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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홀씨의 여행

김아타

홀씨는 스스로 방향을 찾지 못한다 바람이 부는 대로 간다
그것이 홀씨의 길이고 자연의 섭리다 바람이 그를 데려다 준다
그것이 홀씨와 나의 운명이다
나는 이제 홀씨처럼 바람에 나를 맡긴다

조용한 오후.

하얀 종이 위에 홀씨 하나가 날아들었다. 홀씨는 눈처럼 내려앉았다. 홀씨는 곧 하얀 종이 위에 뿌리를 내리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뉴욕 맨해튼 29가. 로이스란 아름다운 여인이 살던 집에 짐을 부렸다. 나는 마치 운명처럼 이 집에 왔다. 아홉 달 동안 이 집을 모던하게 고쳐놓고 그는 뉴욕 근교 조용한 곳으로, 글을 쓰기 위하여 떠났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이처럼 연이고 관계함이다. 뉴욕으로 이사를 온 지 한 달 남짓, 정리가 덜 된 집은 아직도 어수선하다.

공자는 58세에 천하를 주유했다. 쉰이 넘은 나는, 그 나이가 되기 전에 나를 낳고 키워준 곳을 떠나기로 했다. 서울에 마련한 스튜디오, 가족이 살던 아파트를 모두 정리했다. 이 시간 어디로 주유할 것인가? 모스크바? 베이징? 런던? 파리? 어느 산골? 찬란했던 이슬람 문화의 뿌리?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떠나기로 결심한 다음 날, 뉴욕으로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뉴욕은 살아 있는 선(禪)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아수라장 같은 뉴욕은 선 그것이다. 야단법석이다. 강한 홀씨만이 살아남아 자신의 DNA를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이 뉴욕이다. 그래서 뉴욕은 역사가 된다. 안데스 산맥의 거대한 곤돌라가 높은 하늘에서 유유히 날 수 있는 것은 태평양을 건너면서 세를 불린 거센 바람 때문에 가능하다. 바람이 새를 날게 한다. 센 바람은 새를 더 높이 날게 한다. 내가 뉴욕으로 온 이유이다.

흔 히 뉴욕을 진정한 프로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새로운 가치를 외면하거나 유기하지 않는 것, 좌고우면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프로페셔널의 세계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홀씨이고 DNA이다. 그렇다. 뉴욕은 홀씨들의 경연장이다. 뉴욕은 돛단배를 타고 오거나 보트피플이거나, 747 점보기를 타고 온 살아남은 홀씨들이 만든 도시이고 나라이다. 홀씨들의 전설, 야만과 진화의 도시, 지독한 아이러니는 진정한 DNA(유전자)를 가진 프로페셔널 홀씨만 살아남아 역사를 만든다. 그것이 뉴욕이고 축복받는 이유이다.

20년 전,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Anderson)은 뉴욕에 20만명의 아티스트가 살고 있다고 했다. 그중치열한 경쟁 속에서 제대로 밥을 먹고 사는 아티스트가 2만명 정도라 했다.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내가 사는 건물에만 잘나가는 아티스트가 4명이나 살고 있다. 뉴욕은 아티스트에게는 천국이자 동시에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비열한 말죽거리이기도 하다.

사 진을 시작하며 나는 일가를 이루겠다고 했다. 다른 작가들이 도시로, 해외로 나갈 때 나는 경남 양산의 깊은 계곡, 배네골로 들어갔다. 내가 가는 길은 현대미술의 유행과는 다른 길이었다. 배네골은 한국의 수많은 계곡들과 마찬가지로 높고 낮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계곡은 일년 내내 물이 흐른다. 계곡에는 수많은 돌과 이끼, 풀, 곤충이 살고 있다. 그곳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게 해주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때로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깨달음에 미친 듯이 울고 웃던 시절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잘못 가고 있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철모르는 유행을 따라잡느니 내가 유행을 만들고 싶었다. 어느 순간 나는 무한 자유를 볼 수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는 작은 돌 밑에 있던 낙엽을 집어 들었다. 낙엽에는 홀씨 하나가 묻어 있었다. 홀씨는 생명이었다. 그 순간 큰 바위와 숲과 나무들, 흐르는 강물과 강가의 돌들과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은 살아 있는 생명 덩어리로 다가왔다. 어둠이 내리는 배네골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축제의 장이 되었다. 배네골에서 보낸 10년은 무모했지만 가치 있는 행동이었고 축복이었다. 잘못 갔기에 나는 새로운 곳에 갈 수 있었다.

뉴욕에서 열린 첫 전시회에서 사람들은 'On Air' 시리즈에서 텅 빈 타임스퀘어를 보았고 바람과 정적만 감도는 42번가를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빈 공간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카메라를 열어놓았을 때 수만대의 자동차가 그 거리를 지났고 수만명이 그곳을 지나쳤지만, 그 수많은 존재들은 화면에 담기지 않았다. 공기처럼, 지나갔다. 배네골에서 단련한 나만의 이미지 훈련이 뉴욕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었고, 나는 런던으로 베이징으로 또 먼 먼 곳으로 주유했다.

홀씨는 그 나무의 DNA(유전자)를 통째로 가지고 있다. 홀씨는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를 송두리째 저장하고 있다. 작은 홀씨 하나는 상상할 수 없는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몇백만 기가바이트의 하드로는 저장이 불가하다. 그렇다. 홀씨와 DNA는 계측할 수 없는 켜와 밀도를 가졌다. 그래서 두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디지털이 두께를 가지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홀씨는 스스로 방향을 찾지 못한다. 바람이 부는 대로 간다. 그것이 홀씨의 길이고 자연의 섭리이다. 바람이 그를 데려다 준다. 그것이 홀씨와 나의 운명이다. 20년 작업을 통하여 세상의 이치를 찾으려 한 나는 이제 홀씨처럼 바람에 나를 맡긴다. 이제는 바람이 나를 데려다 줄 것이다. 센 바람이 불면 높은 곳에서 세상을 더 넓게 볼 것이고, 바람이 잦으면 그곳에서 세상의 깊이를 볼 것이다.

나는 오늘, 그 홀씨와 DNA를 생각한다.

홀씨가 새를 앉게 하고, 아름다운 실루엣을 만들고, 나를 인간으로 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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