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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박서보_예술, 마음을 비우다

세계적인 미술서적 출판사 애슐린(ASSOULINE)에서 박서보의 작품과 사진들을 담은 『Empty the Mind』를 출간했다. 지난해 말 『The Color of Nature-Monochrome Art in Korea』에 이은 두 번째 출간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집에는 박서보 작가만을 다뤄 이전의 모노크롬 작가 9명을 소개했던 책과는 차이를 보이며, 이러한 단독 출간이 아시아에서 처음이라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닌다. 또한 미국과 유럽 전역의 대형 백화점 및 서점에서만 판매하는 고급 마케팅으로 유명한 출판사인만큼 그 출판의 대상이 되기란 매우 힘든 점을 감안할 때 이번 출간은 매우 뜻 깊은 경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해외 활동이력을 보면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세계 공용의 미국 대학교재에서 백남준과 함께 아시아 현대 작가 중 유일하게 박서보의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으며, 세계 유수의 박물관과 갤러리가 그의 작품 소장에 열을 올리는 것은 작가의 높은 위상을 반증한다. 이번 책의 시작은 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의 단색주의를 널리 알리고 있는 전시기획자 조순천씨를 통해 작품을 접한 애슐린 사장 내외가 작가의 작품에 반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사장 내외는 작가의 화집과 슬라이드 파일을 처음 접하고 매우 놀라 개인전에 직접 오려고까지 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오지 못한 것에 대한 섭섭함을 전했다고 한다. 조순천씨와 공동저자인 세계적인 전시기획자 바바라 블레밍크(Barbara Bloemink) 역시 그의 작품에 대한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 정도로 작가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Empty the Mind』 출간을 기념해 박서보 작가는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이번 책과 작품세계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홍대 근처 아늑하게 자리 잡은 높은 천장의 작가의 작품을 꼭 닮아 세련된 건물에 들어서자 작업실 한켠에 빼곡히 자리한 엄청난 양의 작품에 놀란다. 또한 언뜻 보기에 단순한 작품의 구조에 속아 시선을 두다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넘실대는 무늬의 독창적인 그림에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인터뷰 내내 멋쟁이 노신사 같은 모습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것과는 달리 작품관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캔버스는 나를 세우고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허무는 마당이다.”라며 열정어린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번 화집에는 그의 연대별 작품을 비롯해 인생 단편들을 보여주는 사진을 곳곳에 담아 그림감상을 넘어 시간과 함께 변화하는 작가의 모습을 함께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1960년대 작업을 시작으로 현재의 작업을 비롯해 어릴 적 사진, 결혼 사진, 부인과의 단란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동료 작가들과의 사진 등이 한 곳에 자리해 작품 사이사이로 작가 박서보의 인생 단편을 엿볼 수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한다. 또한 티벳의 고승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착안하여 선택한 오묘한 멋을 내는 붉은색의 표지 한 켠에는 ‘서보문화재단’이란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는데, 이는 우리 미술을 세계에 홍보하고자 하는 작가의 뜻이 담긴 것이라한다. 


비움 

또래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생활했던 시대에 멋쟁이 양장을 한 박서보 어린이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온 것과는 달리 ‘비움’에 주목한다. 그는 1931년 예천에서 태어나 1954년 홍익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50, 1960년대의 앵포르멜, 1970년대의 모노크롬을 거쳐 1982년을 전후로 한지와 수성안료를 이용하는 이른바 ‘후기묘법’으로 이행했으며 캔버스 위에 다시 한지를 바르고 그 위에 안료를 사용한 작업을 주로 다룬다. 근 한 달을 불린 한지를 선과 선 사이를 긋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잡념을 비워내는, 마치 스님의 반복되는 염불과도 같은 수행으로 비워진 공간은 사색의 공간으로 재탄생해 관객에게 정신적 치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의 작품은 언뜻 보기에 서구의 미니멀리즘 작품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러한 비움의 과정이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작가가 강조한 비움은 서구 미니멀리즘의 ‘최소화’와 상반된다. 서구의 미니멀리즘이 최소한의 생성이라 한다면 그의 작품은 작가의 손질을 최소화한 것이 아닌 많게는 몇 개월 동안 비워내고 비워내는 인고의 축척 과정을 통해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두터운 한지위에 선을 긋고 채마르지않은 물감을 밀어내는 행위를 통해 빈 캔버스나 종이를 채워나가면서 손과 종이(캔버스)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들을 주격으로 끌어내 매체의 자율성을 극대화한다. 연필이나 손가락 등으로 긋고 문지르고 지우고 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신체의 행위성에도 집중한다. 이러한 물질과 신체, 자아와 세계가 합일되는 방식은 한지라는 동양의 매체를 통해 더 큰 정서적 공감을 발휘한다. 진행하는 동안 선들이 사라지고 뭉개지는 이러한 원초적 상태로 지워지는 과정은 흔히 생각하는 작품을 ‘그리는’ 것이 아닌 때묻지 않은 자연으로 회귀하는 동양의 정신과 닮아있다. 인터뷰 마지막에 덧붙인 “그림은 그림 자체로서 손맛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닌 작가의 사유와 경험이 베어나야 미술이 맛이 있어진다”는 작가의 말처럼 과정의 거듭으로 한지가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는 동안 작가의 사유와 경험은 점차 잔잔하게 빛을 발한다. 


작가는 디지털의 21세기의 빠른 변화가 현대인에게 주는 스트레스에 작품을 통한 치유의 기능을 강조한다. 미술이 20세기를 지나 정신없이 돌아가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추락하는 현대인들의 병적인 스트레스를 위로하는 역할을 하고, 보는 사람의 모든 고난과 스트레스를 흠뻑 빨아내 버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미술의 역할임을 강조한다. 그는 죽기 전에 이루어야 할 꿈으로 미술관을 설립하는 것과 박서보 현대미술상(가칭)을 제정하는 것이라 말했다. 그리하여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는 권위 있는 미술상을 통해 젊은 작가들을 발굴·후원함으로써 사후에 더욱 본인의 예술세계를 확장하고자 한다. 이렇게 오랜 세월 묵묵히 쌓아온 작업을 통해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가 실제 삶에서도 비움의 삶을 실천하려는 모습에서 작가와 작품이 꼭 닮아있음 알 수 있었다. 작가의 바람대로 관객들이 ‘비워진’ 그의 작품을 통해 모든 고통과 고난이 치유되고, 더 나아가 사람들을 안으려는 작가의 따스한 예술세계가 세계 속으로 점차 뻗어나가길 바란다. 



- 정수임(- )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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