에서 멀어지라는 산곡의 말에 잠시 달콤하게 현혹되는 것은 이 무슨 어깃장인가.



윤철규(1957- ) 일본 도쿄 학습원대 박사. 계간미술∙중앙경제∙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및 차장 역임. 현 서울옥션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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