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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밟고 하이킥

황주리

103년 만의 폭설이라고 한다. 연초 며칠 새 내린 하얀 눈을 하늘에서 보내는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한껏 밟았다. 눈이 한참 내리던 그날 “눈을 밟으며 걸으니까 너무 재밌어요” 하고 호들갑을 떨며 친구와 밥을 먹으러 어느 허름한 음식점으로 들어섰다.

조그맣지만 꽤 단골 고객이 많은 곳이었다. 눈을 밟는 일이 너무 재미있다는 말에 주인 아줌마는 일침을 쏘았다. “재밌어요? 나는 넘어져서 지금 허리를 못 쓰는구먼.”

어린아이 같은 나의 호들갑이 그만 무색해지고 만다. 씩씩한 식당 주인 아줌마에겐 결혼도 한 번 한 적이 없고, 아이도 낳아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아줌마는 오십이 넘어도 아이인 거다. 이를테면 ‘지붕 뚫고 하이킥’이라는 내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에 나오는 ‘김자옥’ 교감 선생님 같은 스타일인 거다. 하지만 나는 그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그 프로에 나오는 그 누구도 사랑스럽지 않은 이가 없다. 이 폭설에 지붕 뚫고 하이킥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빵꾸똥꾸’라는 말로 세간의 관심과 비난을 동시에 모은 꼬마 해리도, 해리에게 늘 구박만 받는 신애도 너무 사랑스럽다.

언제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일이 그리 많던가? 내게 그 프로는 드물게 우리에게 건강한 웃음을 선사하는 고마운 프로그램이다. ‘문제가 된 ‘빵꾸똥꾸’라는 말도 어릴 적에 엄마로부터 들어본 것처럼 왠지 모르게 친숙하다. 어쩌면 그렇게 부르고 싶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인지 모른다. 빵꾸똥꾸란 말은 드라마 속의 어린 해리가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말이 남을 향한 사랑 표현인지도 모르고 질러대는 애칭 같은 건 아닐까? 강아지 이름을 그렇게 지으면 어떨까?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드라마 중독이 됐는지 나조차 누군가에게 ‘이 빵꾸똥꾸야’라고 부르고 싶다. 그건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내 최고의 애정 표현일 거다. 세상의 빵꾸똥꾸들아. 용기를 내 이 흰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라. 걸어 들어가다 보면 사각사각 자신이 흰 눈을 밟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으랴?

갑자기 언젠가 쏟아지던 폭설의 기억이 떠오른다. 1985년 겨울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지금은 지척인 강릉을 향해 달렸다. 버스 기사님은 아무리 애를 써도 빨리 갈 수가 없었다. 눈은 소리 없이 쌓였고 버스는 엉금엉금 기었다. 나는 지방대학의 시간강사로 1주일에 한 번 네 시간씩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학생들 중 아무도 교실을 떠나지 않고 그 두 시간 동안을 꼬박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대에 약속 하나로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 고마운 기분이 들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강의할 예정인 서양미술사는 그날 내리던 눈의 감동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1000년의 미술사가 하룻밤의 눈에 비하랴? 나를 두 시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물었다.

“선생님 눈 오는데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마음속에 매일 눈이 내립니다. 그 눈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서울 사람들 다 하는 출세도 하고, 이름난 예술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글쎄 출세란 무엇일까? 창 밖에 내리는 하염없는 눈은 그 때 묻지 않은 순진한 학생들에게 정답을 말해주지 못했다. 나 역시 지금도 모른다. 출세가 인생의 정답이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을 했을까? 이런 정도의 우답을 혼잣말로 중얼거려 볼 뿐이다.

1980년대 중반, 그 폭설 내리던 날에 교실을 떠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들 모두의 안부가 궁금하다. 강원도 사투리는 유난히 정겹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닮았던 때 묻지 않은 젊은 그들로부터 다시 들어보고 싶은 그리운 호칭 ‘선생님’이 문득 귀에 선하다.

그래, 오늘 같이 펑펑 눈 내리는 날 제군들께 내 사랑의 메시지를 보낸다.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눈을 밟고 하이킥 하자.’

원문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10701033037191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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